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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당시 서울의 인구는 90만명 정도였다. 그때부터 1950년대 말까지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울의 인구는 증가와 감소, 급속한 증가를 경험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서울의 인구는 169만명으로 1945년에 비해 80만명 정도 늘어났다. 그후 1951~1956년 서울의 인구는 전쟁 전에 비해 줄어들었으나 1959년에 이르면 200만명(209만명)을 돌파하게 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인구 집중

저자 홍성태 교수는 거대도시 서울이 하루빨리 파괴적 개발의 덫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와 사람을 돌보는 생태도시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 홍성태 지음, <서울의 개혁> 저자 홍성태 교수는 거대도시 서울이 하루빨리 파괴적 개발의 덫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와 사람을 돌보는 생태도시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 진인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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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호철이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때는 1966년 2월 8일부터 10월 31일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당시 서울은 이미 만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서울은 만원이다>가 인기리에 연재되던 그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예를 찾을 수가 없는 서울의 인구 집중은 1966년부터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까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손정목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1966∼1980년의 15년간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500명의 인구가 늘었다. 이 증가수를 15로 나누고 다시 365로 나누면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롭게 늘어난 셈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씩 인구가 늘어나면 매일 22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통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의 쓰레기가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1966년 4월 4일 이후부터 제4공화국이 끝나는 1979년 10월 말까지 서울시 간부들에게는 토요일·일요일이란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4>, 290쪽

마치 전쟁과 같은 인구 증가는 서울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서울은 국토의 0.6%에 불과한 606㎢의 면적이지만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22%에 해당하는 1050만명이 모여 사는 거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거대도시 서울은 대한민국의 부와 탐욕이 결집된 욕망의 결정체다. 최근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펴낸 <서울의 개혁>은 거대도시 서울이 안고 있는 문제를 통렬하게 분석하는 저작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파괴와 개발을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전두환 정권은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한강에 콘크리트 제방과 보를 건설하여 서울시를 흐르는 한강 구간을 거대한 인공수로로 만들어 버렸다.
▲ 한강종합개발 표지석 전두환 정권은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한강에 콘크리트 제방과 보를 건설하여 서울시를 흐르는 한강 구간을 거대한 인공수로로 만들어 버렸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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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집권한 1961년부터 1979년까지다. 박정희 정권이 집권한 이 기간 서울의 변화는 1966년부터 197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벌어진다. 1966년 4월 불도저 김현옥 시장의 취임은 서울의 대대적인 파괴와 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의도 개발, 영동 개발, 강변도로, 청계고가, 세운상가, 세종로 지하도, 광화문 복원, 시민아파트 건설 등은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추진한 사업들이다.

조국 근대화의 이름 하에 추진된 파괴와 개발은 비리와 부실을 조장하고 방치했다. 그 결과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1970년 4월 8일 아침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것이다. 신축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벌어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33명의 주민이 사망했고, 불도저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해임됐다.

두 번째 시기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서 또 한 차례의 개발 열풍이 서울을 휩쓸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면서 파괴와 개발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은 서울의 개발을 부채질하는 촉매제였다.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대표적인 개발사업은 한강종합개발사업이다. 1982년 시작되어 1986년 완료된 이 사업은 1967~1969년 추진된 1차 한강개발사업을 크게 능가하는 것으로, 강변을 파괴하고 콘크리트 제방과 보를 건설하여 한강의 서울 구간을 거대한 인공수로로 만들어 버렸다.

세 번째 시기는 이명박,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임하는 기간에 벌어진 파괴와 개발 바람이다. 이명박, 오세훈의 파괴와 개발은 녹색으로 포장되었다는 점에서 신개발주의라 부를 수 있다.

이명박 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원과 뉴타운사업, 오세훈 시장이 추진한 한강르네상스와 디자인서울은 녹색으로 포장된 또 다른 파괴와 개발사업이었다. 이명박 시장이 추진한 졸속적인 청계천 복원과 뉴타운 광풍의 후과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쓰나미를 연상시키는 서울시 신청사, 거대한 거머리 모양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단군이래 최대의 건설사업이라 선전됐던 용산국제업무지구사업…. 오세훈 시장이 남긴 파괴와 개발의 유산들은 유령이 되어 서울시민들의 일상을 배회하고 있다.

서울의 모든 구성원은 공동의 창조자

서울이 안전하고 쾌적한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살 만한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서울의 개혁>을 통해 거대 도시 서울이 하루빨리 파괴적 개발의 덫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와 사람을 돌보는 생태도시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서울에서 서울을 찾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해야 하는 안타깝고 어이없는 상황"이라는 자각 속에 생태도시 서울을 위한 올바른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경제와 문화의 균형, 부자와 빈자의 균형, 강자와 약자의 균형, 과거와 현재의 균형, 인공과 자연의 균형, 지역과 지역의 균형이 서울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균형발전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서울시가 올바른 균형발전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박원순 후보의 시장 당선은 중요한 전환점임에 분명하다. 저자는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시장이 "개발독재 이래의 서울시정을 근원적으로 바꿔"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명박, 오세훈 전 시장이 대규모 개발을 중심으로 서울시정을 펼쳤다면, 박원순 시장은 복지를 중심으로 자연과 역사를 존중하는 시정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생태도시 서울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서울시민들의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 "아직 개발주의가 지배적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박원순 서울시정이 거둔 성과는 여전히 취약하고 과제는 대단히 크기" 때문에 탈개발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시민적인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난해 12월 공식적인 채택이 무산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다시금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서울은 우리에게 단순히 주어진 공간이 아니다. 서울은 우리가 함께 나날이 만들어 가는 생활공간이다. 서울의 모든 구성원은 이 도시의 공동 창조자이자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공성과 공동선에 기반하여 모든 거주민이 차별 없이 인간적 존엄을 보장받으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 인권도시 서울의 기본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서울시민 인권헌장' 전문(前文) 일부

서울이 생태도시로 거듭나려면 서울의 모든 구성원이 공동 창조자이자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이 같은 시민적인 인식의 전환을 <서울의 개혁>은 제기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개혁

홍성태 엮음, 진인진(2014)


태그:#홍성태, #서울, #생태도시, #박원순,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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