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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문학관의 명예 관장인 양태부 선생의 별명은 '오백 수'다. 외우고 있는 시가 많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어떤 자리에서건 꼭 그 상황에 맞는 시를 찾아내는 그 분의 능력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지난 15일 읍에 나간 김에 강화문학관으로 놀러갔더니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반긴다.

"반갑소. 커피 한 잔 할랑교?"

나를 보자 일부러 경상도 사투리로 말한다. 동향인 내가 반갑다는 표시다. 

차를 마시며 열흘 전에 다녀온 고향 이야기를 했다. 그곳에는 진달래며 벚꽃이 한창이었는데 강화도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고 하자 그가 시 한 수를 꺼내 읊는다. 양 선생은 시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고 적절한 시를 떠올리니 말이다. 눈까지 지그시 감고 시를 읊는 그를 따라 나도 시 속으로 들어갔다.

올해도 진달래가 찾아왔습니다.
 올해도 진달래가 찾아왔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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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올라가는 길

김포서 강화까지 오는데 일주일 걸렸구나
내 걸어보아도 한나절이면 가겠던데
들를 곳 다 들러왔구나
봄에 진달래도 그랬다

함민복 시인이 쓴 '자귀나무 꽃'이란 시다. 자귀나무는 모든 나무들이 다 꽃을 피우고 잎을 내도록 내내 지켜보다가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잎이 돋고 꽃이 핀다. 꽃이 핀 모양새가 꼭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편 것 같다고 해서 나는 일부러 '공작새 꽃'이라고도 하고 또 제갈공명이 들고 다니던 부채와 닮았다 해서 '제갈공명 꽃'이라며 부르기도 했다. 강화에서는 읍에서 선원면으로 넘어오는 언덕길의 양 옆으로 여러 그루의 자귀나무를 볼 수 있다.

양 선생은 연거푸 한 번 더 읊는다. 시를 읊을 때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눈을 감았다. 그를 따라 나도 눈을 감았다. 꽃이 올라오는 길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함민복 시인이 그렸던 꽃길이 우리 앞에도 펼쳐졌다.

지난번에 집안에 일이 있어 친정에 다녀왔다. 4월 초입인 2일에 내려갔다가 간 김에 고향의 봄을 보고 오자 싶어 내처 일요일인 5일까지 머물다 왔다. 내 고향 경북 청도는 한창 꽃 잔치 중이었다. 산이며 길 가에는 진달래며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집 근처 밭에는 자두나무가 자잘한 꽃들을 담뿍 쓸어 담아 바람 든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운문사로 가는 길은 벚꽃 터널이었다. 왕복 2차선 도로는 온통 꽃으로 울타리를 친 듯했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도록 내내 꽃물결을 보았으니 못 잡아도 2킬로미터가 넘을 길이었다. 벚꽃을 보러 진해까지 갈 것 없다, 사람이 별로 없어 여기가 더 좋다며 연신 환호성을 지른 게 열흘 전이었다.

진달래 꽃길을 걷습니다.
 진달래 꽃길을 걷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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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화로 올라오니 꽃이 필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강화는 그때까지도 겨울인 듯했다. 그러나 어느 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더니 벚나무 가지 끝에도 볼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한 번 꽃물이 오르자 금방이었다. 앞 다투어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고 벚꽃도 뜨거운 냄비 솥에 들어간 강냉이 알갱이인 양 부풀어 올랐다.

지난 월요일(13일)에 고려산 자락에 있는 고인돌을 보러 갔다. 고려산은 해발 약 450여 미터가 되는 산으로 산 아래에 고인돌이 100여 기나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대표 고인돌로 손꼽히는 부근리 고인돌도 고려산 아랫마을에 있고 그 외 점골이며 고천리, 오상리 등지에 있는 고인돌들도 고려산 발치께에 있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삼거리 고인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으로 들어선다. 얼마 안 가자 진달래가 반겨주기 시작한다. 강화의 진달래는 유난히 색이 진하다. 그것은 추위를 이기고 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화의 겨울은 다른 곳보다 더 길다. 어르신들은 11월에 입기 시작한 내복을 이듬해 4월까지도 벗지 못한다. 농담 삼아 강화는 6개월이 겨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강화의 진달래들은 다른 지방의 진달래들보다 모진 추위를 더 오래 견디고 이겨내어야 한다. 그렇게 이겨낸 꽃들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잿빛 가지들과 진분홍 꽃의 색 대비가 참 아름답다.

경북 청도에서 진달래를 본 지 꼭 열흘 뒤에 강화도에서 진달래를 본다. 우리나라가 작은 나라인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그렇지도 않다. 꽃이 올라오는 데 열흘씩이나 걸렸잖은가.

고려산 자락에는 이런 고인들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고려산 자락에는 이런 고인들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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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근처에 자리를 깔았다. 김밥과 물을 꺼내고 작은 유리병에 담아온 구기자 술도 내놨다. 술잔으로 하려고 젖빛 찻잔도 챙겨왔다. 구기자 술은 마치 적포도주 같이 색이 붉다. 색깔이 고운 이런 술은 술잔도 색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찻잔을 다포에 사서 챙겨왔던 것이다.

술 한 잔을 따라서 산에 올린다.

"한 잔이지만 천 잔, 만 잔인 양 여기시고 기쁘게 받아주옵소서."

고인돌이 있는 이곳은 신성한 곳이다. 몇천 년 전, 우리의 조상님들이 밟았던 곳이고 또 몸을 누여서 잠든 곳이다. 그러니 이곳을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술 한 잔을 올려 고수레를 하고 남은 술을 찻잔에 따라서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진달래가 청도에서 강화까지 오는 데 열흘이 걸렸다. 영변의 약산까지는 며칠이 걸릴까. 들를 데 다 들러 가면서 쉬엄쉬엄 올라갈까. 아니면 기다리는 마음을 읽고 재게 발걸음을 놀릴까.

소월의 시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는 이제 막 필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화도의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차비를 하고 꽃봉오리에 볼그스름하게 물을 들이고 있지 않을까.

열흘 뒤면 진달래 산천이 될 영변의 약산을 그려본다. 강화도를 거쳐 영변까지 진달래가 올라갈 길도 그려본다. 갑자기 북한이 이웃집인 양 가깝게 느껴진다.


태그:#강화도, #고인돌,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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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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