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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집에 핀 앵두나무꽃
 시골집에 핀 앵두나무꽃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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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건데,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순간은 이별이었다. 나이 여섯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8살에 어머니마저 떠나보냈다. "구두수선하고 집에 갈 테니 먼저 혼자 집에 돌아가라"며 제과점에 들러 빵을 사주고 떠나셨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직도 선하다.

어머니께서 시장에서 사준 원피스 두벌과 맛있는 빵이, 이별을 의미하는 것인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후 나는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머니께서 평소에 즐겨 입으셨던 밤색 바탕에 하얀 바둑무늬 스웨터를 입은 여인이 언뜻 보이는것 같아 "엄마" 하고 달려 가는 꿈을 꾸곤했다.

      시골집 딸기밭에 서식하는 제비꽃
 시골집 딸기밭에 서식하는 제비꽃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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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나 식은땀이 흐렀던, 45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매순간 다가오는 삶의 폭풍속에서도 자식들 만큼은 꼭 품안에 안고 살았다. 그 이유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그들이 살아갈 인생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어린시절에 겪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에 할머니에게 혼나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울던 생각이 난다. 대자연의 품이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푸근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수십 년 동안 도시에 살면서 삶의 굴곡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엇나가지 않았던 것은 어린시절에 자연의 정서 속에서 자란 영향인 것 같다.

     분홍색 앵두꽃이 피어나는 시골집
 분홍색 앵두꽃이 피어나는 시골집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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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5남매는 시골에 사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할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공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에 사는 그리운 어머니를 찾아 떠났다. 단칸방에 부엌 하나 딸린 집에서 가난하게 사는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서 어머니를 찾았던 눈이 하얗게 내린 그 겨울을 기억한다.

초라했던 살림이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하얀 쌀밥에 김치를 얹어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 깔린 이불 밑에서 잠잘 수 있었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시골집 닭과 자연에서 얻은 가죽나물
 시골집 닭과 자연에서 얻은 가죽나물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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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선 서울생활은 먼 이국땅을 밟은 것처럼 생소했지만 피붙이를 찾은 안정에 한동안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고향에 남은 두 동생들을 향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어머니를 설득하여 시골 동생들을 불러서 함께 살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 기쁨도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진 못했다.

하기야 그때는 돈이 있어도 쓸 데도 없고 쓸 줄 모르는 시대였다. 고작해야 좋은 집에 좋은 의식주가 전부였으니까. 어머니의 도움으로 1980년에 서울 남영동에 있던 현대관광영어통역학원에 다녔다. 덕분에 서울에서 관광영어 가이드도 하고 나름대로 한 단계 높은 삶을 잠시 누렸다.

그 이후에 어머니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회하여 그리스도의 삶에 심취하는 바람에 한창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며 마더데레사 수도회에 입회하여 봉사와 기도의 삶을 2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외국의 음식 적응의 부작용으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회의 원장 흑인 수녀의 "아녜스야 결혼하여 사는 삶도 천주의 삶이다"라는 말을 끝으로 어머니가 오셔서 보따리를 싸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난 오는 내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기억이 난다.

        자연에서 얻은 먹거리들입니다
 자연에서 얻은 먹거리들입니다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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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에 찾아온 첫사랑에 내 모든 것을 주었다. 그리고 곧 찾아온 이별에 3년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첫사랑의 깊고 넓은 터널을 통과하는데 빛을 찾고자 선택한 결혼이 불행의 또 다른 터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혼은 잠시,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긴방황의 연속이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10년 만에 두아이와 함께 황량한 사막 가운데 서게 되었다.

나의 좌우명 중에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말이있다. 40살에 아이들과 혼자가 된 나는 살 궁리를 하던 끝에, 결혼 생활 중에도 동네 학생들 과외를 하여 모은 돈으로 IMF때 망한 레스토랑을 인수했다. 어린 아이들 키워가며 오직 가계와 집을 오가며 정말 눈 부릅뜨고 열심히 장사하여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아이들과 함께 먹고 살라고 하늘이 도왔던지 가게는 잘되어 돈을 벌었지만 바쁘게 산다고 정작 아이들과 여행 한 번 할 기회가 없었다.

      머위가 자라는 시골집
 머위가 자라는 시골집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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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은 돈을 사기꾼의 달콤한 유혹에 절반 이상 잃게 되었다. 이상하게 어려운 사람들을 상대로 마치 도와줄듯이 다가와서 뒤통수를 치고가는 인간들이 더러 있다. 그런 시절을 겪은 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어느날 대낮 햇볕 아래를 걸어가는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 순간 나는 이대로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 시골로 이사를 왔다. 당시 큰아이는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었고 작은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처음 3년 동안은 나무를 심고 흙을 만지며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자연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종일 풀을 뜯고 흙냄새를 맡으며 나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암닭이 낳아준 알과 채소들입니다.
 암닭이 낳아준 알과 채소들입니다.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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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 지역에서 부지런히 살며 텃밭에서 온갖 먹거리를 재배하고 틈 나는 대로 농촌 관련 글을 쓰고 있다. 도시의 문화 생활도 즐겁지만 농촌에서 신선한 공기와 채소 키우며 살아가는 것도 평안한 생활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도 훌쩍 자라서 큰 아이는 시험준비를 하고 있고 작은아이는 올해 대학에 들어간다.

아이들을 독립시키려면 아직 몇 년은 더 도와줘야 하는데... 내가 나이가 든 관계로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혼자 자식들을 키우며 삶의 전선에서 전사처럼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지금은 자연에서 먹거리를 얻으며 소박한 생활을 하고있다. 삶의 길을 되돌아 보건데 인생은 슬픔이라는 낱실과 기쁨이라는 올실이 함께 엮어가는 하나의 천조각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잘것 없는 내 삶이지만 삶의 위기에 계신 분들을 위해 조용히 회고해본다.


태그:#위기는 기회다, #이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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