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열정> 표지
ⓒ 솔
헝가리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에는 두 친구가 나온다. 부유한 헝가리 근위 장교인 아버지와 프랑스 귀족 가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헨릭과 가난한 관료 아버지와 폴란드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콘라드가 그들이다.

두 소년은 열 살 되던 해, 사관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작은 단도를 허리에 차고 군청색 제복을 입은 소년들은 그들이 맞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다 서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들은 마치 "자궁 속의 일란성 쌍둥이처럼 붙어 지냈다."

헨릭은 키가 큰 아이였지만, 비쩍 마르고 몸이 약했다. 폐가 좋지 않아 정기적인 진찰을 받아야 했지만, 병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병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소년은 섬세하고 감성적이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독을 참지 못해 자주 아팠다. 소년은 또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아이였다.

콘라드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골격이 두드러진 건장한 소년이었다. 음악적 영감에 쉽게 사로잡히곤 한 콘라드는 본인 내면의 리듬이 삶을 장악하는 것을 그대도 내버려두는 아이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콘라드에겐 남들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이 뚜렷이 새어 나왔다. 내면의 음악에 열중하느라 그런 건지, 소년은 말수가 적었으며 주로 침묵 속에서 세상과 사물을 인식했다.

두 소년은 그들을 에워싼 환경과 개인적인 기질로 인해 언제나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고 서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를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둘은 만났고 이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비로소 둘은 이전 삶의 답답함에서 탈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둘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둘의 사이는 분명 흔한 말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애정, 진지함, 조건 없음"의 관계. "조롱꾼들을 침묵시키는 결정적인 힘"이 있는 관계였다.

그들은 함께 성장했고 어엿한 군인이 되었으며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위대한 우정은 계속됐다. 그러다 헨릭은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은 아름다운 여인 크리스티나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콘라드는 이들의 결혼을 곁에서 축복하며 전과 같이 함께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콘라드가 헨릭 앞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8년이 흐른 뒤 크리스티나 역시 자살과 다름없는 죽음을 맞는다. 콘라드가 떠나고 사십일 년 사십삼 일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헨릭은 당황하다 분노했고, 절망하다 결국에는 친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긴 시간 동안 헨릭은 자신의 성안에 틀어 박힌 채 '왜'에 골몰하는 병자가 되어갔다. 친구는 왜 나를 떠났는지, 크리스티나는 왜 내가 아닌 친구를 사랑했던 건지. 헨릭은 병자였지만 죽을 수는 없었다. 콘라드가 언젠가는 찾아올 것을 알았기에.

소설의 후반부는 낭떠러지를 만난 물줄기가 폭포수가 되어 격정을 내뿜듯, 사십일 년 만에 노인이 되어 나타난 친구에게 자신이 찾아낸 '왜'에 대한 답을 뿜어내는 헨릭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인의 독백은 절제된 포효였다.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누르며 친구에게 자신의 41년을 쏟아내는 장면을 읽으며 내 심장은 쫄아들 대로 쫄아들어 버렸다.

서로를 원하더라도 태생적으로, 그리고 기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은 온전히 맺어질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사회적으로 극명하게 분리되는 헨릭과 콘라드, 헨릭과 크리스티나 두 집안의 계급 차이와 그들이 지닌 부의 양의 차이도 그들의 위대한 우정, 사랑이 완성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 또한 했다.

헨릭으로부터 떠나가는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를 통해 나는 인간이 지닌 질투심과 자만심이 어떻게 오랜 세월 이룩한 아름다운 가치들을 파괴하는지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를 욕할 순 없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이 책이 결국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고 예상했다. 슬픔으로, 원망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하지만 헨릭의 독백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삶을 져버리고자 사십일 년을 죽은 사람처럼 버텨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오히려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복수, 배신, 깨진 우정,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친구와 연인 그리고 자신의 삶이 실패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냈다. 아마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 죽지 않고 친구를 기다렸던 게 아닐까.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 <본문> 중에서

헨릭의 이 말로써 그들의 삶은 다시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우정을 나눴고 사랑했다. 그 때 그들은 불꽃이 일 만큼 뜨거웠고 또 격정적이었다. 그들의 삶은 그 뜨거움 자체로 완전했다.

산도르 마라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내게 분명히 전해지는 듯했다. 우리 삶에 뜨거운 열정이 단 한 순간이라도 타올랐다면 우리는 가슴 벅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의 순간이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 테니까.

회색빛 우수와 슬픔이 깊게 배여 있는 책을 읽고 나니 남는 것은 '열정'이었다. 마치, 우리네 삶 같았다. 지난하고 슬픈 삶을 이어가고 있는 듯 하다가도, 가끔은 뜨겁게 몸을 달구는 열정의 순간이 우리에게도 찾아오곤 한다. 이런 순간을 기억한 채 살아간다면, 우리도 헛 산 것은 아니게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열정>(산도르 마라이/솔/2001년 07월 02일/9천원)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솔출판사(2016)


태그:#산도르 마라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