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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통일 토크콘서트로 정부·언론 '종북몰이'의 중심에 서게 돼 강제출국당한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 시민기자가 자신이 한국에서 직접 겪은 일을 정리해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검찰과 경찰에 의한 장기간의 조사가 심신을 많이 지치게 만들었나 보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몸과 마음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는 듯, 방안이 빙빙 돈다. 응접실 텔레비전에서 내 이름이 거론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검찰이 기소를 유예하고 강제출국을 결정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강제 출국 보도가 나오자 그동안 잠잠했던 외신 기자들로부터 갑자기 인터뷰가 쇄도한다. <워싱턴포스트> <AP> <엘에이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허핑턴포스트> <이코노미스트> 등등.

신은미 시민기자 강제출국 소식을 전하는 <월스트리트저널>
 신은미 시민기자 강제출국 소식을 전하는 <월스트리트저널>
ⓒ 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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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관심사는 한국 기자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한국 기자들은 '내가 강연에서 북한에 대해 어떤 발언을 했는가'에 관심을 갖은 반면, 외신기자들은 '표현의 자유와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관심을 보였다.

그동안 조용했던 미국 정부도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국무성 기자회견 당시 내 사건에 대해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고, 젠사키 국무성 대변인은 "신은미, 공식 이름 에이미 정, (우리는) 사건을 주시하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국가보안법에 대해 우려한다"라는 발언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졸지에 '종북' 부모 둔 아이들

얼마 후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게 "내일 출입국관리소의 관리들과 모임이 있으니 변호사 사무실로 나와달라"라고 전한다. 나는 그동안 신세를 진 분들께 인사드리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이튿날 변호사 사무실. 그곳에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 온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출국 당일 내 일정에 대해 의논하고자 왔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강제출국을 집행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같지 않게 상당히 친절했다.

그들은 내 움직임을 시간대별로 세세히 설명해주면서 안전한 출국을 위해 만전을 기할 것이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출국날 우리의 동선도 결정됐다.

2015년 1월 10일. 드디어 미국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미국에서도 내 소식을 다 듣고 있었을 텐데, 얼마나 걱정이 컸을까. 또 졸지에 '종북인사'의 자식들이 됐으니, 속으로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내가 머물고 있던 집으로 출입국관리소 차량 두 대가 도착했다. 나와 남편 그리고 내 수행비서를 해주시는 분을 태운 차량은 안국동에 있는 출입국관리소에 닿았다. 경찰 병력이 인도를 차단하고 도열해 우리가 건물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건물 로비에는 기자들이 우리를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기자단을 지나쳐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우리에게 말했다.

"원래는 구치소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출국하는 게 원칙이지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겠습니까. 곧 서류절차를 밟으신 뒤 내려가 기자회견 하시고 공항으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공항에서 친지분들과 30분 동안 작별인사하는 시간이 마련돼 있습니다."

출입국관리소는 '구치소'라는 절차를 생략해줬다. 이건 모국이 내게 베푸는 마지막 친절일 게다.

강제출국 집행... 공항은 아수라장

'종북몰이' 논란에 휩싸여끝내 강제퇴거 처분을 받고 출국길에 나선 신은미 시민기자가 지난 1월 10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로비에서 배웅을 나온 황선씨와 포옹을 하고 있다.
 '종북몰이' 논란에 휩싸여끝내 강제퇴거 처분을 받고 출국길에 나선 신은미 시민기자가 지난 1월 10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로비에서 배웅을 나온 황선씨와 포옹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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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을 마친 나는 차량에 올라 앞서가는 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차량은 사이렌을 울리면서 신호를 무시한 채 도로를 달렸다. 내가 탑승한 차량 뒤로 한 방송국 차량이 뒤따라왔다. 카메라를 내놓고 인천공항까지 가는 내내 영상을 촬영한다. 아…, 이 무슨 자원·인력 낭비란 말인가.

인천공항 근처에 있는 출입국관리소 건물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그리고 기자들이 우리 차를 둘러쌌다. 우리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동승했던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차량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간다. 그러자 돌아와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배웅하러 오신 분들과의 만남을 생략하고 떠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탑승한 차량이 움직이려고 하자 주차장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누군가는 출발하려고 후진하는 차량의 바퀴 아래로 들어가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움직이는 차량에 몸을 던졌다. 차량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리 와 있던 변호사님이 차량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곤 함께 있던 법무부 직원과 현재 상황을 의논했다.

변호사는 "신은미 선생을 이대로 출국시켰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어떻게 해서라도 배웅하러 온 이들과의 만나게 해줘야 한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법무부 직원과 변호사가 차량에서 내려 다시 건물로 들어간다. 결국 배웅하러 온 이들과의 만남은 성사됐다. 어디서 왔는지 공항경찰대가 차를 둘러싸고 도열해 우리가 건물로 들어설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신은미 시민기자가 지난 1월 10일 강제출국에 앞서 출국심정을 밝히고 있는 모습.
▲ 한국 떠나는 신은미씨 신은미 시민기자가 지난 1월 10일 강제출국에 앞서 출국심정을 밝히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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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로비에 들어서서 기자회견을 마친 나는 "몸은 비록 강제 출국당하지만 내 마음까지 그럴 수는 없다, 어려움 속에서도 남북의 화합과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 그리고 어떠한 힘든 상황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국의 동포들과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출국 성명을 남기고 사람들과 눈물의 작별을 했다. 통일 토크콘서트 주최 측을 비롯해 수많은 독자들이 환송해줬다. 통일을 향한 끝없는 의지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저는 북한 여행 후, 민족애와 동포애가 생겼으며 민족의 화합과 평화적인 통일을 염원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의 동포들은 같은 언어·역사를 공유함은 물론, 같은 음식을 먹고,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함께 눈물 흘리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한민족이요, 한 형제요, 한겨레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알게 됐습니다.

저는 책에서나 강연에서나 '우리 남과 북의 동포들은 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하루빨리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 모국의 공공안전과 이익에 해를 끼치는 일인지요?

저는 '사막에서 물줄기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남북의 화합과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랑하는 동포들 그리고 어떠한 힘든 상황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내 모국의 동포들과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여러분! 제아무리 '힘센 악'도 '선함'을 이길 수 없고, 제아무리 강건하게 포장된 올바르지 않음'도 '옳음'을 범할 수 없습니다."(출국 성명 중 일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안내로 기내에 착석한 신은미 시민기자.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안내로 기내에 착석한 신은미 시민기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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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떨어진 나는 출국 절차 없이 차량에 올라 활주로를 달려 비행기에 바로 도착했다. 법무부 직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출국심사대를 거쳐 정식으로 절차를 밟은 남편과 나는 비행기 출입구 앞에서 재회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끝까지 우리의 안전을 걱정해주고, 따뜻하게 배웅해준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남편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탔다. 아직 탑승 시각 전이라 비행기 안에는 우리만 있었다. 승무원이 다가와 음료수를 권했다. 잠시 후 신문을 가져온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한겨레>를 집어 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내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내 인터뷰 기사가 전면에 실려있다. 모국을 떠나는 순간, 2014년 11월부터 벌어졌던 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분단의 비극은 이역만리에서도

공항에서 폭력을 휘두르다 경찰에 체포되는 보수단체회원.
 공항에서 폭력을 휘두르다 경찰에 체포되는 보수단체회원.
ⓒ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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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하니 또 한 번의 소동이 일었다. 나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단체분들과 나를 비난하기 위해 나온 단체분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간다. 그중 보수단체 회원 한 분이 폭력을 휘두르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아수라장이다. 민족 분단의 비극이 이역만리 미국 땅에도 고스란히 젖어들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나는 남편과 함께 우리 교회 목사님 차량에 올라 교회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김기대 담임목사님의 인도로 기도를 드린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 오늘 당신의 귀한 딸이 모진 박해를 견디고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처럼 평화를 선포하다가 고초를 당한 신은미 자매를 주님께서 위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고국에서 애썼던 그 모든 노고들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여 주시고, 앞으로도 평화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은둔의 나날... 사람이 무서워지기도

미국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친지분들이 '위문'을 오셨다. 우리는 그분들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동네에 있는 한 일식집에 갔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하려고 하자 음식점 주인이 말했다.

"신 선생님의 팬이라는 어떤 손님께서 음식값을 내고 가셨습니다. 저희도 지난 두 달 내내 식당에서 선생님 뉴스를 보며 영업했어요. 선생님 정말 장하세요. 저는 평소 선생님의 스타일로 볼 때 선생님께서 조국과 민족…, 뭐 그런 데 관심을 두고 있는 분인 줄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선생님 정말 멋있고 훌륭하세요."

누군가 음식값을 내주고, 음식점 주인이 나를 칭찬하는 것에 기뻐하기에 앞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미국에서마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국에서의 2개월은 내게 일종의 '대인기피증'을 남겼다. 외출을 꺼리게 되고 집에만 머물렀다. 장도 남편이 혼자 가서 봤다.

허위·왜곡보도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고 국민을 오도한 일부 언론사들은 여전히 인터뷰를 하자면서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아직도 인터뷰를 해서 허위보도를 내보낼 게 남아 있을까. 나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한 종편은 아예 카메라맨과 기자를 미국에 보내 우리집 방문을 시도한 모양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들어오려면 일종의 검문소 같은 곳을 통과해야 한다. 방문객이 검문소에 이름과 방문 목적을 말하면 검문소는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들여보내도 좋을지 묻는다. 그러니 아마 시도도 못 해보고 돌아갔을 게다. 대신 그 종편은 다른 집 창문을 촬영해 마치 우리 집을 방문한 것처럼 포장했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이 나왔다. 미국까지 와서 이런 전파낭비를 하나 생각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신은미, #토크콘서트,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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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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