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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함을 넘어서 적막한 길
▲ 다랑쉬길목 한적함을 넘어서 적막한 길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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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다랑쉬를 '오름의 여왕'이라 하던데, 내겐 '나쁜 남자' 같았다. 여왕이나 나쁜 남자나 둘 다 정신건강에는 안 좋지만, 전자는 국민을 아프게 해도 후자는 사모의 마음이라도 가지게 한다.

무심, 까칠한 언행으로 못되게 굴고 매력적 외모로 뭇 여인들의 맘을 농락하는데 지쳐서 막상 물러 서면, 그때는 또 잡아 당기는 초밀당의 기술을 부린다. '나쁜놈' 욕 하면서도 떠나질 못하고 자꾸 보고 싶어한다.

다랑쉬는 그런 나쁜 남자처럼 오르는 길이 다른 오름보다 격함을 자랑해도 그 신비한 마력에 또 보고 싶게 만드는 곳이었다. 오름이 있는 곳이 대체로 제주의 상업 관광지보다 많이 한적한 곳이지만, 다랑쉬는 특히 더 그랬다.

지난달 말, 가시남동이란 동네에 내려서 탐방소 쪽으로 걷다 보면 길 왼쪽에 '늙고 고생스럽게 생긴' 팽나무 한 그루가 비석과 나란히 서 있다.

제주의 팽나무는 육지의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마을 입구에 자리한 상징목이자 보호수다. 인가 한 채 안 보여 적막하기 짝이 없는 이곳도 한때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팽나무 한 그루가 쓸쓸하게 말하고 있다.

4.3을 묵념하는 비석과 팽나무
▲ 오름 입구의 팽나무 4.3을 묵념하는 비석과 팽나무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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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때 완장 차고 일본 앞잡이 하던 놈들이 해방 후에 한국의 순경 복으로 옷만 바꿔 입고 벌인 일 중의 하나가 48년 4월3일의 '제주 초토화 작전'이다. 한라산과 해변 사이 5km 밖인 중산간 지역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란 '제주도 계엄령'이다.

중산간 지대 130여 개의 마을이 소각됐고, 제주 인구의 10% 가까운 생명이 죽었다. 그때 열 가구 남짓 살던 여기 다랑쉬 마을도 폐허가 되고, 굴로 피신한 주민들은 토벌대의 방화로 타 죽었다. 평화로웠던 마을엔 재만 남았다. 제주 작가 현기영의 <순이삼촌>엔 이때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온 섬을 뺑 돌아가며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이 훤히 밝혀 놓은 소까이... 통틀어 이 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 진압이라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폭도 진압에 5만 넘게 죽었다니... 참화 속에 싸그리 불타고 주춧돌과 돌담만 남은 석기 시대로 돌아가 있는... 신석기 시대의 농경인...'

오름의 미덕

푯말 오른쪽은 다랑쉬 굴, 윗쪽은 오름 가는 길
▲ 다랑쉬 굴 가는 길 푯말 오른쪽은 다랑쉬 굴, 윗쪽은 오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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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양쪽에서 마중한다
▲ 오름 입구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양쪽에서 마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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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뚫린 여느 오름 입구와 달리,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한낮인데도 해질 무렵의 숲처럼 어둑했다. '격식 있게 맞아 주는군~' 싶던 입구는 금방 끝나고, 좀 전의 '격식' 운운이 무안해지는 가파름을 바로 맞이하게 된다.

작은 고추가 맵듯이 400m도 안 되는 낮은 높이라고 허술히 본 사람은 '높이'에 대한 편견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갈지(之)자 급경사에 잠 덜 깬 몸은 더 비틀거렸고,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은 미친년 널뛴 모양, 망나니 저리 가라다. 늘 이리저리 흔들리고,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 바로잡아도 얼마 못 가 숨찬 내 삶 같다.

오름의 미덕 중 하나는 그 높이가 보통의 못난 인간들도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이라는 거다. 아무리 숨을 헐떡거려도 30분 내외면 다 오르게 된다. 몸뚱이와 참을성 밖에 없는 못난 것들은 인내력 시험하다 제풀에 지쳐 자빠지거나, 죽어야 끝장나는 그런 세상 아닌가.

대부분의 명산이라는 곳도 그렇게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며 죽을 동, 살 동 기어올라야 된다. '이 세상과 싸우기가 너무 힘드니 니 자신이라도 싸워, 이기라!'는 학대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러나 오름들은 그렇게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자학하지 않고도 '낙오자'로 남지 않아도 되는 높이다. 몸이 휘청 거리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오르다 문득 위를 보면, 나무 끝자락이 우리나라 '지도'같은 정상 입구가 보인다.

   지도 모양 나무터널
▲ 지도가 보인다 지도 모양 나무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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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면 안개가 '당신은 霧津에 오셨습니다'라고 인사 하는 같다. 안개 자욱한 사방과 산 아래 풍경은  그 분위기에 취해 그냥 저 아래로 막, 확- 뛰어내리고 싶게 만든다. 짙은 운무와 바람 섞인 찬 공기를 귀때기 가득 맞으며 혼자 있으니, 가슴이 벅차 눈물이 다 찔끔 나오려 한다.

산에 홀린 사람들이 깊은 고독감 속에서도 수십 년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마음을 얼핏 알 것 같았다. 김두수의 <기슭으로 떠나는 배>를 들으며, 철학자 김영민의 '걷다가 걷다가 사라져 버려라!'를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비현실적 분위기가 마치 가보지도 못한 사막, 이름 모를 황무지 벌판에 서 있는 것 같다. 누구 말마따나 애인도, 친구도 없이 왔지만 그래서 그 외로움의 한끝에 오는 맑고 순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위로 오를수록 안개가 더욱 짙어져 어릴 때 모기약 차 따라 정신없이 쫓아가다가 문득 정신 차리니 혼자 남겨진 상황 같다.

하늘과 공기, 땅의 경계가 불분명

           무인초소는 안개지킴이 같았다
▲ 산불초소 무인초소는 안개지킴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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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영혼같던 쓰러진 갈대들
▲ 안개밭 짓밟힌 영혼같던 쓰러진 갈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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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운무 속에 걸리버 나라의 큰 가마솥같이 생긴 분화구가 산을 둥글게 감싸고 있다. 제주도의 오름은 '설문할망'이 치마로 흙을 나르면서 한 줌씩 흘려 놓고 간 것이란다. 할망의 오름 건설 중, 이 다랑쉬 오름은 손이 한 번 더 간 '튀는' 자식이었다.

흙 한 줌을 흘리고 보니 다른 오름들보다 너무 도드라져 주먹으로 한 번 더 탁- 친 것이 패어져 지금의 분화구가 됐단다. 분화구의 안쪽은 한라산 백록담과 비슷한 깊이와 크기라니, 산의 규모로 볼 때 상당히 크다. 날이 맑았으면 안쪽까지 기어 들어가 한바탕 뒹굴거나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

우리가 분화구라 부르는 것을 제주에선 '굼부리'라고 부르더라. 제주는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동네, 산 이름들도 참 아름답고 다정하고, 개성적이다. 다랑쉬, 용눈이, 새별, 애월, 가시리, 정드르/알뜨르/남드르... 일전에 경주 갔을 때 참 멋없고 무뚝뚝한 그곳의 지명을 대하며 제주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절로 생각났었다. 배동, 마동, 교동, 황남동... 귀족과 왕족들이 천 년 산 곳이라 그런지 동네 이름마저 참 근엄했다.

'다랑쉬'라는 지명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높다'는 뜻과 '달'과 관련된 설이 많았다. 사실이야 어떻든 '높음'을 자랑하는 설보다는 '어둠 속을 고요히 밝히는' 달에 대한 설을 믿을란다. 송당리 주민들은 "저 둥그런 굼부리에서 쟁반 같은 보름달이 솟아오르는 달맞이는 송당리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며 큰 자랑거리란다. 

몇 없던 탐방객들도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니 정상에서 인증샷 찍고는 바로 밑으로 내려간다. 탐방소 맞은편은 안개로 사방이 안 보이는 초소쪽 분위기와는 생판 다른, 밝고 산뜻한 초록색 기운을 내뿜고 있다.

오솔길이 보인다. 지나칠 수 없다. 서장훈이 '앞구르기 열 번'만 하면 도착할 거리밖에 안 되는데, 그 극명한 분위기 차가 마치 저쪽 생에서 이쪽 생으로 건너온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오솔길에서 만난 4.3 하르방

정상에서 마주 본 아끈다랑쉬
▲ 안개 낀 아끈다랑쉬 정상에서 마주 본 아끈다랑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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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너무 없어서 산을 더 도나 마나 하는데, 등 뒤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들린다. 아! 제주도라고 폰 컬러링도 '동백'아가씨구나~ 센스쟁이 할배구먼~ 하며 얼굴을 보니 차림새가 관광객이나 탐방객은 아닌 것 같다.

"여기 관리인 되세요? 요 옆에 용눈이 가려면 여기서 바로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까?
"하도리 사는데, 일주일에 몇 번 여기 와서 두, 세 바퀴씩 돌고 가는데 오늘은 날이 궂어서 오래 못 돌겠네요, 여기서 바로 넘어가는 길은 없고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서 한참 걸어야 되고, 차로 가면 5분 거리밖에 안돼요."

가랑비 흩뿌리는 안개 낀 산에서 여자 혼자 산 넘어가는 길을 물으니 좀 요상타 싶은 눈치다. 혼자 왔냐, 차도 없이 다니냐, 언제 왔냐며 말을 붙이신다. 여자 혼자 여행 다닌다 했을 때의 반응들에 익히 학습돼서, 이때는 거짓말하는 게 편하다.

"아, 예~ 제가 좀 일찍 와서 저녁에 딴 동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나도 할배에게 4.3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요 밑에 굴에서 (4.3) 그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지요?
"그때는 여기 사람은 한 다리 건너면 피해자 없는 집이 없었지, 우리 부친도 그때 가셨지."

할배가 지금 칠순 안팎으로 보이시는데 그때면 10살 남짓의 아이였을 때구나 속으로만 조용히 짐작해 본다.

"5.16은 명예회복이나 보상이 어느 정도 됐는데, 4.3은 한참 더 오래전 일인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 같으세요?"
"여기는 섬이라... 사람이나 소식이 육지까지 건너가기 힘들고, 그때는 아무도 드나들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여기 소식은 광주보다 더 막혀 있었지... 또, 오래 돼서 죽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했잖아."

그 사과 자체가 이쪽 사람들한텐 큰 위안이 됐다는 어조시다. 그 사건과 무관한 사람의 '사과'만으로도 저리 맘이 다 풀린다는 식인데... 해당 당사자들이 좀 더 일찍 사죄했으면 불의의 객이 된 영혼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렸을텐데.

"제주도 대통령도 한 명 나와야겠네요"라며 웃었더니, "그래도 여기는 거의 다 야당이니 다행이지 뭐......" 하신다. 그런 긍정은 많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체념이나 해탈일까, 세월이 준 무딤일까. 숙연해졌다.

버스로 왔다는 내게 걸어가면 한 30분은 족히 걸리고, 콜택시는 요금이 비쌀 텐데. 걱정하시더니 용눈이까지 태워다 주시겠단다. 자가용 아니고 '트럭'이라며 괜히 미안해하신다. 나야 걸어갈 생각하다 계획에 없이 편하게 가게 생겼는데 트럭이면 어떻고 경운기면 어떠랴~.

숙소로 하르방의 마을인 '하도리' 마을을 추천하셨는데, 그 옆 마을 '종달리' 민박을 예약해 놔서 하도리의 아름다움은 다음에 보겠노라 했다. 할배 덕분에 용눈이 오름 입구까지 편하고 빠르게 온 나는 유일한 식사 거리였던 '초코바'를 차비 대신 드렸다. 제주 하르방, 고맙습니데이~

사진가 김영갑이 살아 생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너무 가난해서 끼니 해결책이 없을 때 시골 마을 가서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 돼주면 한 끼 밥, 하루 잠은 해결된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대접받지 못한 영혼

젊은 아빠와 어린 아들의 나란히
▲ 용눈이에서 바라 본 다랑쉬와 아끈 다랑쉬 젊은 아빠와 어린 아들의 나란히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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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같이 다정하구나. 맑은 날의 다랑쉬는 그 형체미가 빼어나 잘 빠진 한복 치맛단 펼친 모습, 엎어 놓은 사발 같다는데, 나는 흐린 날 봐서 그런지 영화 <지슬>에서 봤던 '엎어진 제기(祭器)' 같았다. 죽음의 대유물로 영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제기'가 나온다. 엎어진 제기의 의미가 '대접받지 못한 영혼'이었던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hin-son 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다랑쉬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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