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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은 지름하게 먹으야지. 왜 자꾸 썰으랴?"
"아버님, 이가 시원찮은 분들이 있으니께 그러쥬. 그냥 잡숫는 게 좋으믄 그냥 해두 돼유. 요리는 정답이 없슈. 나한티 맞춰서. 아시쥬?"

지난 25일 오전, 충남 예산군 삽교읍 보성보건진료소. 요즘 잘나간다는 집밥 백 선생도 울다갈 충청도 원단 사투리가 음식 냄새에 섞이니 더 맛깔스럽다. 오늘 배워야할 메뉴 세 가지. 김치찌개는 벌써부터 끓고 있고, 이제 막 콩나물 무침 요리에 들어갈 참이다.

삽교보성진료소에서 열린 요리교실에 참여한 어르신들이 콩나물무침에 도전하고 있다.
 삽교보성진료소에서 열린 요리교실에 참여한 어르신들이 콩나물무침에 도전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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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에 요리사 모자까지 제대로 갖춰 쓴 홀몸어르신(남자)들이 2인 1조가 돼 강사의 말에 따라 콩나물을 소금물에 데치고, 각종 재료를 썰고 있다. "당근을 채치시라"고 했는데, 깍뚝썰기를 하거나 반달모양으로 납작하게 써는 모습도 보인다. 부엌일이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어르신들이니 당연하다. 평생 농사일에 주름지고 거친 손에 잡힌 칼끝이 살짝 떨린다.

"우리 아버님 잘하시네. 괜찮아유. 그냥 그렇게 썰어두."

강사의 칭찬에 자신감 폭발한 어르신, 너무 앞서가다 세 번째 메뉴인 버섯볶음 재료까지 몽땅 콩나물 무침에 섞고는 뒤늦게 골라내느라 분주하다. 서툴지만, 진지하게 배우는 모습이 딱 '초짜'들이다. 시어머니가 아니라, 딸 같고 며느리 같은 보건소 선생들한테 배운다는 게 다를 뿐.

예산군보건소가 지난해 말 시책사업 공모를 통해 발굴한 '독거남 어르신 자활 건강관리교실'이 운영 초반부터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15일과 18일 덕산 나박소보건진료소와 삽교 보성보건진료소에서 각각 문을 연 이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에 서너 가지 요리법과 건강강좌가 진행된다. 매주 1회씩 10주 완성프로그램으로 하반기에는 대흥동부, 신암조곡에서도 운영될 예정이다.

요리법은 된장찌개, 무나물, 오징어볶음, 콩나물김치밥, 달걀국, 동태찌개, 어묵볶음 등 말 그대로 '집밥' 메뉴들이다. 요리강좌 전에는 영양, 운동, 치매, 중풍, 암 등 다양한 건강강좌를 통해 홀몸어르신들의 자활능력을 키운다는 목적이다.

<무한정보신문>
 <무한정보신문>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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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보건소 건강증진팀 오연주씨는 "영향 불균형은 질병을 부른다, 프로그램 첫날 참가어르신들 대상으로 기본적인 건강검사를 했는데 다섯 분이 빈혈로 나왔다"라면서 "특히 혼자 사시는 남자 어르신들은 요리에 서툴러 하루 세끼 식사를 제대로 하시는 게 어려워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2014년 지역사회건강조사 결과에 따르면, 예산군 인구 65세이상 2만1607명 중 6.9%인 1497명이 홀몸노인이며, 이 가운데 남자가 112명이나 된다.

부인과 사별한지 10년째라는 이봉호(82, 신리) 어르신은 "식구가 해줬던 맛을 떠올려보며 반찬을 만들어 봤지만, 쉽지 않았다"라면서 "딸이 가끔 반찬을 해다 줘도 혼자 밥먹기 싫어 굶을 때도 있다, 텃밭에 재료는 많으니까 여기서 배운대로 해먹어 봐야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 두 번째 시간까지 하고 보니 자신감이 생긴다"라면서 활짝 웃었다.

전용행(77, 수촌리) 어르신은 "식구가 세상 떠난지 2년 됐는데, 여전 애들한테 반찬 해오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할 줄 알아야 겠더라"며 "김치찌개를 해보긴 했어도 순서없이 다 넣고 끓였지, 오늘 배운 것처럼 맛있지가 않았다"라고 신기해했다.

25일에 배운 세가지 메뉴만으로도 훌륭한 한끼 식사가 된다. ⓒ 무한정보신문
 25일에 배운 세가지 메뉴만으로도 훌륭한 한끼 식사가 된다. ⓒ 무한정보신문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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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 중에는 혼자사는 어르신뿐만 아니라, 독거 아닌 독거남들도 있다.

임동빈(58, 이리)씨는 "아내는 아이들과 도시에 있고, 2012년에 귀농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너무 연로하셔서 부엌일을 못하신다. 지난주에 배운 된장국과 오징어볶음을 집에 가서 해드렸더니 맛있게 잡숫더라"고 말했다.

홀어머니(88)를 모시고 사는 유순철(61)씨,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는 아내 병수발을 들고 있는 이주호(81)씨는 "요리법을 배우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나와서 바람도 쏘이고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건강해지는 것 같다"라고 입을 모았다.

요리실습이 끝나고 시식을 위해 밥상이 차려지는 동안, 안경자 강사는 이날 한 요리방법과 순서 등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요리법을 정리한 프린트물도 잊지 않았다. 배운 것을 집에서 그대로 해서 먹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성보건진료소 임순희 소장은 "프로그램 이름이 '독거남'으로 돼 있다보니, 처음엔 꺼려하는 분들도 계시고, 지난주 첫 강좌 때는 굉장히 쑥스러워하셨다"라면서도 "두 번째 시간만에 아주 적극적이 되셨다"라고 전했다. 이어 "연로하신 아버지가 홀로 되시면 처음엔 자식들도 자주 들여다보지만, 길어지면 계속 못하게 된다"라면서 "그렇다고 요양보호사를 신청할 정도의 건강상태도 아니면 정말 애매하다, 홀몸어르신들께 유용한 프로그램이다"라고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집밥, #홀몸노인, #건강교실, #예산군보건소,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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