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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 "남이 장에 가니 두엄지게 지고 장에 간다." "장마다 꼴뚜기 날까?"

모두 장(재래시장)과 관련된 속담들이다.

"장날이 맏아들보다 낫다."

많은 것을 구할 수 있는 장날이 아들의 손을 빌어 얻는 것보다 낫다는 뜻을 표현한 속담이다. 장이 우리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이 속담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산물이 넉넉하지 않은 옛날에는 장이 서는 날이 외출하는 날이고 아이들에게는 작은 잔칫날이었다고 아버지는 회고하신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저녁 무렵 어둠이 동구를 먼저 들어설 때까지 "고추 먹고 맴맴" 하며 장에 가신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아버지의 추억담. 물론 그 끝에는 '너희들은 물건 귀한 줄 모르니까'이라시며 교훈을 주시긴 하지만, 아버지가 보신 그런 장날의 모습은 지금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예전의 상주장은 대단히 번성했다고 한다. 삼백의 고장답게 물산이 풍부하기도 했지만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을 가기에 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니, 모르긴 해도 너른 상주 읍면뿐만 아니라 인근에서도 장꾼들이 몰려드는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상설시장이 번듯한 건물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난전이라고 일컫는 좌판은 점점 줄어들고,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직은 장날의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급속히 변모하는 사회에서 머잖은 날에 장날이라는 이름조차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두어 시간 걸어야 했던 장날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어지간한 것은 마트에 있고 백화점엔 없는 것이 없으며, 그것마저 귀찮을 때는 인터넷으로 주문만 하고 넉넉하게 이틀이면 집 현관까지 도착하는 지금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니 오일장이 서기까지 아이들의 마음은 간절했을까. 아마도 다섯 달은 족히 될 기다림의 크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눈에 담아두기로 했다.

 
상주 중앙시장
▲ 상설시장과 오일장 상주 중앙시장
ⓒ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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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이 금방이라도 마당에 들어설 듯하더니 그리 쉽게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겨울의 시샘과 저항이 완강해 아직 아침 날씨는 쌀쌀하다. 혹 늦을까 싶어 움터 올랐던 산수유와 매화나무 꽃가지는 간헐적으로 부는 바람에 오소소 떨며 움츠리고 있다. 그래도 먼 산엔 봄기운이 느껴지고, 보이지 않는 모세관으로 물을 퍼올리고 있는 키 큰 미루나무에선 새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높이 노래한다.

넣을까 했던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 입고 나선 시장은 꽃샘추위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듯 이미 봄빛이 완연하다. 오가는 걸음들이 가볍고 여기저기 은근한 호객소리 명랑하다.

상설시장이 있지만 장날 풍경은 또 다르다. 햇빛 좋은 날 양지바른 텃밭에서 캐온 바랭이며 달래 그리고 냉이 같은 봄나물을 앞에 펼쳐 놓은 할매들, 서둘러 심어야 할 나무 묘목이며…. 햇나물을 늘어놓은 좌판을 앞에 두신 할머니가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던 우리를 보고 물으셨다.

"학생들이 장엔 뭐할라고 우르르 왔을꼬?"

우리는 '오일장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점점 사라지는 옛 문화를 보존할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고 답했다. 할머니는 기특하다고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지만, 눈빛은 왠지 아련하다. '사라지는 장날'이란 말에 어쩌면 우리 만했을 소녀 시절에 보았던 장날의 모습을 떠올리셨는지도 모르겠다.

봄바람에 감기 걸릴라.
▲ 아직은 봄이... 봄바람에 감기 걸릴라.
ⓒ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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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일과 7일에 서는 상주 오일장. 한때는 원근각처에서 오는 장꾼들로 왁자했다던 곳이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점포로 이뤄진 상설시장 상인들도 장날이 되면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막히도록 물건들을 앞으로 내어 놓았다.

시장으로 들어서는 통로에는 차째 들어서서 묘목을 파는 사람, 만물상을 방불케 하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득 펼쳐놓고 연신 효용과 싼 가격을 알려주는 아저씨, 꼭 살 것 같지 않으면서 공연히 이것저것 만져보는 할부지와 가격을 묻는 할매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

아재요, 할매요, 새댁, 아줌마... 온갖 호칭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붐빌수록 신명나는 곳, 이곳저곳 소식이 모이는 곳, 장꾼들은 기자며 장바닥은 신문이다. 곧 있을 총선에서 누가 유력하다느니, 누구는 어찌했다느니 가담항설이 넘쳐난다.

"아이구, 우옌 일로 여게까지..."
"그키, 이기 얼매만이라?"

반갑고 정겨운 목소리가 넘쳐나는 상주 장날.

있을 만한 건 다 있다우.
▲ 좌판 있을 만한 건 다 있다우.
ⓒ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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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은 소란스러우나 평화롭다. 시끄럽지만 정겹다. 길이 막히고 도로가 번잡하지만 여유롭다.

사람들과 물건들로 해서 나아가기도 힘든 통로에 유모차(보행보조차)를 밀거나 전동실버카를 타고 있는 할매들도 적지 않다.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외출이 무척 즐거우신 듯,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이동하시는 모습이 여유롭다.

"그 앞에 좀 비켜줘요. 할매 지나가구로."

아저씨 한 분이 할매가 지나가실 길을 열어주신다.

사람 가득 물건 잔뜩
▲ 도로가 따로 없네 사람 가득 물건 잔뜩
ⓒ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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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 떨이요, 떨이."

아저씨 한 분이 목소리 높여 떨이를 외친다.

"한 묶음에 1000원, 세 단에 2000원."

다른 쪽에선 봄미나리를 팔러 오신 할머니가 흥정 중이시다.

"그러지 말고 두 단에 천 원해요."

아주머니 하나가 연신 묶어 놓은 미나리를 들어 부피를 재어 고르며 가격을 낮춘다.

"아침에 이거 캐온다고 밥도 못 먹고 왔는데, 그키나 깎으면 너무 야박하지."

협상이 결렬을 선언하듯 아주머니가 천천히 일어서며 미나리를 놓는다.

"할매도 참 엔간하시네. 내가 야박한 기 아이라, 세 단까지는 필요 없다니까요."
"하이고, 그 아줌마도 참. 그카마 두 단에 천오백원만 주셔."

엔간하지 않은 할매와 야박하지 않은 아지매가 조금씩 양보하여 서로 흡족한 결과를 냈다. 서로 다른 의견이 하나로 매듭져지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 장날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과는 얼마라요?
▲ 좌판 사과는 얼마라요?
ⓒ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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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점차 사라지는 옛 모습, 보존해야 하는 정겹고 아름다운 문화. 장날도 그 중 하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젠가 없어질지라도 그 시기를 늦추기라도 하고 싶은 풍경. 내가 사는 고장에서 내게 익숙한 말투로 왠지 낯익은 얼굴들이 엮어가는 장날의 정겨운 모습들.

각박해져가는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장날을 우리는 지속시켜야 한다. 이웃의 정들이 모이고 지역의 특산물이 거래되고, 잔치이고 축제가 되는 장이 이제는 젊은 세대의 문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이다.


태그:#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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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을 사랑하고 문학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 관심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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