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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 기원전 44년)는 로마하면 떠오르는 상징적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위협적이었던 갈리아를 정복하고, 로마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여 모든 권력을 손에 쥔 독재관이 되었다.

그는 적은 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격파한 전쟁 영웅이면서 내정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수행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섰던 카이사르는 그 자신의 입지전적인 행보로 인한 인기와 권력 집중으로 공화정의 수호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에 대해서는 로마 공화정의 쇠락을 당긴 독재자라는 의견과 분열된 로마를 통합하고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물론, 그가 매우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줬고 정치적 능력이 매우 출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 그가 직접 쓴, 자신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내전기>이다. 이 <내전기>는 카이사르와 그의 숙적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다룬 책으로, 카이사르 본인이 직접 서술하였다.

정치적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준 카이사르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내전기. 사이. 2005. 09. 07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내전기. 사이. 2005.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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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지방 총독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나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할 것을 권한다. 그가 정복 영웅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권력의 집중이 일어나자 원로원이 견제에 나선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군대를 끌고 그대로 남하한다. 원로원의 결의를 무시하고 남하하며 남긴 말이 바로 '주사위는 던져졌다'였다. 루비콘 강 이남까지 군대를 끌고 가는 것은 원로원과 로마 공화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고, 이는 내전을 의미했다.

당시 카이사르의 라이벌로, 해적 소탕과 히스파니아 전쟁에서 큰 업적을 세운 폼페이우스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은 그리스로 도피하여 전쟁을 준비한다.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폼페이우스 우세 지역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폼페이우스 일파는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점거에 성공하나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잡는 데는 실패한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가 많지 않음을 알면서도 바로 히스파니아(현재의 스페인)에 직접 상륙하여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치는 초강수를 둔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가서 아프라니우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의 장군들과 싸우게 된다. 카이사르는 처음엔 고전을 면치 못한다. 히스파니아의 부족들이 폼페이우스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목공사를 통해 적군을 위기에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폼페이우스의 부장들은 카이사르를 피해 퇴각하려다 실패하고 항복한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리더십이 크게 빛난다.

내전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전쟁이기 때문에 내전의 승리를 위해서는 세력의 관리 및 유지뿐 아니라 민심의 지지가 매우 중요하다. 카이사르는 자비를 베풀고 폼페이우스의 부장들에게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주었다.

부장들은 폼페이우스를 따라 그리스로 떠나고 병사들은 고향이 히스파니아인 사람들은 정착시키고 나머지는 히스파니아를 떠나 이동 후 정착하게 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이고 얼마 안 되어 히스파니아 전역은 카이사르에게 넘어간다.

숫적 우위만 믿고 자만한 폼페이우스

그동안 폼페이우스는 차근차근 군사를 모으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당초 폼페이우스 지지지역이 많았던 데다가 시리아 총독 스키피오를 비롯한 자신의 지지자들이 군대를 모아서 폼페이우스에게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더 장기전으로 가는 것을 막는겸 카이사르는 그리스에 상륙한다. 배가 모자랐기 때문에 한 번에 상륙하지 못하고 2차에 걸쳐서 상륙하게 되는데 나중에 상륙하려 햇던 안토니우스가 남풍을 맞아 북쪽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바로 합류하지 못한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훨씬 숫자가 많았지만 카이사르를 쉽게 꺾진 못했고 결국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가 합류한다. 그러나 이때도 역시 폼페이우스의 군대 수가 많은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계속해서 폼페이우스에게 협상 사절을 보내며 어떻게든 로마의 내전을 끝내고 싶어 하는 모양새를 연출해서 정치적인 쇼맨십을 보였다. 또한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들과 패잔병들에게 관대해서 내전기 동안 시민들의 지지를 모았지만 폼페이우스는 별로 관대하지 않았고 포로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는 편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 전역에서 소수의 군대로 적을 포위하는 본인의 특기를 잘 살려봤으나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한다. 카이사르가 군대를 모아 재정비를 하는 동안, 폼페이우스 군대의 사람들은 자만에 빠져 이후에 최고 제사장 직위를 누가 가질지, 공직 분배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공 행상을 준비하게 된다.

폼페이우스 세력은 전쟁 준비엔 신경을 쓰지 않고 이미 승리했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는 숫자가 우세한 적을 향해 많은 거리를 달려가서 공격한 다음 결국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폼페이우스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주하여 이집트로 가나 거기서 살해당한다. 카이사르 역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가나 이미 폼페이우스는 죽은 후였다. 이리하여 로마는 다시 카이사르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카이사르가 압도적인 세력을 가진 폼페이우스를 꺾고 로마를 통일하는 데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카이사르 본인이 소수의 군대로 다수를 포위하는 전략을 잘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급이 줄어들어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그의 군대가 정예군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빛을 보인 것은 바로 그가 가진 통합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자신을 적대하고 증오한 이들을 격파할 때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단칼에 움직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패배한 적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강하게 저항한 폼페이우스 휘하의 장군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었고, 일반 시민 포로들을 학살하지 않았으며 관대한 사후 처리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리더십은 히스파니아 시민들이 폼페이우스의 장군을 몰아내고 카이사르 지지를 선언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통합의 리더십을 지녔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적에게 보여준 통합의 리더십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


카이사르의 내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사이(2005)


태그:#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로마, #내전기,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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