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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봉에서 바라본 계룡산 전경. 저 멀리 왼쪽 끝 가장 높은 봉우리가 845.1m 천황봉,  그 오른쪽이 829.5m 쌀개봉이고, 오른쪽 끝에서부터 738.7m 연천봉, 756m 문필봉, 816m 관음봉이다. 삼불봉에서 오른쪽으로 2.7km 내려가면 갑사에 닿고, 뒤로 0.3km 가면 유명한 남매탑, 다시 1.4km 내려가면 동학사에 닿는다. 일반적으로 등산하는 길은 동학사에서 남매탑을 거쳐 갑사로 내려오는 길인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4-5시간 걸린다.
 삼불봉에서 바라본 계룡산 전경. 저 멀리 왼쪽 끝 가장 높은 봉우리가 845.1m 천황봉, 그 오른쪽이 829.5m 쌀개봉이고, 오른쪽 끝에서부터 738.7m 연천봉, 756m 문필봉, 816m 관음봉이다. 삼불봉에서 오른쪽으로 2.7km 내려가면 갑사에 닿고, 뒤로 0.3km 가면 유명한 남매탑, 다시 1.4km 내려가면 동학사에 닿는다. 일반적으로 등산하는 길은 동학사에서 남매탑을 거쳐 갑사로 내려오는 길인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4-5시간 걸린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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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는 '역사가 숨 쉬는 사찰'이다. 이는 갑사 스스로 자신의 누리집에 내건 정의이다. 과연 어떤 역사가 깃들어 있기에 갑사는 '역사가 숨 쉬는 사찰'을 자부하는 것일까. 갑사 누리집의 연혁에서 그 대답을 들어본다.

연혁 중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라는 대목이 가장 눈길을 끈다. 1779년(정조 3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存廢, 있고 없음), 소재지, 연혁 따위를 집대성하여 기록한 책이다. 연혁 속 영규대사 부분을 간추려가며 읽어본다.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출가(出家, 승려가 됨)했고,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이 절에서 주석(駐錫, 승려가 사찰에 머묾)하였다. 영규대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청주까지 점령되자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다. 이에 청주 지방의 승려 300명도 영규대사의 승병군에 참여하여 1천여 승군은 홀로 싸웠다. 8월,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되찾았다.

선조실록에 나오는 청주성과 영규대사


1592년 9월 11일자 <선조실록>에는 비변사가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청주를 차지한 지가 이미 넉 달이 넘었습니다. (중략) 중 영규가 의로움을 분발하여 스스로 중들을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는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 명의 중들이 돌진, 군사들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고 선조에게 보고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금산에 있던 고경명 군대가 패전하여 왜적이 다시 창궐했다. 왜적은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했다.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곧바로 금산 외곽에 진영을 갖추었지만, (군사의 수가 얼마 안 되고, 지원군도 없다는 사실을 안) 왜적이 먼저 공격해 와 조헌이 전사했다.

사기가 떨어진 아군은 전의를 잃었다. 의병장 조헌이 죽고 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주위에서는 "물러서는 것이 좋겠다" 하고 간청했다. 하지만 영규대사는 "죽게 되면 죽는 것이거늘 어찌 혼자 살려 하겠는가!" 하고 크게 호통을 친 뒤, 흐트러진 전력을 다시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종일토록 싸웠다. 그러나 결국 영규대사도 전사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적과 싸운 금산 전투에 힘입어 왜적의 호남 침공은 끝내 저지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그 뒤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은 그의 충의를 포상하였고,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표충원과 영규대사비. 빗돌 아래를 지나가는 스님 한 분이 뽀얗게 보인다.
 표충원과 영규대사비. 빗돌 아래를 지나가는 스님 한 분이 뽀얗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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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의 글은, 갑사가 임진왜란 유적지라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증거물로 표충원(表忠院)을 들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자료 5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물은 절에 있으면서도 절집이 아니다. 1738년(영조 14)에 건립된 표충원은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표충원 앞 안내판은 '표충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894년(고종 31) 복원되었다'라고 말한다. 이 말 역시 표충원이 절집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원철폐령은 말 그대로 서원을 부수어버리는 정책이니, 표충원이 절집이라면 그때 훼철될 리가 없다. 서원철폐령 때 일반 사회의 서원이나 사당이 아닌, 사찰 경내 건물이 철폐되었다는 것은 갑사에서 처음 알게 되는 사실(史實, 역사의 사실)이다.

표충원과 영규대사비
 표충원과 영규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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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누리집 연혁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적과 싸운 금산 전투에 힘입어 왜적의 호남 침공은 끝내 저지되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새로운 지식 한 가지를 습득한다. 이 표현 속의 '호남'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품어본 결과 얻게 된 뜻밖의 소득이다.

호남은 호수 남쪽이다. 즉 호남평야는 전라남도의 들판이 아니다. 호남은 전라북도 김제의 벽골제 남쪽 지역을 가리키고, 호남평야 또한 전라북도 김제, 부안, 군산 일원의 들판을 지칭한다. 나주와 광주 주변 들판은 나주평야라 부르는데, 면적이 호남평야의 3분의 1도 채 안 된다.

임진란 왜군들이 차지하려 했던 호남평야는 전북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침탈하려 든 곡창 지대 역시 지금의 전라남도가 아니라 전라북도였다. 1592년 4월 13일 이래 조선 강토를 짓밟기 시작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곧장 진격했고, 다시 전라도로 눈길을 돌린 것은 그보다 뒤였다.

사적비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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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일본군은 전라도의 넓은 곡창 지대를 차지하여 군량미 문제를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과 의병에 밀려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적들은 서울을 차지한 뒤 다시 전라도 진입을 노렸다. 그때 일본군 6군사령관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야카와 다카카게)은 서울에 있던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 안코쿠지 에케이)을 남쪽으로 내려보내 남원부터 점령한 다음 전주로 올라오라고 명령했다. 전주는 호남평야의 중심지이다.

하지만 창원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6군의 별군은 북상하던 중 의령에서 곽재우 군에게 막혔다. 적의 대군은 금산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전주로 진격했다. 6월 22일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혈전 끝에 전사했지만, 권율과 황진이 이끈 조선군은 적들을 대파했다. 이 전투를 이치대첩이라 한다. 그러나 금산성 안의 왜군을 공격하던 의병장 고경명의 군대와, 그 뒤를 이어 재차 공격을 시도한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의 군대는 그곳에서 모두 전몰하고 말았다.

청주성 탈환에 앞장선 영규대사, 끝내 금산에서 전사

<선조실록> 1592년 8월 26일자에 따르면,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영규대사는 의승군을 모집하면서 "우리들이 일어선 것은(吾等之起)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非有朝廷命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若有畏死之心者) 우리 군에 들어오지 말라(勿入吾軍)"고 했다. 그런 각오였기에 영규대사의 의승군은 '적들이 호남 지역과 충청우도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아 그들이 침략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 반대로 국토 회복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는(곽호제 논문 <임진왜란기 청주성 전투의 의병장 연구>)' 청주성 탈환을 이루었고, 마침내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김용태는 논문 <임진왜란 의승군 활동의 역사적 의미>에서 영규대사 승군의 금산 전투 전몰은 '의승군의 충의에 대한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갑사에 표충원이 세워지고, 그 옆에 의승장영규대사기적비(紀蹟碑)가 건립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1973년에 건립된 이 기적비는 역사가 아주 얕다. 그것이 아쉬워서 갑사는 누리집의 연혁을 통해 '승병장 영규대사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영규대사 추모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금산 전투에서 전몰한 스님들, 승병에 대한 신뢰 쌓았다

기적비 앞 작은 안내판에는 '영규대사는 공주군 계룡면 월암리 널티에서 태어나셨다. 성은 박씨요, 호는 기허당이며, 영규는 그의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승병을 일으켜 출전하여 도처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러 크게 이겼으나 아까웁게도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대사의 사적비문을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 엮으신 바 본회에서는 대사의 충절을 길이 전하고자 이에 기적비를 세우는 바이다. 의승장기허당대사사적현창회'라고 적혀 있다.

대웅전이 보이는 풍경. 사진 왼쪽의 건물은 진해당이고, 처마만 보이는 것은 강당인 지장전이다. 오른쪽에 적묵당의 처마 끝이 살짝 보인다.
 대웅전이 보이는 풍경. 사진 왼쪽의 건물은 진해당이고, 처마만 보이는 것은 강당인 지장전이다. 오른쪽에 적묵당의 처마 끝이 살짝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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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원 안 영규대사의 영정 옆에 시 한 수가 걸려 있다. '의승장 영규대사'라는 제목의 시를 읽는 것으로 임진왜란 유적지로서의 갑사 답사를 마친다.

'천지가 유린되는
임진왜란 말발굽에
칡넝쿨 마디마다 의병꽃 피어나고
풀잎도 날 세워 싸움터로 향할 때
장삼을 방패삼아 낫 들고 일어나서
빗발치는 조총알을 몸으로 막으시며
부러진 낫끝으로 청주성을 탈환하신
거룩한 대사님이시여!
여기!
그 날의 함성 모아 님 곁에 묻습니다.'

대웅전 전체와, 오른쪽에 적묵당의 일부가 보이는 풍경
 대웅전 전체와, 오른쪽에 적묵당의 일부가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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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1)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556년(위덕왕 3)에 해명대사가 크게 확장했다. 그 후 859년(신라 헌안왕 3) 의상대사가 중수하여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영하였다. 그 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침입한 왜군들에 의해 사찰이 소실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대웅전 중건을 시작으로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고, 1654년(효종 5) 증축이 크게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갑사는 규모가 크고, 경내가 넓다. 순서를 잘 잡아서 답사하지 않으면 볼 것을 놓치기 쉽다. 흔히들 일주문을 지나 곧장 대웅전을 향해 나아가지만 바람직한 여정이 못 된다. 우왕좌왕을 유발하기에 딱 좋을 뿐이다.

철당간 및 지주
 철당간 및 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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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공원관리사무소가 있다. 여기서 직진하지 말고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아 호젓한,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대웅전으로 가는 큰길이었던 오솔길을 걷는다. 보물 256호인 철당간과 지주가 나타난다.

갑사 대웅전 위치, 임진란 전후 달랐다

철당간(鐵幢竿)과 지주(支柱)는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깃발, 즉 당을 매다는 철깃대(당간)와,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 기둥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운다. 이곳에 철당간과 지주가 있는 것은 이 길이 옛날에는 대웅전으로 가는 큰길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곳의 철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문화재청 누리집)' 것이다. 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이어 놓았는데, 높이는 약 15m이다. 본래는 28개의 철동이었으나 1893년(고종 30)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 처음보다는 낮아졌다.

안내판은 '이 철당간과 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갑사가 신라 의상대사가 일으킨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점과, 받침돌 측면에 새겨진 조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된다'면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갑사의 철당간과 지주는 당간 형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라고 해설한다.

철당간과 지주를 지나 얕은 오르막을 오르면 대적전이 나타난다. 유형문화재 106호인 대적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여 석가모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의 삼신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그러나 정작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셔져 있다. 대적전은 본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니, 건물 명칭과 모셔진 부처들이 일치되지 않는다. 후대에 불상 봉안을 잘못한 모양이다.

대적전
 대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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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전 현판에 '道光六年四月牧岩書(도광6년4월목암서)'라는 작은 글자들이 있다. 도광은 청 의종(1821∼1850)의 연호이다. 이는, 대적전이 1826년(순조 26) 이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금의 대적전 자리는 본래 대웅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법당 왼쪽에는 당시 대웅전의 주춧돌이 제 위치에 일부 남아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기둥 위에서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절 중건 때 한몫한 소를 기려 세운 삼층석탑

이어서 공우탑(功牛塔)을 본다. 갑사를 새로 세울 때 큰 공(功)을 세운 소(牛)를 기려 건립된 3층탑이다. 탑의 몸에 새겨져 있는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연히 합치되었네. 세 번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라'는 명문(銘文, 돌이나 금속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보는 재미가 짭짤하다.

푸른 빛의 鷄龍甲寺(계룡갑사) 네 글자를 현판으로 달고 있는 지장전 건물은 갑사를 찾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이 건물 뒤에 대웅전이 있다.
 푸른 빛의 鷄龍甲寺(계룡갑사) 네 글자를 현판으로 달고 있는 지장전 건물은 갑사를 찾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이 건물 뒤에 대웅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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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에 걸려 있는 '鷄龍甲寺(계룡갑사)' 현판을 본 뒤, 유형문화재 105호인 대웅전으로 간다. 대웅전은 본래 지금의 대적전 부근에 있었는데,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래서 1604년(선조 37) 현재 위치에 지금의 대웅전을 다시 세웠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유형문화재 165호)이 모셔져 있다. 삼세불 뒤에는, 삼세불을 그림으로 표현한 석가여래삼세불도(보물 1651호)가 걸려 있다.

국보, 보물, 유형문화재가 있는 대웅전

대웅전에는 국보도 있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와 노사나불의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삼신불괘불탱(국보 298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국보는 대웅전 불상 뒤편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시대에 성행하던 다포식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외관이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다포식 건물에서는 흔하지 않은 맞배지붕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

드디어 영규대사비와 표충원으로 간다. '역사가 숨 쉬는 사찰'의 핵심을 보러 가는 것이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를 뵈러가는 길이다. 새삼 옷차림을 가다듬고 온몸의 먼지를 턴다.

흰 바탕 위에 鷄龍甲寺(계룡갑사) 네 글자가 푸른색으로 쓰여 있는 색다른 현판이 갑사를 찾은 사람에게는 시비롭게 다가온다. 강당 건물인 사진의 지장전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흰 바탕 위에 鷄龍甲寺(계룡갑사) 네 글자가 푸른색으로 쓰여 있는 색다른 현판이 갑사를 찾은 사람에게는 시비롭게 다가온다. 강당 건물인 사진의 지장전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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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원 안과 영규대사비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한다. 이제 계룡산에 올라 유명한 남매탑을 둘러볼 차례다. 아마 거기에도 누군가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이다. 남매탑을 보기 위해서든, 탑 앞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서든, 아니면 기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서든, 나는 지금부터 가파른 산길을 3km 걸어야 한다. 일단은 남매탑까지 무사히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가다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불상사가 없기를, 그것부터 소망하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려서 유명세를 얻게 된 남매탑. 동학사에서 올라 갑사로 가는 등산로를 걷다 보면 오르막 거의 끝나는 지점에 서 있다. 사진 왼쪽에 (삼불봉 아래를 거쳐) 갑사로 가려는 듯이 보이는 등산객이 혼자 걷고 있다. 탑 사이 야외 마루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집단 등산객들은 아마도 동학사로 내려갈 것이다.
 교과서에 실려서 유명세를 얻게 된 남매탑. 동학사에서 올라 갑사로 가는 등산로를 걷다 보면 오르막 거의 끝나는 지점에 서 있다. 사진 왼쪽에 (삼불봉 아래를 거쳐) 갑사로 가려는 듯이 보이는 등산객이 혼자 걷고 있다. 탑 사이 야외 마루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집단 등산객들은 아마도 동학사로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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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답사 순서

갑사는 일주문→ 철당간 및 지주→ 대적전→ 공우탑→ 종각→ '계룡갑사' 현판→ 대웅전→ 삼성각→ 팔상전→ 표충원→ 영규대사비→ 갑사 사적비→ 부도탑 순서로 답사하는 것이 좋다.

본문에 소개된 철당간과 지주, 대적전, 공우탑, 대웅전 외의 문화재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안내문은 현지 안내판의 것이다.

삼성각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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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삼성각
문화재자료 53호
이곳은 칠성, 산신, 독성(獨聖)의 삼성(三聖)을 모신 곳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맡고 있으며, 독성은 인연의 이피를 홀로 깨닫고 성인이 되어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이다.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신앙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나는데 재물을 담당한다. 각각 도교, 불교, 토속신앙의 한 표현으로,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신앙 요소가 합쳐진 형태이다. 본래 각각의 건물을 지어 삼성을 모시나 갑사 삼성각에서는 한 곳에 모신 것이 특징이다. 

갑사 부도
보물 257호
부도는 승려들의 유골을 안장한 묘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시대인 9세기 초에 처음 나타난다. 팔각형의 지붕을 가진 팔각원당형으로 되어 있는 이 부도는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양식일 뿐만 아니라 조각 솜씨도 뒤어난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부도 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본래 갑사 뒷산의 중사자암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

갑사 팔상전
문화재자료 54호
이곳은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와 신중(神衆)탱화를 모시고 있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을 묘사한 그림으로, 호법신은 대개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다. 건물 규모는 작지만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며 격식을 갖추고 있다.

범종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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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동종
보물 478호
이 종은 1584년(선조 17)에 만든 것이다.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대체로 유지하면서도 소리가 울려 나가는 용통(甬筒)이 없는 등 조선 시대의 특징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용뉴(龍鈕, 종을 매는 고리)에 새겨진 사실적인 용의 모습, 어깨 부분에 붙여 놓은 9개의 유곽(乳廓, 젖꼭지 모양의 장식), 연꽃 형상의 당좌(撞座, 종을 쳐 울리는 부분) 등은 신라 이래 한국 범종의 전통적인 요소이다. 당좌 사이에는 비천상(飛天像) 대신 지장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종의 몸체에 만든 시기를 표시한 명문(銘文)이 있어 우리나라 종의 변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甲士寺(갑사사)'라는 표기가 있어 절의 이름이 지금과 달랐던 것도 알 수 있다.

갑사 사적비
유형문화재 52호
이 비석은 계룡산 갑사의 사적(事蹟)을 적은 비석으로 1659년(현종 1)에 세운 것이다. 비명은 전서체(篆書體)로 公州鷄龍山甲寺事蹟碑銘(공주계룡산갑사사적비명)이라 하였고 비문은 여주목사 이지천이 짓고 공주목사 이기징이 썼는데 문장이 아름답다. 비의 좌우측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승려, 시주자, 석공, 각공(刻工) 및 야장(冶匠)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비는 자연 암반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 위에 세워져 있고,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지붕형의 옥개석에는 별도의 돌로 새긴 보주를 올려놓았다.




태그:#갑사, #영규대사, #임진왜란, #철당간, #남매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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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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