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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TV와 올레TV 모바일에서 'ㅅㅍ'을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성폭행 영화' 분류.
 올레TV와 올레TV 모바일에서 'ㅅㅍ'을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성폭행 영화' 분류.
ⓒ 이승훈, 김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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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IPTV 서비스 올레TV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영화를 검색하던 한 사용자가 우연히 '성폭력 영화'라는 분류를 발견하고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이 이 목록에 포함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카테고리에는 이 외에도 성폭력 문제를 다룬 <피고인>과 같은 작품들도 500여 편 넘게 들어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에 사람들은 이 같은 분류 방식을 취한 올레TV를 비난했다. 하지만 해명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해당 카테고리가 인위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검색어 자동 완성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성폭력', '성폭력 영화'를 검색하는 사용자들이 많았고 그래서 초성만 입력했을 때도 해당 단어가 하나의 분류처럼 등장한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서 성폭력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들을 보기 위해 이 같은 검색어를 사용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도 아니라 '성폭력 영화'라는 검색어가 자동 완성된 것은 어딘가 미심쩍다.

게다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목적으로 해당 검색어를 사용할 정도로 한국 사회가 성폭력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이유는 진실이라고 믿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것 하나뿐이다. 사람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남성들이 성폭력을 콘텐츠로서 즐기기 위해 그런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를 검색해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만연한 '성폭력 소비 문화'

소름끼치는 이야기지만 사실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남성들이 성폭력을 자극적인 콘텐츠 소재로 즐기는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맥심 표지 사태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후에도 납치 성범죄를 연상케 하는 영상 광고가 발표되 지탄을 받은 사례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탄핵 과정을 집단 성폭력에 비유해 사람들의 공분을 부른 만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강간을 소재로 한 포르노가 유통되고, 한 영화의 성폭력 장면이 따로 떼어져 '엑기스'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비밀조차도 아니다. 또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은 어떤가. 이를 유포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심각한 인격적, 성적 폭력이지만 문제가 제기된 시점에서조차 이런 영상들을 웹하드 사이트를 통해 버젓이 공유되고 있다.

나는 이 같은 현실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특정 성별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폭력을 보며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락거리로 소비한다는 것은, 그 성별 집단을 매우 격하된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드워킨의 말을 빌리자면 이 남자들에게 '여성들은 탈인간화된 성적 대상, 물건이나 상품'으로 존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군가의 고통에서 성적인 흥분을 느끼고, 이 사실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블록버스터 영화의 대형 파괴 장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파괴되는 대상에 어떠한 인간성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 소비 문화를 조장하는 남성들은 여성을 딱 그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의 문제

또한 이 문제는 개별 남성들의 일탈적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처럼 폭력적인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화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각 사회 구성원들의 성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행위가 지속 가능한 조건은 무엇일까. 케슬린 베리의 책 <섹슈얼리티의 매춘화>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던진다. 그녀는 이 책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개별적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문제임을 지적한다.

'OO녀'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남성들은 여성을 서로 간에 구분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손쉽게 성별만으로 동질적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반면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횡횡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이 집단으로서 여성이 온전하고 통합된 인격체가 아니라 파편화되고 단지 성적인 몸으로만 환원된다면 여성 전반은 열등한 사람이나 남성의 타자로만 취급되고 만다. 말하자면 남성들이 여성을 비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일을 지속하고, 이를 하나의 문화로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계급으로서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배경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케슬린 베리는 이 같은 양상의 극단적인 사례가 성매매이고, 이것의 존재가 섹슈얼리티 전반에 영향을 미쳐 강제적이고 착취적인 성적 행위가 일상화되었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말한 결과가 이미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걸그룹들은 아이 같고 귀여움과 동시에 관능적이고 성적일 것을 요구 받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소아성애적 콘텐츠들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이 어떠한 공격성과 주체성도 내포하지 않은 고분고분하고 무력한 성적 대상에 대한 욕망이 성폭력 소비 문화와 단절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그것들이 하나의 연속선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재고되고 기각되어야 할 남성성

때문에 나는 이번 사건이 하나의 징후이자 위험 신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위험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남성들은 손쉽게 아무 여성이나 성적 대상화 하며, 동시에 그 대상에 자신이 위계적인 권력을 가지길 원한다. 그래서 그 대상은 오직 성적으로만 치부되며 그만큼 탈인간화되고 도구화가 된다. 많은 사례에서 살펴 보았듯 이는 집단적 지배와 종속의 필요 조건 중 하나다. 여성의 몸이 그런 지위에 있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침해가 가능하고 폭력이 가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때에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요구에 조건 없이 따르게 하거나, 혹은 그러기를 욕망하는 것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 같은 상황은 양태만 다를 뿐 늘상 이어져 온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작년을 기점으로 성보수주의적 관점이 아닌 여성 인권의 시각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이어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남성들로부터 돌아온 것은 되려 뻔뻔한 합리화나 더욱 노골적인 욕망의 전시였다. 그리고 케슬린 베리가 두려워 했듯, 이 같은 경향의 지속은 착취적이고 위계적인 성관계가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완전히 둔갑하는 사태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혹은 이미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적인 남성 섹슈얼리티를 성찰하고, 재고하고, 기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문제의 제기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해야 한다. 바로 남성들이다.


태그:#남성성, #성폭력, #여성주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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