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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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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안팎을 뒤흔든 '사법부 블랙리스트' 논란을 두고 '컴퓨터는 못 봤지만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반쪽짜리 진상조사 결과가 나왔다.

18일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아래 조사위)는 판사들의 연구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혹을 조사한 결과 "법원행정처가 이 연구회 또는 (사법개혁을 다룬) 공동학술대회를 견제하기 위해 압박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법원행정처가 평소에도 이 연구회를 부당하게 견제하거나 소속판사들의 뒷조사를 한 '블랙리스트'를 만든 사실은 없다고 했다(관련 기사 : '사법 독립' 스스로 흔든 대법원... 내부 반발 이어져).

그런데 법원행정처는 연구회 와해 시도에 관여했다고 의심받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과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컴퓨터·이메일 서버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조사위 요청을 거부했다.

고영한 처장(대법관)은 "조사위가 확인하려는 문서 등을 생성‧관리한 사실이 없으며 법원행정처 문서 중 보안유지가 필요한 문서들이 다수"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나 당사자가 임의로 낸 자료들만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블랙리스트 없지만 '찍힌 판사'는 있다?

부실한 자료 확보는 '블랙리스트는 없지만 찍힌 판사들은 있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낳았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출범한 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소모임(아래 인사모)'를 오랫동안 주시해왔고, 이들이 주도하는 법관 인사제도 관련 학술대회를 견제하기 위해 대응에 나섰다고 판단했다.

시작은 2015년 8월이었다. 인사모는 당시 법원행정처가 강력히 추진하던 상고법원(대법관이 직접 심리하지 않는 상고심사건을 맡는 법원) 도입을 두고 찬반토론한 결과 참석자 18명이 반대하고 1명이 찬성했다는 내용을 법원 내부전산망(코트넷)에 게시했다.

인사모는 이외에도 법관인사 등을 연구했고, 법원행정처는 해당 주제들이 진보성향 판사모임 '우리법연구회'와 비슷하다며 이들을 주시했다. 윤리감사관실에서는 인사모 활동이 법관윤리강령 등에 어긋나는지를 검토하기도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15년 국제인권법연구회장에 취임한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2년 임기 내내 "인사모 활동은 오해와 부작용 소지가 있다"며 자제를 요청했다. 학술대회 개최 소식을 접한 뒤에는 2017년 1월 임종헌 차장이 주재한 실장회의에서 두 차례에 걸쳐 ▲ 학술대회 취소 ▲ 내부행사로 축소 ▲ 국제인권법연구회에 조치 등을 담은 대응방안을 보고했다. 조사위는 그가 임 차장과 상의해 전산국장 이름으로 코트넷에 올린 '연구회 중복가입시 강제 탈퇴' 공지 역시 연구회와 학술대회 견제 목적이었다고 봤다.

연구회 소속 A판사는 이 일로 법원을 떠나려고 했다. 그는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으로 발령 난 뒤 이 상임위원을 만나 "행정처는 연구회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조사위에 진술했다. 또 선임판사로부터 "연구회 중복가입 탈퇴조치는 국제인권법연구회가 표적이고, 너는 연구회 때문에 기획조정실에 온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관련 기사 : '판사 길들이기' 당사자, 대법원 해명 정면 반박).

그런데 A판사의 상세한 진술과 달리 조사위는 그의 인사가 연구회 견제 목적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또 이 상임위원이 말한 파일은 학술대회 대책문건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사위는 이 상임위원의 언행이 부적절했지만, 그와 법원행정처가 연구회를 압박하진 않았다고도 판단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예산 지원 등에서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사위는 다만 법원행정처의 연구회 중복가입 탈퇴 조치는 사법행정권 남용이며 학술대회 견제와 A판사 사직의사표시 문제는 법원행정처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구멍 많은 조사 결과... 귀 닫은 대법원

지난해 10월 1일 박근혜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경축연에서 대화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1일 박근혜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경축연에서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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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안팎의 기대와 달리 허점이 많은 진상조사 결과였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법원행정처가 자료 제출을 거부했는데 조사위가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은 경솔하다"며 "이 부분은 확실히 따져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학술대회 대책문건이 공식 회의서 두 차례나 논의됐고, 업무분야가 다른 양형위 상임위원이 연구회 중복가입 탈퇴조치를 진행한 것도 이상하다"며 "적어도 이 위에 법원행정처 차장은 있다, 법원행정처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수도권 지방법원의 부장판사는 이번 일을 두고 "박근혜 정부와 똑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법원장을 비롯한 몇 사람들이 다 정해놓은 논리가 맞다고 거기에 반하면 배척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조사위는 결과적으로 (인사‧예산지원에) 달라진 점이 없어 부당한 개입이 아니라는데, 이규진 상임위원과 법원행정처의 연구회 압박 자체가 잘못이고 부당하다"고 말했다. 또 "대책문건이라는 것 자체가 블랙리스트다, 연구회 간부진, 현재 활동 안 하는 사람이 누군지 등을 왜 쓰는가? 계속 사찰했다는 취지로 보인다"고 말을 덧붙였다.

조사위도 '귀 닫은 대법원'을 우려했다. 이들은 "일부 부정적 측면이 있다해도 사법제도에 관한 법관들의 관심과 논의, 의견 수렴 요구를 외면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이인복 전 대법관 역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코트넷에 남긴 글에서 "법관의 독립은 다른 국가권력이나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법원 내부의 사법행정권으로부터도 보호돼야 한다"며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법원 내부의 통제나 검열이 허용될 수 없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


태그:#대법원, #블랙리스트, #양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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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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