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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년 20, 30대 청년 6명은 시력을 잃었습니다. 파견노동자로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졌던 메탄올이 실명을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노동건강연대'와 <오마이뉴스>는 실명 청년들에게 닥친 비극과 현재의 삶을 기록하고, 누가 이들의 눈을 멀게 했는지 파헤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시력을 잃은 청년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주

시력을 잃고 집을 떠나야 하는 전정훈씨는 어떤 심정일까.
 시력을 잃고 집을 떠나야 하는 전정훈씨는 어떤 심정일까.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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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소리가 울렸다. 전정훈씨는 스마트폰 통화 버튼을 더듬어 눌렀다. 시력을 잃은 정훈씨는 누가 전화했는지 알 수 없다.

"10분 뒤에 집 앞에 도착합니다."

스마트폰에서 들리는 그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정훈씨의 시력을 앗아간 가해자 안아무개씨다. 정훈씨는 가해자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집을 찾아온 가해자를 외면할 정도로 모질지 못하다.

안아무개씨 : "주변 사람들한테 돈을 빌리고 있어요. 제가 '합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문서에 사인해주세요."

사람이 참 무섭다. 정훈씨는 지난해 1월 안씨가 운영하는 삼성·LG전자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렇게 시력을 잃었다. 안씨는 정훈씨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파견 노동자는 직원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 안씨는 피고인이 됐다. 검찰은 그가 불법으로 파견노동자를 받아 공장을 돌리고, 안전에 신경 쓰지 않아 정훈씨와 또 다른 피해자 이진희씨의 시력을 앗아간 범죄를 저질렀다며 법정에 세웠다.

안씨는 정훈씨가 쓰러진 뒤 찾아온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메탄올을 쓰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고농도의 메탄올은 인체의 중추신경계와 시신경을 망가뜨린다. 그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근로감독관이 적극적으로 공장을 살폈다면, 비극은 진희씨를 비껴갔을 것이다.

형사재판이 시작되자, 안씨는 정훈씨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해왔다. 지난달 24일 검찰이 안씨에게 징역 2년 6월을 구형하자, 안씨는 피해자들을 들볶았다. 오는 30일 1심 선고를 앞둔 그는 다짜고짜 정훈씨의 집을 찾았다.

"이진희씨 아버님도 사인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지금껏 법은 피해자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합의서를 써주지 않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정훈씨는 합의서를 써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해자로부터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안씨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기자가 사실 확인을 위해 이진희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씨는 지금까지 어떠한 성의도 보이지 않았어요. 자신은 돈이 없지만 돈 많은 동업자한테 돈을 받아내겠다고 하는데... 선고를 앞두고 어떻게든 감옥살이를 면해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정훈씨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안씨는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정훈씨는 서둘러 짐을 쌌다. 인천 집을 떠나 전북 임실의 할머니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지난달 29일의 일이다. 시력을 잃고 집을 떠나야 하는 그는 어떤 심정일까.

법은 피해자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2015~2016년 삼성·LG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20, 30대 청년 6명은 법을 믿었다.

청년들을 공장에 보내 수수료를 챙긴 파견사업주 대부분은 법정에 서지도 않고 벌금형을 받는 데 그쳤다. 이들을 고농도의 메탄올이 그득한 공장에 밀어 넣고 싼값에 부려먹은 사용사업주들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판사들은 하나같이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다며 선처했다. 마지막 피고인 안씨에게는 단죄가 내려질까.

실명 청년들은 민사재판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도움을 받아 가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메탄올을 사용한 업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대한민국도 피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달 18일 첫 재판(변론기일)이 열렸다. 1차 피해자 이현순·방동근·이진희씨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지 1년 만이다. 피해자들이 암흑 속에서 오랜 시간 기다렸던 첫 재판은 13분 만에 끝났다. 며칠 뒤 현순씨에게 첫 재판 내용을 전했다. 현순씨는 숨을 헐떡였다.

"하... 어처구니없네. 헉, 헉, 헉... "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소리만 내뱉었다. 현순씨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갑작스레 나빠진다. 진정을 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현순씨는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노무사)에게 여러 차례 전화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하며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박혜영 노무사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계속 말했는데, 자책하더라고요. 그날 현순씨가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어요." 그날 재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해자는 정말 반성했을까

법은 피해자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법은 피해자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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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8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562호 법정. "535017, 원고 이현순 외, 피고 누리잡 외." 재판장의 말에 재판이 시작됐다.

원고 쪽 오민애 변호사가 피고들의 책임을 따졌다. 대한민국도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피고 대한민국은 사업장을 지휘 감독하고 점검할 의무가 있지만 이를 다하지 않았고, 특히 원고 이현순과 방동근이 이 사건의 재해를 입은 후에 피고의 사업장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지 않아서, 원고 이진희의 피해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판장은 파견사업주 피고1 이아무개씨의 변호인에게 입장을 물었다.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답변서로 갈음하겠습니다."

변호인의 답변에, 판결문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이씨는 지난해 6월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의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현순·방동근씨를 비롯해 100명을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YN테크에 불법으로 파견한 사실이 인정됐다. 다만, 판사는 그가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면서 선처했다.

이씨는 항소하지 않았고,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후 민사재판에서는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판사는 왜 이씨가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가해자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피고2 문아무개씨의 변호인이 말했다. 이날 재판에서 나온 유일한 사과였다. 문씨는 남편과 함께 YN테크를 운영했다. 불법으로 파견 받은 최저임금 노동자들로 공장을 돌렸다. 문씨 부부가 이윤보다 안전을 더 생각했다면, 현순씨와 동근씨는 시력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문씨 변호인은 읍소 전략을 펼쳤다.

"회사가 망해가지고 (문씨는) 베트남에 내려가서 월급 300만 원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문현주씨 남은 재산인 아파트 한 채를 파니까 1억1000만 원이 나와서, 1000만 원으로 보증금을 얻고 (이현순·방동근씨에게) 5000만 원씩 나눠서 보냈습니다."

피해자들이 법정을 찾았다면, 위로를 받았을까. 문씨 쪽은 재판 이틀 전 재판부에 준비서면을 냈다. 메탄올인지 모르고 썼다고 변명했고, 심지어는 사고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겼다.

"이현순은 생산직 직원의 업무를 도와주곤 했는데, 생산직 직원이 아니다 보니 작업이 미숙하여 메탄올에 노출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현순에게 생산직 직원의 일을 도와주라고 지시하거나 권유한 사실도 없습니다. 순전히 이현순의 자의에 의한 것입니다."

"방동근은 메탄올을 털어내는 작업을 할 때, 눈높이 이상의 위치로 올려서 작업을 했거나, 작업을 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눈을 손으로 비비는 등의 행동을 했거나, 작업 중 에어건을 들고 장난을 쳤거나 하는 등 특별한 행동을 했던 결과, 눈에 이상이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며칠 뒤, 동근씨의 어머니 채정순(51)씨와 재판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좋게 좋게 얘기했는데, 어떻게 그딴 식으로 나온대요?"

피고3~5도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피고3 원아무개씨는 진희씨를 피고4 김아무개씨와 피고5 김아무개씨가 함께 운영한 BK테크에 불법으로 파견했다. 진희씨는 시력을 잃고 뇌를 다쳤다. 이들은 진희씨가 일한 사실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고 있다.

'피고 대한민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지난달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메탄올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첫 재판을 끝낸 후 걸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오민애, 안현지, 전민경, 류하경, 김종보, 이지영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지난달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메탄올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첫 재판을 끝낸 후 걸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오민애, 안현지, 전민경, 류하경, 김종보, 이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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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피고6의 변호인에게 물었다. "대한민국 입장은요?" 피고 대한민국의 변호인이 입을 열었다.

"(고용노동부 부천지청이) 담당하는 사업장 수는 5만4000개인데, 근로감독관 수는 6명입니다. 현실적으로 상시적인 관리감독은 불가능합니다."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입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4대 로펌 법무법인 세종 소속의 변호인은 말을 이었다.

"2차례 현장점검을 나갔는데, 사용자가 근로감독관에게 거짓 진술을 했고, 이 사실을 확인했는데 메틸알코올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관련 의무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인은 이렇게 다섯 문장을 내뱉고는 입을 닫았다. 원고의 변호인 김종보 변호사가 재판장에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확한 입장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재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김종보 변호사는 재판장에게 대한민국이 구체적인 입장을 담은 준비서면을 제출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재판장은 답했다. "그런 명령을 안 해도 내실 것 같은데요." 그 뒤 대한민국은 2주가 지난 1일 현재까지 준비서면을 내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왜 전화를 못할까

1차 재판으로부터 8일 뒤 같은 법정에서 2차 피해자 전정훈·김영신씨의 첫 재판이 열렸다. 이들 역시 파견·사용사업주와 대한민국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재판장이 대한민국의 변호인에게 물었다.

"대한민국은 제출하신 거 없군요?"

대한민국 변호인이 답했다. "네"

"왜 제출안하셨습니까? 구두로 답변하시겠습니까?"

"정리해서 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정훈씨와 영신씨가 소송을 제기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간단한 변명이라도 내놓은 8일 전 재판 때보다 후퇴한 셈이다.

대한민국은 국민 세금으로 정부법무공단이 아닌 국내 4대 로펌에 두 사건의 변호를 맡겼다. 피해자들이 처음부터 대한민국의 사과와 책임 인정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재판 내용을 전해들은 피해자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두 재판에서 대한민국은 고용노동부 중부지방고용노동청과 부청지청을 뜻한다. 두 기관의 산재예방지도과에서 메탄올 중독 실명 사건을 다뤘다. 지난달 26일 기자는 담당 근로감독관에게 법무법인 세종에 변호를 맡긴 이유와 변호사들이 불성실하게 재판에 임하는 이유를 물었다. 

"확인하고 답변 드리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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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훈씨와 이진희씨는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품 업체 BK테크에서 일하다 시력을 잃었다.
 전정훈씨와 이진희씨는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품 업체 BK테크에서 일하다 시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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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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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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