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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부천서'가 들어간 사건 명칭 때문에 경찰의 인권탄압을 쉽게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한민국 검찰의 부조리와도 깊숙이 관련된 사안이었다. 1986년 7월 16일, 검찰은 이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권력의 시녀'인 자신의 한계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정치 편향적인 검찰의 부조리를 스스로 드러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민정당 핵심부, 군부, 경찰, 보수 언론과 더불어 검찰 역시 전두환 정권과 한 배를 탄 집단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듬해 6월항쟁을 계기로 민정당 핵심부와 군부와 경찰은 많이 달라진 데 반해, 보수 언론과 더불어 검찰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다. 군부 개혁이니 경찰 개혁이니 하는 말은 별로 나오지 않는 데 반해, 검찰 개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화두가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건 피해자 권인숙(지금은 여성학 학자)은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학생이란 사실을 숨기고 허명숙이란 명의로 부천시에 있는 가스 배출기 회사에 위장 취업했다. 노동자들의 생존투쟁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1985년 봄이다.

이듬해 1986년 6월 4일 그는 주민등록증 위조 혐의로 문제의 부천경찰서에 연행됐다. 그리고 혐의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정상대로라면 사건은 여기서 끝났어야 한다. 그런데 경찰은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했다. '5·3 인천 사건'과 연결한 것이다. 

5·3 사건은 직선제 개헌투쟁 중에 벌어진 재야·학생들과 야당 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사건이다. 재야·학생들 중 일부는 이 투쟁을 반미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고, 제1야당인 신민당은 이를 제지하려 했다.

4월 29일 신민당 김대중 고문과 이민우 총재는 문익환 목사 등이 대표로 나선 재야·학생들과의 회담에서 "일부 소수 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발언했다. 여기에 격분한 재야·학생들은 5월 3일 신민당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는 인천시민회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때 경찰이 개입해 재야·학생들을 진압하고 319명을 연행했다.

문귀동의 성고문 사실은 빼고 폭언과 폭행만 인정한 인천지검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 걸린 태극기와 검찰 깃발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 걸린 태극기와 검찰 깃발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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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은 그 사건 수배자들의 소재를 권인숙에게서 알아내려 했다. 여의치 않자 문귀동은 6월 6일과 7일 성고문을 자행했다. 이에 맞서 권인숙은 7월 3일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다. 그러자 문귀동도 7월 4일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했다. 7월 16일의 수사결과 발표는 그래서 나왔다.

7월 16일의 기자회견과 보도자료를 통해 인천지검은 문귀동이 폭언·폭행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성고문은 인정하지 않았다. 가슴을 툭툭 치는 정도였다고 축소해서 발표했다. 7월 17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기자회견에 나온 인천지검 특수부장은 "재킷을 벗게 하고 티셔츠를 입은 가슴 부위를 3~4회 쥐어박아 폭행한 사실은 ······ 인정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고문이 일어났을 리 없다는 근거로 다음 사실을 제시했다.

"문제의 장소인 제2조사실과 제5조사실은 두 면의 벽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빤히 들여다보이고, 조사실 뒤편의 무기고 전등 불빛이 조사실 안으로 비치고 있었으며, 바로 옆 조사실에서도 다른 경찰관이 날씨가 더워 문을 열어둔 채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권 양이 있던 조사실 앞을 왔다 갔다 했음이 확인됐다."

밖에서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였으니 성고문이 있었을 리 없다며 문귀동을 옹호한 것이다. 검찰은 그의 행위를 폭행·폭언으로 인정하면서도 기소유예처분(혐의인정+불기소)을 내렸다. 그가 우발적으로 행동했으며 10년 넘게 성실히 근무했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검찰은 사건의 성격을 이상하게 규정했다. '성고문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고 '성고문 조작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수사결과 발표문에 첨부한 '사건의 성격'이란 제목의 보도자료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급진좌경사상에 의한 노동자·학생 연계 투쟁을 전개해왔던 권인숙의 '성적 모욕'이란 허위사실 주장은 운동권 세력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 투쟁의 일환으로서, 폭행 사실을 성 모욕 행위로 날조·왜곡함으로써 자신의 구명과 아울러 일선 수사기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반체제 혁명투쟁을 사회 일반으로 확산시켜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판단됨."

'성을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단순 폭행을 성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게 보도자료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문귀동의 행위를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건을 축소·은폐한 것이다. 2년 뒤 발행된 198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에 이런 말이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은폐 조작에서 검찰은 무슨 역할을 담당했는가?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86년 7월 초 1주일여의 수사 중에 문귀동 경장의 성고문 사실은 물론, 더 나아가 관련 경찰관들이 입을 맞추어 고문 사실을 은폐 조작한 것, 문 경장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구내식당 외상장부를 파기한 것, 동료 경찰관들이 허위진술을 한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성고문 사실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단순 폭행으로 축소하고 '성을 혁명 도구로 활용한 사건'이란 성격 규정까지 내렸던 것이다.

검찰의 부조리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법과 소신에 따라 국민 인권을 지켜야 할 소명을 망각하고, 청와대의 외압에 스스로 양심을 굽히고 말았다. 인천지검은 문귀동을 구속하고 기소하려 했었다. 하지만 검찰 수뇌부가 청와대의 외압에 무너지면서 기소유예로 뒤바뀌고 말았다. 이 상황을 위의 <동아일보> 사설은 이렇게 말한다.

"문제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당시 서동권 검찰총장과 이해구 안기부 차장의 구속기소 의견이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과 경찰의 불기소 주장에 밀려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끝내 '문 경장이 권 양의 가슴을 서너 번 툭툭 쳤다'는 식의 허위 발표에 이른 것으로 언론보도는 그간의 경위를 전하고 있다."

보수언론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강해지게 된 검찰

더 기막힌 일이 있다. 7월 16일 인천지검이 배포한 보도자료는 실은 인천지검이 작성한 게 아니었다. '성을 혁명 도구로 활용한 사건'이란 성격 규정이 담긴 그 보도자료는 실은 안기부와 문화공보부가 써준 것이었다. 2010년 1월 24일자 <한겨레신문>에 이런 말이 있다.

"보도자료는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서동권이 나중에 국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검찰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안기부와 문공부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검찰은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국민탄압에 함께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그런 검찰의 부조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런데 검찰은 이듬해 6월항쟁으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했다. 6월항쟁을 계기로 민정당은 국민들한테 좀 더 고분고분해졌다. 군대는 국민의 충복으로 거듭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경찰도 민중의 지팡이가 되고자 상당히 노력했다. 하지만, 검찰은 노력이 부족했다. 특히 정치적 중립 면에서 그렇다. 그래서 검찰개혁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도록 만들고 있다.  

거기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보수정당·군대·경찰은 1987년 이후 약해진 데 반해 검찰은 보수언론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군대·경찰의 정치적 개입은 줄어든 데 반해, 검찰의 정치적 개입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서동권 검찰총장이 1989년 안기부장이 된 것도 검찰의 위상 강화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이 도리어 강해진 것은, 6월항쟁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 개입이 약해지고 법치주의가 강조된 것과 관련이 있다. 법치주의가 강조되다 보니 법률을 다루는 검찰의 위상이 높아진 면이 있었다.

검찰이 강해진 것은 그간의 민주화투쟁 방향과도 관련이 있다. 종래의 민주화투쟁은 총을 든 권력기관들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집중됐다. 그 결과, 군대와 경찰이 국민 쪽으로 좀더 다가왔다. 하지만 총을 들지 않은 검찰·보수언론을 상대로 한 민주화투쟁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래서 군대와 경찰은 좀더 약해진 반면, 검찰은 보수언론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검찰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두고두고 반성하며 스스로 뼈를 깎는 개혁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구태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데는 그런 원인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태그:#부천서 성고문 사건, #검찰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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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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