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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해 10년 동안 전라도와 경상도를 찾아다녔던 최익수 선생을 기려 세워진 '율강 최익수 선생 사적비'
 최경회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해 10년 동안 전라도와 경상도를 찾아다녔던 최익수 선생을 기려 세워진 '율강 최익수 선생 사적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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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동면 백용리 422 충의사 주차장에 닿으면 가장 먼저 '율정 최익수 선생 사적비'가 답사자를 맞이한다. 사적비에 새겨진 비문은 최익수를 1861년에 <일휴당 실기(日休堂實記)>를 간행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최익수는  그 책을 편찬하기 위해 10년 동안 영·호남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일휴당은 최경회 의병장의 당호(집 이름)이다. 즉, <일휴당 실기>는 최경회 의병장이 직접 쓴 글 및 그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최익수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여 최경회 의병장 관련 자료를 모으고, 또 책으로 편찬했을까? 비문은 그 의문을 풀어주는 데에 대부분의 면을 할애하고 있다. 다음은 최익수 본인이 밝힌 책 편찬 이유이다.

"충신의 고가(古家)는 후손이 미약하여 나라에서 내려준 부조묘 관리가 허술하고, 비문(碑文)이 있으되 아직 빗돌을 세우지 못했으며, 충의공이 곧 촉석루 삼장사(三壯士)의 한 분이요, 서사시(誓死詩)가 엄연 충의공의 작시(作詩)이거늘 이 삼장사와 서사시가 타인의 문집에 들어 있는가 하면, 의암(논개를 가리킴)의 충렬을 충의공과는 무관한 사실로 여기고 다만 명기(名妓)라고 전할 뿐이니 다음날 충의공의 훌륭한 사적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부조묘(不祧廟)는 옮기지(祧) 않아도(不) 되는 묘(廟)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 4대가 넘는 조상의 위패는 더 이상 사당에 모시지 않고 꺼내어서 땅에 묻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의 위(位)패는 옮기지(遷) 않아도(不) 된다고 임금이 허락해 주었다. 부조묘와 불천지위(不遷之位)는 같은 말이다. 최익수는 나라로부터 큰 공신으로 인정을 받아 불천지위까지 허락이 된 최경회 선조의 부조묘 사당을 후손들이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한탄하고 있다.

최경회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최익수

최익수는 신도비 혹은 기념비에 새길 문장이 준비되었는데도 빗돌을 세우지 못하는 것도 한탄하고 있다. 또 최경회 의병장이 '촉석루 삼장사'의 한 분이고, 죽음(死)을 서(誓)약하면서 읊은 '서사시(誓死詩)'의 작가임에도 그 시가 타인의 문집에 실려 있는 현실도 개탄하고 있다. 다른 가문에서 최경회 의병장 대신 자신들의 조상을 삼장사의 한 분이라고 하고, 서사시도 지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먼저 '촉석루 삼장사'와 '서사시'에 서린 역사부터 알아보아야겠다.

최경회 장군 기마상 뒤로 충의사 홍살문이 보인다.
 최경회 장군 기마상 뒤로 충의사 홍살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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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선조 26)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된다. 6월 19일 공격을 개시해온 10만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6000명 아군으로는 불가항력이었다. 특히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싸움 때와는 달리 외부에서 지원해준 군사도 없었다.

1차 싸움 때에는 최경회 본인도 전라 우의병을 이끌고 진주로 달려가 성 밖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10월 1일자 기사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를 포위하였다. 당초에 적이 (경상 우병사) 유숭인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여러 고을을 분탕질한 뒤 진주로 향했다. 이에 김성일이 호남에 구원을 청하자 의병장 최경회와 임계영이 달려왔다"라고 증언한다.

1차 진주성 싸움 때는 많던 원군, 2차 때는 없어

하지만 이듬해의 2차 전투 때는 모두들 진주성을 외면했다. <선조실록> 1593년 7월 10일자에는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에 대해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를 지켜주는 곳인데(實是全羅保障) 순찰사 이하가(巡察以下) 방어를 포기하고 물러나(撤其蔽遮) 산음(경남 산청)으로 옮겨 갔으니(移去山陰) 더욱 우려가 됩니다(尤極悶慮)"라고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충의사 홍살문 뒤로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충의사 홍살문 뒤로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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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군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 7월 16일자 기사에는 '적의 세력을 탐지하려고 와서 성 안에 있던 중국 군사 20여 명이 적의 형세가 매우 강한 것을 보고 바로 성에서 나갔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이후 명군은 진주성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같은 해 <선조수정실록> 6월 1일자는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원군들이 출동한 예가 없다는 사실을 더욱 자세하게 전해준다. 이날 기사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해준다.

"당시 진주에서 급변을 보고하니 이여송이 경성에서 유정·오유충·낙상지 등에게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적의 형세가 막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중략) 적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함성이 땅을 진동하였으며, 포위 속에 있는 진주성은 마치 큰 바다에 뜬 외로운 배와 같았다. 모두들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10만 일본군이 두려워 조선군도 중국군도 도우러 오지 않아

고립무원의 아군은 열흘 이상 치열한 접전을 벌이지만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선조실록> 1593년 7월 16일자 기사를 읽는다.

"6월 20일 오후에 왜적 200여 명이 동쪽의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중략) 22일부터 28일까지 왜적이 사면을 포위하였다. 적군은 대열이 5리(2km)나 되었으며, 나머지 군사를 인근 각 고을의 요해처가 될 만한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곳곳에 가득 매복하여 아군의 사이를 격리시켜 밖에서 성을 돕지 못하도록 하였다.

적은 대나무로 높은 사다리를 많이 만들고 그 사다리에 진흙을 발라 성 안을 압박하고, 그 위에서 포를 쏘아대어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 성 안에서는 탄환을 맞아 죽은 사람이 하루에 100여 명이나 되었다. 병사 황진도 28일 이마에 탄환을 맞고 죽었다. 29일 오후에 왜적의 모든 진이 성 밑으로 가까이 와서 일시에 성을 함락하니, 성 안에서는 혈전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진주 촉석루 성벽 위에서 내려 본 의암(사진 가운데의 사림들이 서 있는 바위)과 남강. 최경회와 논개 부부가 스스로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진주 촉석루 성벽 위에서 내려 본 의암(사진 가운데의 사림들이 서 있는 바위)과 남강. 최경회와 논개 부부가 스스로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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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수 선생 사적비에 새겨져 있는 삼장사(三壯士)와 서사시(誓死詩)를 간략히 풀이하면 "진주성 최후의 순간을 맞아 최경회를 비롯한 세(三) 분의 장(壯)렬한 선비(士)들이 촉석루에 올라 죽음(死)을 맹서(誓)하였는데 이때 최경회가 읊은 시(詩)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서사시의 내력이 새겨져 있는 '촉석루 양상 현판문'에는 시를 읊은 세 분이 김성일·이로·조종도로 되어 있다. 이 현판은 1808년(순조 8) 어사 여동식이 제작했다. 1632년(인조 10) 합천 군수 류진이 통판 조경숙과 진주의 옛일을 이야기하던 중 삼장사 시를 거론하자 조경숙이 편액에 새겨서 촉석루에 걸어두었는데, 뒷날 없어져서 여동식이 다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서사시 작가와 삼충사 세 사람, 문헌마다 다르다는데

1773년(영조 49)에는 김성일, 곽재우, 강희열이 삼장사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 1822년(순조 22)에는 김성일·조종도·이로를 삼장사로 하여 사당을 건립하려다가 홍의장군 후손들이 반대하여 이로 문중과 다툰 일도 있었다.

'삼장사 추모계'는 1960년 진주성 안에 '矗石樓(촉석루)中(중)三壯士(삼장사)記實碑(기실비)'를 세우면서 촉석루 양상 현판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서사시의 작가를 김성일, 삼장사를 김성일·조종도·이로로 새겨놓았다. 그런데 1686년(숙종 12)에 건립된 진주성 내 '촉석 정충단 비' 앞의 안내판에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가 삼장사라고 소개되어 있다. 시간이 흘러도 서사시의 작가와 삼장사가 어떤 세 분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최경회 신도비, 충의사 안내판 바로 왼쪽 뒤에 있다.
 최경회 신도비, 충의사 안내판 바로 왼쪽 뒤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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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호남 일원에서는 김천일·최경회·고종후를 삼장사로 본다. 1799년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호남 절의록>에 따르면 최경회는 김천일·고종후와 함께 성 남쪽 누각에 올라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에 오른 세 장사
一杯笑脂長江水
한 잔 술 들고 웃으며 긴 강 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긴 강의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波不竭兮魂不死
물결은 마르지 않으며 혼 또한 죽지 않으리"

라는 시 한 편을 짓고는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네 번 절 한 후 인절(印節, 병사의 도장)을 든 채 남강으로 뛰어내려 순절하였다.

최경회의 병사 도장, 150여 년 지난 뒤 남강에서 발견

그로부터 150여 년 뒤인 1746년(영조 22) 최경회의 도장이 남강 물가에서 발견되었다. <영조실록> 1747년(영조 23) 1월 26일자 기사를 읽어본다.

"경상 우병영에서 옛날 도장 한 개를 바치면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했다. 바로 임진년 난리 때 병사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물에 던진 것이었다. (중략) 임금이 보고 감탄하며 하교하기를,

"옛 도장을 보니 바로 그 사람이 바치는 듯하다. 도장 위에 새겨진 연월(年月0을 보니 내 마음이 갑절로 숙연해진다."

면서 창열사(彰烈祠)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도장을 넣는 갑을 만들어 소중히 보관하게 한 뒤) 임금이 직접 글을 지어 갑 위에 새기기를,

追憶往事 百有餘年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100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印篆宛然
다행히 남강에서 주운 도장에 새겨진 글자가 뚜렷하구나
矗石閫義烈 想像愴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을 상상하니 그저 슬퍼지네
命留嶺閫 以竪忠焉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하였다."

최경회가 의병을 일으킨 곳, 고사정
 최경회가 의병을 일으킨 곳, 고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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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는 1592년 7월 26일 화순읍 삼천리 11 고사정 터에서 창의했다. 고사정에서 창의했다고 하지 않고 그 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이 정자가 당시에는 없었고 1678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고사정은 최경회의 조카 최홍우(崔弘宇) 관련 유적이다.

최홍우는 임진왜란에도 종군했지만 1624년 이괄의 난 때도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여러 차례 사양하였는데, 1625년에는 인조의 관직 수여도 사양했다. 인조가 최홍우를 '高士'라 칭송하자 사람들은 그를 '고사 선생'이라 불렀고, 마을도 '고사촌'이라 했다. 최홍우의 아들 최후헌(崔後憲)이 정자를 세운 뒤 아버지를 기려 '고사정(高士亭)'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최경회의 형제들, 조카들 모두 의병으로 전쟁 참전

최홍우는 2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숙부 최경회로부터 탈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최경회는 조카 최홍우에게 "나의 조복과 언월도를 집에 전해야 한다. 이것을 보시면 중형(최홍우의 아버지 최경장)께서 반드시 의병을 일으키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과연 최경회의 중형 최경장(崔慶長)은 64세의 고령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옥과, 남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최경장은 뒷날 석주관을 지켰다. 전주에 와 있던 광해군이 고령을 염려하여 군사들을 김덕령에게 인계하도록 조치하니 최경장은 혼자 말을 타고 선조를 호종하러 북으로 갔다.

충의사 사당의 현판
 충의사 사당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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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집안에서는 순절자도 많았다. 최경회 본인이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에서 순절했고, 부인 주논개(朱論介)가 7월 7일 촉석루에서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경회의 백형 최경운(崔慶雲)과 아들 최홍수(崔弘受)는 1597년 10월 7일 화순 오성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최경운의 장남 최홍재(崔洪宰)는 최경회 의병군의 군관으로 여러 전투에 참전했지만 2차 진주성 싸움 때는 모병·모량 임무를 맡은 관계로 성에 있지 않아 화를 면했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도 사간원 정언으로서 초유사(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달래는 관리) 임무를 수행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오성산성에서 전사했을 때 부랴부랴 고향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왜적이 물러간 뒤였다. 그는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다가 울산으로 귀양 가 그곳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최경회 의병군이 군사 훈련을 했던 월강사

최경회 의병군은 전북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562-1 월강사(月岡祠) 일원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 문화재자료 31호인 이곳은 '달이 뜨는 언덕의 사당'이라는 뜻을 지닌 사당 월강사, '충신을 생각한다'는 뜻의 외삼문 회충문(懷忠門), '어진 이를 숭모한다'는 뜻의 재실 모현재(慕賢齋)로 이루어져 있다. 1828년(순조 28)에 처음 창건되었고,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48년에 재건되었다.

최경회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일대에서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사진은 의병청(의병 본부)을 설치했던 곳에 세워진 사당 월강사와 그 아래 재실의 모습이다.
 최경회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일대에서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사진은 의병청(의병 본부)을 설치했던 곳에 세워진 사당 월강사와 그 아래 재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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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의병장 유적 중에는 아주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도 있다. 물가 경치 좋은 지점의 거대한 바위덩어리 위에 정려 비각 셋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 '화순 능주 삼충각(三忠閣)'이 바로 그곳이다. 주소는 화순군 승주면 잠정리 산33-1으로, 기념물 77호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을 읽어본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경회와 문홍헌, 을묘왜변 때 순국한 조현 등 세 분의 충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누각이다.

최경회는 선조 원년(1567)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해 군수를 지냈는데, (어머니) 상을 당해 고향인 전라남도 화순에 내려와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형들과 고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탁월한 용병술과 용장으로 진주 1차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공로가 인정되어 경상 우병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왜군이 다시 공격해오자 이를 막지 못하고 9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문홍헌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
조현은 무과에 급제하고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때 절제사로 있으면서 전라남도 해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들을 막기 위해 싸웠으나 절변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위 3인의 애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11년(1685) 능주 향교의 유림들이 절벽 위에 3동의 건물을 세우고 삼충각이라 하고, 앞에 흐르는 능주천을 충신강이라 부르고 있다."

최경회 등 3인을 기려 세워진 '화순 삼충각'이 강을 따라 이어지는 바위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삼충각 아래 바위에는 이 곳에 1485년(성종 16) 길을 낼 때 시주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비, 각종 선정비 등이 새겨져 있다.
 최경회 등 3인을 기려 세워진 '화순 삼충각'이 강을 따라 이어지는 바위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삼충각 아래 바위에는 이 곳에 1485년(성종 16) 길을 낼 때 시주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비, 각종 선정비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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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려는 왼쪽부터 문홍헌, 조현, 최경회의 것이다. 현지에 도착해 보면 '어째서 이토록 외진 곳에 정려각을 세웠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삼충각 아래 물가 도로는 1485년(성종 16)에 개통된 유서 깊은 길이다. 지금은 강 건너에 새 도로가 있어 차량이 뜸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화순과 장흥·보성을 잇는 주요 통행로였다. 현지 안내판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었고, 이곳에 삼충각을 세워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삼충각 아래 높은 바위에 새겨져 있는 빗돌 중 하나
 삼충각 아래 높은 바위에 새겨져 있는 빗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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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정려 아래 바위 절벽에 새겨진 비들도 꼭 보아야 한다. 당시 길을 닦을 때 시주 한 사람들의 명단을 새긴 비(기념물 162호) 등 13기의 각종 비석들이 눈길을 끈다.

삼충각 아래 높은 바위에 새겨진 13기의 빗돌들

화순읍 다지리 206-2의 '최경회 사당'을 찾아간다. 사당 건물에는 '부조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최경회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순조 35년(1833)에 한천면 금전리에 세워졌으나 그곳이 저수지 공사로 수몰되자 1963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충의공 최경회 장군은 화순 출신이다. 명종 16년(1561) 진사가 되고 선조 원년(1567)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수·무장(고창) 현의 현감과 영해 부사 등을 거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병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고, 그해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창의사 김천일과 함께 9 주야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인조 5년(1627) 좌찬성에 추증(죽은 뒤 벼슬을 높여줌)되었고 인조 11년(1633)에 충의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현재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옆에서 볼 때 'ㅅ'자 모양) 건물이다."

순조 35년= 1833년?


안내판의 순조 35년은 33년의 잘못이다. 순조는 1800년 7월 4일부터 1834년 11월 13일까지 왕위에 있었다. 원년은 임금이 즉위한 해와 그 이듬해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정조 24년인 1800년(순조 즉위년)과 그 이듬해인 1801년은 모두 순조 원년이고, 1802년이 순조 2년이 된다. 즉위한 연도에 2를 보탠 것이 그 임금의 **왕 2년이 되므로 1800년에 33을 보탠 1833년은 순조 33년이 되는 것이다.

최경회 장군이 진사가 된 1561년은 명종 16년이 맞는지 확인해본다. 명종은 1545년부터 156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1545년에 16을 더하면 1561년이 된다. 즉 1561년은 명종 16년이다.

그렇게 보면 좌찬성에 추증된 1627년과 시호가 내려진 1633년을 인조 5년과 11년이라고 한 것도 옳지 않다. 인조가 즉위한 1623년에 5와 11을 각각 더하면 1628년과 1634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1627년과 1633년은 각각 인조 5년과 인조 11년이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과 인조는 왕위에 오른 해만 원년으로 하고 그 이듬해는 재위 2년으로 하기 때문이다. 앞의 임금 연산군과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이 계산에도 적용되었다.
최경회 부조묘 바로 뒤 높은 지점에 '다산 영당'이 있다. 1624년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다산 영당(茶山影堂)은 최경회 가문의 선조인 '해동 공자' 최충을 모신 사당이다. 다만 다지리 180의 다산 영당은 비지정 문화재이다. 1624년(인조 2) 당시 건물이 아닌 까닭이다.

정유재란 때 남편 최서생 의병장이 적과 싸우다 순절하자 그의 부인 문화류씨는 남편의 전사지를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최경회 사당의 오른쪽 뒤편 높은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문화류씨 좌상이다.
 정유재란 때 남편 최서생 의병장이 적과 싸우다 순절하자 그의 부인 문화류씨는 남편의 전사지를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최경회 사당의 오른쪽 뒤편 높은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문화류씨 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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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 오른쪽의 '의병장 해주 최(崔)공 서생(瑞生), 효자 흥덕 현감 최공 기종(起宗) 유적비', '흥덕 현감 최기종 유적비', '해주 최서생 부인 문화 류씨 열행비', '열부 문화 류씨 노비 순동(順童) 공로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답사 대상이다. 2015년에 건립되었으므로 지정 문화재는 아니지만 후손들의 마음이 돋보이는 빗돌들이기 때문이다.



눈길 끄는 류씨 부인 좌상


이곳의 대표 빗돌인 '의병장 해주 최공 서생, 효자 흥덕 현감 최공 기종 유적비'의 내용을 옮겨 적는다. 충의사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율강 최익수 선생 사적비의 내용을 이 글 맨 앞에 소개했던 것과 같은 일을 반복하려는 것이다. 


사실 충의사를 방문한 답사자 중 최익수 선생 사적비에 새겨진 글을 읽은 이는 거의 없을 터이다. 비의 모양도 위치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에서 최익수 사적비의 비문을 정성들여 소개했다.


빗돌의 내용을 곰꼼하게 소개하는 까닭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대표 빗돌인 '의병장 해주 최공 서생, 효자 흥덕 현감 최공 기종 유적비'에 새겨져 있는 내용을 모두 읽고, 지금 옮겨 적는다. 방문했어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또 방문하지 못했으므로 읽을 기회도 가지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좀 더 충실하게 임진왜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한 충심의 발로이다. 빗돌의 명문은 대략 아래와 같다.
 
"최서생 의병장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양반들의 당파 싸움과 관군의 무능으로 국토가 왜적의 침략에 짓밟히자 지역 방위를 위해 창의하였다.


의병장은 전주 지역에 왜적이 침범하자 의병을 이끌고 북진하여 흥덕 사진포(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의병장은 적과 싸우던 중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국난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신 것이다.


부인 문화 류씨는 참의 덕용(德容)의 딸로, 남편이 흥덕에서 전사하자 노비 순동에게 어린 아들의 양육을 부탁한 뒤 남편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으로 사진포 바닷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당시 1595년 생으로 3세였던 아들 최기종은 뒷날 무과에 급제하여 진해 현감으로 발령을 받게 되자 임금에게 흥덕 현감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했다. 임금은 효자라고 칭찬하고 원을 들어주었다. 최기종은 봄과 가을에 흥덕 해변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바닷물이 끓어올라 붉게 물들었다."  


충의사에서 삼충각을 향해 조금 나아가면 화순읍 가기 직전에 '최경회 사당'이 있다. 이 사당 오른쪽 뒤에 최씨 가문의 선조인 '해동 공자' 최충을 기리는 다산영당이 있다. 다산영당 입구 오른쪽에 문화류씨 좌상이 있다.
 충의사에서 삼충각을 향해 조금 나아가면 화순읍 가기 직전에 '최경회 사당'이 있다. 이 사당 오른쪽 뒤에 최씨 가문의 선조인 '해동 공자' 최충을 기리는 다산영당이 있다. 다산영당 입구 오른쪽에 문화류씨 좌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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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최경회 장군 관련 유적인 전남 화순의 충의사, 고사정, 삼충각, 부조묘, 다산영당 옆의 비석군, 전북 장수의 월강사, 경남 진주 의암과 촉석 정충단 비 등을 글과 사진으로 두루 언급했다. 충의사 경내의 논개 사당만 제외하면 최경회 관련 주요 유적을 충실히 소개한 셈이다.


논개 유적은 이곳 충의사의 '의암 영당' 외에 전북 장수군에도 '의암사'와 '생가'가 있다. 논개에 대해서는 그곳까지 모두 방문한 후 별도로 글을 써야겠다. 이는 최경회 장군의 부실(副室, <일휴당 실기>의 표현) 논개 부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그만큼 널리 알려야 할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 


최경회의 생애 - <선조수정실록> 1593년(선조 26) 6월 1일


경남 진주성 내의 '촉석 정충단 비' 앞 안내판은 김천일, 황진, 최경회를 삼장사로 소개하고 있다.
 경남 진주성 내의 '촉석 정충단 비' 앞 안내판은 김천일, 황진, 최경회를 삼장사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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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의 자는 선우(善遇)로 능성(전남 화순)에 살며 문과에 올랐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전란 초 집에서 거상(모친상) 중이던 그는 고경명에 이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전(前) 임실 현감 임계영도 군사를 일으켰다. 최경회는 좌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임계영은 우도의 의병을 거느렸다. 호남이 이미 안정되었으므로 두 장수는 모두 영남을 구원하였다.


최경회는 동서로 적을 초토하느라 1년 넘게 노숙하였으나 뜻이 조금도 태만해지지 않았다. 병사(경상 우병사)에 승진되어서는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최경회는 김천일과 함께 통수(統帥, 총지휘관)가 되어 같이 있으면서 명령을 내렸는데 한 번도 상반되는 적이 없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막사(참모) 문홍헌 등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좌찬성(左賛成)에 추증되었다.





태그:#최경회, #최경운, #최경장, #논개, #최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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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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