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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 거주하는 한인으로,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초청으로 민족대표보고회 참석과 조부(임천택 독립유공자) 묘소 참배 등을 위해 방한하는 '세르히오 림 알롱소.'

당초 부친(임천택의 아들)과 함께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마지막에 방한을 포기해 안타까움을 더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방한이어서 더욱 뜻깊다. 머나먼 쿠바에 한인들은 어떻게 정착하고 또 어떻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을까? 쿠바의 한인 이주는 멕시코 한인 이주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외 한인 이주는 1869년 관서 및 관북지역의 대흉년으로 본격화되었고, 쿠바에 한인이 첫 이주를 한때는 1921년 3월이었다. 1905년 인천 제물포에서 멕시코로 이주하였던 한인 중 일부가 쿠바로 재이주하면서 한인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이주한 낯선 땅 쿠바에서의 삶도 녹록치는 않았다. 그들이 맞이한 것은 더위, 그리고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쿠바 한인사회를 구성하고 독립운동을 해 온 임천택

임천택 선생 1903년 출생하여 3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멕시코행 배를 탔다. 선생의 어머니는 <황성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이민을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를 따라 멕시코에 정착해서 성장하며 15년간 살았던 임천택 선생은 18세 때 쿠바 마탄사스로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자로 살았다. 이곳에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 지역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임천택 선생은 이 무렵 민족종교인 천도교에 입교하여 <개벽>, <신인간> 등을 구독하고 원고를 투고하였으며, 1930년 3월에는 쿠바종리원을 설립하였다. 쿠바 천도교종리원에서 활동한 교직자는 교회활동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민성국어학교와 진성국어학교 등 한글을 통한 민족교육도 적극으로 주도하였다. 1934년 3월 8일 임천택 선생은 천도교 도호(道號)로 덕암(德菴), 부인 김귀희는 당호로 성숙당(誠淑堂)을 각각 수여받았다. 이 무렵 이미 임천택 선생은 쿠바에서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임천택 선생 등 쿠바한인들은 국민회지방회를 통해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60.52원, 1940년 말부터 41년 초까지 78.30원, 그리고 1941년 10월부터 12월까지 858.88원을 모금해 재미국민회와 중경임시정부 김구에게 송금했다. 또한 이 시기 쿠바 한인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한글교육이었다. 쿠바지방회는 1923년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후원하다가 1932년 지방회 직속 기관으로 전환한 후 모든 운영비를 제공했다. 또 선생은 1925년부터 3년 동안 교사로, 1931년부터 5년간은 교장으로 활동했다.

임천택의 마지막 편지. 1961년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면서 미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한국과도 이때 외교관계가 끊겼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임천택은 더 이상 편지를 부쳐올 수 없었다.
▲ 임천택 선생의 편지 임천택의 마지막 편지. 1961년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면서 미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한국과도 이때 외교관계가 끊겼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임천택은 더 이상 편지를 부쳐올 수 없었다.
ⓒ 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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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임천택 선생은 야학강당을 개설하고 한인노동자와 2세를 위한 한글교육을 1942년까지 지속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한인의 장래는 한인에 달려 있다는 취지로 1932년 3월10일 청년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청년학원 원장 겸 교사로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이 청년학원은 2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한국역사강연회를 비롯해 토론회, 동화회, 독서회 등 90여 회의 모임을 갖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또 1938년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가 설립되자 고문으로 추대됐으며 그의 지도 아래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해 1전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임천택 선생의 손자 임세르지오씨 방한

2004년 임천택 선생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 왔고, 조국을 떠난 지 거의 100년이 지나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해방 후 조국과 다시 연결을 시도했던 임천택 선생은 분단과 전쟁, 거리상의 어려움 그리고 1959년의 쿠바혁명 등이 겹치면서 그 끈은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항상 조국을 잊지 말 것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임천택 선생은 1985년 9월 세상을 떠났다.

국가보훈처는 1937년부터 독립자금 모금은 물론 쿠바 거주 한인동포 권익보호에 헌신한 임천택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이후 쿠바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꾸준히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있다.

2011년 8월 14일 멕시코와 쿠바 한인 후손들이 멕시코 남부 유카탄주 메리다에서 광복절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이날 쿠바 한인후손회장 안토니오 김항과 이르마 림 킴을 비롯해 550여 명의 한인들이 참석하였다.

2004년 임천택 선생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 왔고, 조국을 떠난 지 거의 100년이 지나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혔다.
▲ 임천택 선생의 묘 2004년 임천택 선생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 왔고, 조국을 떠난 지 거의 100년이 지나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혔다.
ⓒ 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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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최 민족대표보고회 행사 참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임천택 선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씨는 이번 한국 방문 일정에 11월 3일 서울시 종로구 AW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종로구 부암동 하림각)에서 열리는 민족대표보고회에 참석하고, 5일에는 대전 현충원에 있는 조부(임천택)의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다.

이 행사는 올해 3.1운동 100주년 사업성과를 보고하고 2018년 100주년 기념사업 방향을 제안하면서 성공적인 100주년 기업사업의 실행을 결의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민족대표보고회 행사는 11월 3일 서울시 종로구 AW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종로구 부암동 하림각)에서 열릴 예정이다.
▲ 민족대표보고회 초청장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민족대표보고회 행사는 11월 3일 서울시 종로구 AW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종로구 부암동 하림각)에서 열릴 예정이다.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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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천택 , #임세르지오, #쿠바이민역사, #해외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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