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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 권리인가
 인권은 보편적 권리인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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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 권리인가

인권은 보통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다른 생명체와 다른, 혹은 고유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인간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예의'라든지, 지켜야 할 무언가라든지. 그런 약속을 하고, 그렇게 살아한다.

하지만 진짜로 인권은 보편적 권리였는지 살펴보자면 갑갑한 마음이 먼저 올라올 것이다. 인권은 한번도 '보편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인권의 개념이 생기고, 인간으로서 모두 자유, 평등, 박애를 누릴 자유가 있다고 외쳤던 18세기의 시민혁명에서조차, 그 '시민'은 백인이고, 남성이며, 비장애인이었고, 중산층이었다. 많은 비백인들은 노예로 살았고, 여성들은 그대로 정치참여가 불가능했으며 장애인들은 이후에도 자주 수용시설에 가두고 감금당했다. 또 빈민들은 언제나 삶의 최저선을 보장받지 못해서 죽었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점은 인류는 지금껏 그 보편 인권이라는 꿈을 꾸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당사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인권적 현실에 대해 고발했고, 수많은 연대자들은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고 함께했다. 다양한 인권탄압을 함께하면서도, 다양한 방식과 길을 걸어서 벗어난 것이다. 분명, 우리는 앞으로도 더 '보편적인' 인권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보편인권에서 배제된 사람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 인권은 '보편적인 사람'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권리로만 인식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동은 말을 듣지 않으면 맞으면서 자라도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모든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장애인의 투표권은 쉽게 침해되어도 당연한 것처럼 인식했다.

보편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빌미 삼아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이'는, '여성'은, '장애인'은 '아이'니까, '여성'이니까, '장애인'이니까 차별받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현재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당한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가도 그 사람의 전후 맥락을 듣고 그냥 '그럴 수 있는 일'로 생각해버린 적은 없는가? 경우에 따라 그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도 고민해야 한다. 어떠한 특수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이 폭력이 아닐 수 있을까?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약속은 그렇게 무너져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는 사실, 누군가가 더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순간-가령 죽은 경우라든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정말로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고유한 권리.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배경이나 능력이나 행동 등을 빌미로 사라지는 권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저마다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특성을 공유받지 못한 사람들, 혹은 문화적으로 그 사회의 주도적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보편인권에서 배제당하기 쉽다.

'내 주변엔 그런 사람이 없는데?'

인권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든가, 전혀 몰랐다든가. 자신은 이런 경험을 겪어본 적 없다든가. 그래도 이런 반응은 호의적인 편이다. 어느 순간에는 '그럴 리 없다'든가, 인권 억압적 태도를 보인 사람에 대해 '그럴 사람이 아니다' 혹은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걸'하고 넘겨버리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 안에서는 차별하고 인권탄압을 한 사람도, 그런 억압의 피해자도 없었다고 생각해버린다.

단언컨대, 사실 당신의 주변엔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나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성폭력 상담사 교육을 이수하고, 그 활동을 주변에 알리면서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원래 알고 지냈고, 좋은 관계였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에는 친한 친구들과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일이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폭력을 경험해도 당시에는 폭력이라 인정 못하기도 하고, 차별받고 있음을 힘들게 부정하며 살기도 하며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지나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인권억압적 경험들을 나누었을 때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이를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학교 밖 청소년일 당시에는, 내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면 시선이 바뀌는 게 두려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대학에 오고 나서는 지방 출신이라는 게 놀림거리라는 걸 알고는 그런 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당신이 이러한 차별을 느끼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신이 이런 이슈에 충분히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몸을 숨긴 당사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단 이야기다.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차별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권리다. 그러나 인권에 대해 알고, 어떠한 사람들이 어떠한 인권탄압을 받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 생각하는 인권의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끊임없이 배우고, 듣고 노력해야만 생기는 것일 테다.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그것에 함께 분노하고 위로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인권감수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어딘가 모자라고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외면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어온 사람들이자, 그것이 부당함을 외치는 이들은 그 인권탄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몫을 짊어진 진정한 '시민'일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회가 아닌, 다양한 시민의 사회로

인권이슈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이 가장 쉽게 꺼내는 감정은 '동정'과 '베풂'이다. 사회면 뉴스에서 인권탄압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가장 호의적인 댓글은 항상 '아직도 저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니, 참 불쌍하군요',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라' 같은 말들이다. 혹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아니냐'라든가, '배가 불렀다'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사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여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동정'하고 개인적인 '베풂'을 하는 것은 마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를 생각나게 만든다.

착한 사마리안의 일화는 성경에도 나와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를 묻자 예수가 들려준 예시다.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모든 걸 빼앗기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을 때, 죽어가는 이를 구해준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으로서 그 사회에서 배척받는 이였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운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랑'이었고, 예수는 율법학자에게 그런 사랑을 베푼 사람이 이웃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를 살렸고, 도왔으며 사랑으로 행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보편타당한 인권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시혜'와 '동정' 혹은 '베풂'과 '나눔'의 문제는 아니다. 시민혁명에서 시민들이 '권리'를 획득한 과정이 그러한 과정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인 동기로 사랑을 베풀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이미 빈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극빈곤과 기아가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또 한편으로는 더이상 '제국'과 '식민지'라는 두 종류의 땅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경제적으로 침탈당하는 국가가 있고 그 국가의 부가 계속적으로 빠져나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인류 안에서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 재생산하고, 집안의 노동을 하고, 부업을 했으며 국가가 필요로 할 때 비정규직으로, 시간제 노동으로 공적 영역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해왔으나 항상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고 배제되어왔던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인권과 관련된 이슈들을 볼 때에는 불쌍한 마음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성찰하고, 덜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공감과 분노 그리고 연대의 마음을 채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대중에게 '불쌍한 자신을 도울 것'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실 대중으로 이야기되는 많은 사람들이 묵인해 온 사회 문제에 대해 총대를 메고 외치고, 고발하는 투사에 가깝다. 그들은 대중에게 '자신을 도울 것'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구조적으로 가로챈 무언가가 있다면 돌려줄 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고, 구조적으로 묵인하며 그들을 억압해 온 것을 반성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과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사람이 가진 여러 정체성 중 그런 부분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매일 인권 문제에 대한 사회 각층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가 피곤하고 시끄럽게 느껴지는 날이면, 그것을 외치는 이들이 일생으로 겪어왔을 차별을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알게 해준 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한다. 근대시기와 현대를 구분하는 틀이 '다양화'와 '세계화' 같은 것이라면, 당사자들의 고통에 대해 고발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공통된 차별이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사회의 다양성에 기여하는지 생각해본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 나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불쌍해서 돕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권리로 보장받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로 가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보편인권의 현대적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장받아야 하는 인권은 단순히 의식주가 아니라 더 질 좋은 삶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등이며 낙인으로 인하여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 테다. 그리고 이는 내가 타인에게 보장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권은 나눠 먹는 파이가 아니다. 노예가 사라진다고 시민의 권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타인에게 인신이 종속된 삶을 살면 안 된다는 최저선을 높인 것이다. 빈민에게 최저생계보장을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누군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저생계를 침해당하고 빈곤상태에 놓이지 않아도 된다는 인권의 보장선을 높인 것이다. 이처럼 인권은 타인의 인권이 보장될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보편인권이 보다 '보편'적이게 될 때까지 말이다.


태그:#인권, #권리론, #페미니즘, #당사자주의, #당사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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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활동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운영위원.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의 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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