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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두울... 간다, 셋!"

한참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차 문이 닫혔다. 터진 김밥 옆구리도 아니고 짐칸의 내 짐들이 자꾸만 삐져나와 애를 먹였기 때문.

문득 몇 년 전에 스페인 북부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참 걷던 때가 떠올랐다. 그 길 위에서는 자기 짐의 무게는 곧 자기 삶의 무게라 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가진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눴고 수건 한 장, 양말 한 켤레조차 덜어냈다.

나는 둘째 날에 부피를 차지하는 두툼한 오리털 침낭을 기부함에 넣었다. 놀랍게도 순례길을 완주할 때까지 나는 아주 최소한의 것 이외에는 별다른 게 필요치 않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흘렀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무소유(혹은 덜소유)의 가르침은 내 안에서 점점 잊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30킬로에 육박하는 짐을 짊어지고 지구 반대편까지 온 사달이 난 것이다. 누가 보면 여행이 아니라 피난을 온 줄 알 거다. 우리는 숨을 한번 고르고 차에 올랐다. 다니엘라와 나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구슬땀이 맺혀있었다.

전망대도 다 같은 전망대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남산 타워나 서울 스카이 같이 앉은 자리에서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고 이곳의 산타 루시아 힐처럼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고 키 큰 건물과 눈을 맞출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 산타 루시아 힐(Santa Lucia Hill)에서 바라본 산티아고 시내. 전망대도 다 같은 전망대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남산 타워나 서울 스카이 같이 앉은 자리에서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고 이곳의 산타 루시아 힐처럼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고 키 큰 건물과 눈을 맞출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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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다니엘라의 애칭)의 차가 부드러운 승차감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나를 위해 부모님 차를 가지고 나왔다는 그녀는 에어컨이 먹통이라며 정말 미안해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던 나는 그 이유를 곧 깨달았다. 냉방이 빵빵하게 잘 된 공항에서는 몰랐지만 밖에 나온 지 5분 만에, 나는 칠레에 첫발을 디딘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다.

햇님과 나그네 우화에 나오는 나그네처럼 햇님과의 이른바, '밀당'에서 진 나는 남방을 벗고 반팔티의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붙였다. 수화물로 부치기엔 무거운 무게 때문에 신고 있던 등산화는 거의 나를 고문하는 수준이다.

나름 깔맞춤을 한다고 같이 신고 있던 등산 양말도 내 두발을 불로 지지는 느낌이다. 그런 나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니는 나의 칠레 방문에 한껏 들떠있다. 같이 박자를 맞춰주고 싶었지만 차 안의 나는 그릴에 몸을 뉜 병든 오징어가 따로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저런 말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쏭, 한국 사람들은 칠레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어?"
"음... 칠레가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라는 거? 그리고 요새 칠레산 와인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구... 아! 이쪽에서 물 건너온 냉동 해산물도 마트에서 자주 봤던 것 같아."

뭔가를 더 말해주고 싶었지만 칠레는 정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수화물 규정과 기내 반입 금지 품목이 궁금해 들어간 관세청 블로그에서도 칠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구분 짓고 있었다.

요즘 여행자들 사이에서 남미라는 대륙이 떠오르고 있긴 하지만 칠레는 지리적으로도 여행하기가 불편하고 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아 생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들었다.

실제로 칠레에 두 달간 체류하며 든 경비는 몇 년 전 두 달 넘게 여행했던 스페인에서 쓴 액수를 훨씬 웃돌았다. 보통 남미하면 좀 멀다뿐이지 동남아처럼 싼 맛에 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장담하건대, 절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칠레, 아르헨티나 그리고 브라질의 물가는 우리나라와 비교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거기에 여행객이라 자주 쓰는 바가지까지 생각하면... 어쨌든 결론은 그들은 절대 만만하게 볼 여행지들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게다가 비인기 여행지라서 그런지 국내 포털사이트들에 떠도는 칠레 여행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고 막연하기까지 하다.

'또 뭐가 있더라...'

미간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하는데 다니가 자꾸 또, 또 뭐를 아냐며 나를 채근한다. 얼마간 더 생각을 하다 입을 뗐다.

"있지 다니, 칠레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것만큼이나 실은 우리도 칠레를 잘 몰라. 아마 내가 씩씩하게 이 여행을 마친 다음에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되겠다, 그치?"

그녀는 백미러로 나를 쳐다보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 기어를 바꾸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좋은 생각인데-. 쏭,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한국에 가고 싶어. 윤주와 너는 내가 호주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 최고였는데... 한국에 너희같은 사람들만 있다면 정말 멋진 곳일 것 같아. 아, 그리고 그 다음엔 나도 이곳 사람들에게 싸우스 꼬레아에 대해서 말할게 생기지 않겠어?"

나도 그녀가 전에 하듯 엄지를 척 내밀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윽고 다니의 차는 가로수가 많이 심어진 길을 쭉 따라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다니네 집이 보인다. 남미에서의 내 첫 번째 집.

아주 무더웠던 2017년 12월말,
친구 다니네 동네 프로비덴시아에서.

P.S. 이 여행은 10년 전, 싫어하는 과목 수업시간에 몰래 여행기를 읽곤 하던 교실 뒷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하나인 '1만 시간 동안의 남미'가 뮤즈가 되어 지금 남미 한복판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단순한 여행을 넘어 라티노들의 삶에 같이 녹아나고 싶은 열망에 '정착해서' & '살아보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1만 시간도 부족하다 싶어 2만 시간으로 정했지요.

칠레와 볼리비아를 거쳐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고 있습니다. 남는 시간에 사진을 찍고, 글도 쓰고 종종 자기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생애 가장 자신에게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버킷리스트로 간직해온 곳이 계신 분이면 누구나 이 공간에서 제 여행에 동참하셔도 좋습니다.


태그:#여행, #남미, #칠레, #친구,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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