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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은행권 콜센터 감정노동자들에게서 들었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글 속의 '나'는 감정노동자 중 누군가입니다. [기자 말]
 
한 금융회사의 콜센터(자료사진)
 한 금융회사의 콜센터(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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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출근길에 오른다. 남들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지하철 안은 만원이다. 아마 8할은 나와 같은 직장 동료일 것이다. 정확히는 은행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이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회사까지 출근 행렬이 이어진다. 직장에 가까워지자 애써 정리해본다. 고객과의 통화가 끝나기 전 안내 멘트 순서가 뭐였더라, 오늘부터 진행된다는 이벤트에서 이율은 몇 퍼센트였더라.

그런데 얼마 전 들었던 욕설이 또 들리는 듯하다. 욕과 짜증 섞인 대화를 들으면서 사과만 하다 보면 자연스럽고 친절한 안내가 어렵다. 이럴 때 눈에 보이는 건 상대방의 얼굴이 아니라 모니터에 뜬 매니저의 지적이다.

마치 공장에서 상품이 컨베이어벨트를 따라가다 포장 칸에 들어가듯 출근 행렬은 제각기 자리를 찾아간다.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 모니터 두 대, 그 앞으로 전화기 한 대가 딱 맞는 크기의 책상들을 여러 개 지나 내 자리에 앉는다. 옆자리는 오늘도 비어있지만, 곧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다.

빈자리에서 일하던 동생은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간혹 허리통증을 호소했지만 항상 밝았고 직업에 만족하는 듯했다. 그러나, 결혼 후 아무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결국 그만두었다. 불임의 원인은 정신적 스트레스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콜센터 상담사 중에는 이외에도 만성소화불량, 청각장애, 허리통증 등의 환자가 많다.

어느 직장이든 3개월째에 고비가 온다고 했던가. 콜센터는 처음 한 달이면 누구나 까다로운 고객을 만난다. 거기에 실적 압박까지 받으면 소화불량은 필수다. 그래서 퇴사자와 입사자 수는 대개 일치한다. 어쩌다 퇴사자가 많을 때는 기존 근무자들이 그만큼의 전화를 더 받을 수밖에 없다.

상담사는 을이다

곧 고객들의 전화를 받아야 할 시간. 컴퓨터를 켜 로그인을 해두고 어제 퇴근 후 교육 시간에 전달받은 공지사항을 숙지해둔다. 상담사라고 속 편하게 앉아있다가 전화가 오면 해결해주거나 가입을 유도하다가 거부하면 마는 게 아니다. 이 사회는 서비스도 상품이요, 상담사는 을이다.

실적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데 년이나 분기가 아니라 매일이다. 이유는 당연히 은행의 이익을 위해서다. 오늘의 평가 기준은 전화를 받은 횟수에 따라 등수가 매겨지는 '콜 수'란다. 잠시 후부터 고객들의 전화를 최대한 빨리, 많이 받아야 하니 미리 커피와 위장약을 먹어둔다.

점심시간, 천장에 달린 큰 모니터에서 나의 등수를 보았다.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 게 현명하지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아뿔싸, 고작 화장실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인데 이대로 가다가는 매니저의 호출을 피하기 어렵겠다. 역시, 중간 등수까지는 자리를 비운 시간이 0초다. 출근해서 지금까지 화장실도 가지 않은 것이다.

점심은 교대로 먹어야 한다. 콜센터에 점심시간 1시간은 보장받아야 할 시간이 아니라 더 몰리는 전화를 열심히 받아야 할 시간이다. 콜수도 모자라고 다른 사람도 식사를 해야 하니 오늘도 느긋한 점심은 어렵겠다.

오후, 다시 악성 전화를 받았다. 내용을 들어보니 콜센터는 처리 권한이 없는 업무였다. 고객에게 영업점을 방문해야 한다고 한 뒤 해당 영업점에 전화해 고객이 어떤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지 물었더니 '사람도 모자라 바쁜 영업점에 그런 일로 전화를 했냐, 이곳으로는 전화하지 말라는 지시를 못 받았냐'고 화를 낸다.

그사이 고객은 더 날카로워졌다. 그 찰나 눈을 들어 천장을 보니 보이는 건 여전히 하위인 나의 등수다. 상담사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사내 휴게실이 마련되어있지만 이 정도의 일로 휴게실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다.

드디어 오후 여섯 시. 콜센터 업무가 종료되고 늘 그랬듯 교육을 듣고 드디어 퇴근길 지하철, 핸드폰 뉴스를 보니 고용노동부 콜센터 노동자가 정규직화 대상에서 빠진 건 오분류가 아니라는 결과가 났단다.

오늘도 퇴근 후 집에서는 말을 안 하게 될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해서 풀었겠지만 이런 날이면 더 말수가 적어진다.

태그:#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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