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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49주기 추도식이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됐다.
 전태일 열사 49주기 추도식이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됐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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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분신으로 항거하여 산화한 날이다.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모여 대규모 노동자대회를 열기도 한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얼마 전부터 전태일 열사가 태어나 자란 대구에서는 시민단체가 뜻을 모아 어릴 적에 살았던 집을 구입하여 '대구 전태일 기념관'을 마련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내년이 전태일 분신 50주년이 되는 해이니 이 때를 맞추어 개관하려고 시민모금과 준비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젊은 시절에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아주 감명깊게 읽은 바 있다. 특히 청계천의 공장에서 일할 때 먼 길을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아껴 그 돈으로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서 나누어준 모습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좋은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다 보면 전태일 열사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하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닌 이야기가 나온다. 전태일 열사는 1948년 대구의 남산동에서 태어나 15세 무렵인 1963년에 이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 학교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 나가서 공부를 하던 야학이었던 셈이다.

이 학교는 대구의 명덕초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 다니던 학교가 바로 명덕초등학교였다. 1963년에 입학하여 1969년에 졸업했으니 전태일 열사가 이 학교를 다니던 시기와 겹치는 것이다. 그 당시야 아무 것도 모르고 다녔지만 이후 이 사실을 알고서는 놀랍기도 했다.

그 당시 저녁 무렵에 교실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이 켜져 있고, 불빛 아래의 현관에서 형이나 누나 같은 사람들이 여럿이 서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광경을 본 기억들이 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으니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일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희미한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본 사람들이 바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이 사실을 알고서는 아마도 전태일 열사도 그 학생들 속에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려서 무심코 본 광경이 전태일 열사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하니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후 낮과 밤을 달리 했지만 전태일 열사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한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초등학교 모교를 찾아가 그 현관에 서서 그날의 광경을 떠올리며 전태일 열사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는 감개어린 기분조차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에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와 인연도 있었다. 그 당시 1970년대 후반기는 박정희 유신독재가 노동운동을 지독하게 탄압하면서 청계피복노조도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노동조합 자체를 말살하려는 악독한 탄압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무차별 자행되었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77년 무렵 청계피복노조를 지키려는 투쟁에 동참하게 되었다. 전투경찰과 사복경찰들이 출동하여 노조 사무실을 봉쇄하고 조합원들과 대치를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가세하여 조합원들과 함께 경찰의 침탈에 대응하여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씨가 나서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싸움이 벌어지고 덩치 큰 사복경찰이 저항하는 조합원에게 달려들어 붙잡아 끌고가려 했다. 나는 얼른 다가가 뛰어오르면서 사복경찰의 뒷덜미를 껴안고 잡아당겼고 몸이 같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혼전이 벌어졌다.

그러자 옆에서 경찰들이 저놈 잡아라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나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옆 골목으로 빠져 달아났다. 한참을 멀리 뛰어가서는 숨을 헐떡이며 살펴보니 아무도 쫒아오지 않아 무사히 피신하여 돌아온 적도 있었다. 정말 공권력이 마음대로 노동조합을 탄압하던 야만적인 시절이었다.

​그리고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노동조합을 쟁취한 이후에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기념하는 노동자대회가 해마다 열렸다. 나는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이 대회에 여러 차례 참석했다. 전국에서 모인 많은 노동자들과 대규모 집회를 하면서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노동해방을 향한 다짐을 굳게 했었다.

이 노동자 대회에 참가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고 잊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 수백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울산역에서 중앙선 밤기차를 밤새 타고서는 새벽에 청량리역에 내리곤 하였다. 경찰들이 상경 자체를 막기 위해 방해를 했지만 노동자들이 교묘하게 작전을 짜서 서울로 잘 올라가기도 했다.

집회를 마치고 청량리역에 모여 인원을 점검하고 내려가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특히 경찰에 연행된 노동자를 기다리면서 기차 시간을 놓칠까봐 마음 졸인 적도 있었다. 어쨌든 연례 행사로서 노동자들과 함께 참석하는 전태일 열사정신 계승대회는 노동운동을 더욱 열심히 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울산을 떠나면서 노동운동을 그만 두고서는 이 노동자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11월이 들어서고 날씨가 추워지면 이 대회가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기도 했다. 한때 인생을 바쳐 노동운동하면서 열심히 참가했던 대회였으니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겨우 8살밖에 많지 않고 같은 대구의 가까운 곳에서 살았지만 생전에는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어릴 적에 학교에서 본 그 사람들 중에 열사가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오다가다 스치고 지났을지도 모른다. 열사가 분신으로 노동해방의 불을 밝히는 역사가 되고 나서야 그 인연을 알게 되었고, 또 간접적이나마 인연을 맺게도 되었다. 지금도 비록 노동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 대구에서 전태일 기념관을 준비하는 일이 잘 되어 전태일 열사의 뜻이 좀더 길이 간직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온갖 고생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청옥고등공민학교도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힘들었던 인생에 그런 행복한 기억이라도 간직하고 살아갔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곳인가.

사람이 힘들수록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마음의 고향이 되어 힘을 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태일 열사에게는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자신이 살아가는데 아름다운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가장 행복했던 그 학교를 함께 다녔다고 생각하니 웬지 자랑스럽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태그:#전태일,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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