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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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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 전쟁은 권력의 생태는 물론 지배층 신료들의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명이 조선을 구원하여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모화정신이 깊어지고 지식인들의 존명의식(尊明意識)은 명이 망한 이후에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이어졌다. 중국 대륙은 왕조가 바뀌어 청국이 지배했는데 철늦은 모화사상으로 병자ㆍ정묘호란을 겪게 되었다. 친명파가 명ㆍ청간의 등거리 외교론을 편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역사에서는 '인조반정'이라 기록하지만 '사대역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란 당시 조선 지배층, 특히 선조는 민심이 심하게 이반되었던 상황에서 명군의 존재를 자신의 왕권을 지켜주는 일종의 '울타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 명군을 부르면 군량 등을 대줄 수 없기 때문에 조선군을 동원해야 한다는 유성룡의 주장을 반박하고 "명군이 있어야만 인심이 의지할 수 있고, 불측한 자들이 간사한 음모를 꾀해도 두렵고 꺼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실례로서 전라도의 인심이 사납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서울이 수복되어 일본군이 남하한 뒤에도 귀경할 것을 종용하는 신료들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그 이유로 이른바 '성중지변(城中之變)'의 우려를 제기한 바 있었다. 즉 그는 일본군의 재침만을 염려했던 것이 아니라 사방에 기근이 들고 민심이 이반한 상태에서 내부의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명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는 그것의 발생을 억제할 수 있지만 그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는 내부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주석 1)


1608년 2월 선조가 41년 간의 집권을 마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형 임해군을 유배시켰다가 이듬해 죽이는 등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광해군은 애초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인데다 그나마 맏이가 아닌 둘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선조가 그를 특별히 총애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을 만나 엉겁결에 왕세자가 되었다. 피난 보따리를 싸야 하는 다급한 순간에 선조가 그를 추천했고 몇몇 신하들 역시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석 2)

광해군의 등장은 허균에게는 먹구름이 몰려오는 형국이었다. 마치 뒷날 정조로부터 총애를 받던 다산 정약용이 그의 죽음과 함께 숙종의 등극으로 고난을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허균은 유배지에서 조정과 신료들의 갈수록 심화되는 중화사상과 유림들이 내세운 명분주의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분개하였다. 그 자신 당나라와 명나라 문인들의 글을 좋아하고 몇 시인을 사숙하기도 했지만, 조정과 유생들이 노는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이즈음 스승 손곡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의 독자적인 글쓰기 정신과 울렬한 심경의 일단이 보인다.

저의 고시(古詩)가 예스럽기는 해도, 이는 책상에 앉아 진짜처럼 흉내 낸 것일 뿐이니, 남의 집 아래 집을 얽은 것이라. 어찌 족히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핍진하지는 않아도 절로 저 자신만의 조화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고 송나라 시와 비슷해짐을 염려합니다. 도리어 남들이 '허자(許子)의 시(詩)'라고 말하게 하고 싶답니다. 너무 외람된 것일까요? (주석 3) 

세상이 온통 존명의식과 모화사상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우리 역사ㆍ문화ㆍ예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주체의식이 남달랐던 그의 글이다.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임진란 이후의 사첩(史牒)을 모두 조사해보니, 명나라 장수들의 용병한 사실과 우리나라 장사들의 공을 세운 내용 및 왜적이 내침한 사실을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 기재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보면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관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겠는가. 

그 후에 주상께서 명하여 명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한 곡절을 모아서 「동정록(東征錄)」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으므로 윤월정과 신현웅이 찬집당상(纂輯堂上)을 맡고, 내가 낭청(郎廳)을 맡아 찬수해서 올렸다. 현재 실록청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실었으나 우리 나라의 사직(事迹)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가지도 간책(簡冊)에 실린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주석 4)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도와준 기록은 많은데 우리의 사적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개탄이다. 하여 「동정록」을 편찬해 실록(왕조실록)에 싣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와 같은 역사의식은 마침내 반상, 적서차별이 없고 민초(민중)의 웅지가 담긴 픽션으로 그려진다. 

참고로 뒷날 알려진 임진왜란 관련 실기는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조정의 『임진왜란일기』, 오희문의 『미록』, 유진의 『임진녹』, 정영방의 『임진조변사적』 등이 전한다. 


주석
1>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76쪽, 역사비평, 1999.
2> 한명기, 『광해군』, 6쪽, 역사비평사, 2001.
3> 「진보 교산 허균」, 앞의 책, 260쪽.
4> 「성옹지소록중(惺翁識小錄中)」, 이문규, 『허균문학의 실상과 전망』, 40쪽, 새문사, 200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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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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