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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엄숙함의 시대가 열렸다.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엄숙함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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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이성이 맞부딪힌 1970년대의 마지막 해 1979년이 열렸다.

유신정권은 총선의 1.1% 패배보다 대선의 득표율 99.9%에 맹신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3.1절을 두려워했다. 기미년 이래 이날은 민족과 민중이 역사현장에 떠오르고 근래에는 민주가 추가되었다. 1976년의 '민주구국선언', 1977년의 '민주구국헌장' 발표, 1978년의 '3.1민주선언'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3.1절을 앞두고 정부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비롯 재야인사 60여 명을 강제로 자택 연금시켰다. 명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3.1절 기념미사를 방해하고자 전국적으로 신부들을 연행ㆍ감금시킨 것이다. 신현봉ㆍ최기식ㆍ안승길 신부는 각각 속초ㆍ강릉ㆍ삼척으로, 송기인 신부는 밀양으로 납치하고, 이 외에도 여러 신부들이 불법으로 연금을 당했다. 

민족 저항의 날에 민중이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데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이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출입을 통제하는 역설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재야인사들은 이날 민주주의국민연합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 발전시키면서 윤보선ㆍ함석헌ㆍ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했다. 

사제단은 이에 앞서 1월 8일 40여 명이 부산 명상의 집에서 세미나를 갖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는 정신'을 주제로 캐나다 출신 쟉 레클러 신부의 강연을 들었다. 이어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하여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 그의 석방을 촉구했다. 2월 2일에는 신구교 합동으로 기독교회관에서 3.1사건 관련자 중 재수감된 문익환 목사 등을 위한 기도회를 준비했으나 당국이 민주인사들을 자택에 연금시킴으로써 무산되었다.

사제단은 2일 같은 장소에서 기도회를 강행하고 함세웅 신부의 '강론'을 들었다. 그는 〈다같이 감옥으로의 행진〉이라는 주제의 강론에서 독재정권의 고등수법인 선택적 구속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가 다 함께 감옥으로 가는 길을 자청하여 감옥이 우리들의 주거지가 되도록 하자"고 불의의 시대에 정의의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어 "우리는 어둠과 허위가 마침내 굴복하고야 만다는 믿음과 빛과 진실에 대한 염원과 그 쟁취를 위한 우리들의 신념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다"라고 덧붙였다. 

사제단은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민주ㆍ민족ㆍ민생의 민중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서를 주보에 실어 신자들에게 배포했다. 당국은 이 선언문이 게재된 주보를 압수하고 여신도들의 핸드백까지 뒤져 탈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성명서〉의 주요 부분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안식일(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율법)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법이나 제도는 오로지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선포하셨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양심, 인간의 기본 권리를 무시하고 유린하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니라 법을 빙자한 권력의 횡포요 폭력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우상화를 강요하는 이른바 유신체제와 그로 비롯된 긴급조치 등 모든 비인간적, 비양심적인 법과 제도의 철폐를 거듭 요구한다. 또한 그러한 폭력적인 것에 거슬러 정의와 양심의 목소리를 높였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 등 모든 양심범의 즉각,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면서 민중의 권익과 창의가 보장되는 민주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한다.

2.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강생한 신비이므로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민족의 존엄은 오직 세계와 인류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방향으로서만 지켜지고 발양(發揚)될 수 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문제는 권력의 특수 이익을 위해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화해와 통일의 그리스도 복음에 입각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하느님 사업의 일환임과 세계의 정의로운 평화의 중요한 바탕임을 직시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곧 민족의 복음임을 선포한다.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진실과 정의를 증언함에 있어 먼저 우리 교회 스스로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를 것을 다짐하면서 3.1운동의 기본 정신인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의 정신이 복음정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느님 정의의 가장 위대한 결정적 메시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모범을 따라 이에 민주, 민족, 민생의 민중복음을 선포하고 또 실천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주석 1)

독재자가 3.1절에 이어 또 하나 겁내는 날이 4.19의 날이다. 이날을 앞두고 경찰은 신부ㆍ목사ㆍ민주인사 등 260여 명을 자택에 연금하거나 연행하였다. 19년 전 이승만의 자유당이 저질렀던 패악이 부활한 것이다.

"우리들의 집 앞에는 4~10명의 기관원들이 24시간 우리들을 지키고 있으며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 전화는 도청되고 행동은 제약되고 있다. 우리에겐 '행동과 말의 자유'가 없다. 우리들의 집, 그것은 창살없는 감옥이다."

사제단이 4월 19일 발표한 〈우리는 지금 갇혀 있다〉라는 성명의 한 대목이다. 

어떤 권력이기에 독재를 타도하는 날에도 의로운 사람들을 창살 없는 감옥에 묶어두는가, 사제단의 성명에서 해답의 일단을 찾게 된다.

"4ㆍ19의 정신은 폭력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지하에서부터 더욱 굳건한 생명력을 키우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진실은 억압당할 지 몰라도 결코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석
1> <암흑속의 횃불(3)>, 382~383쪽, 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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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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