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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군인과 소방관들이 1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파괴된 건물을 수색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인과 소방관들이 1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파괴된 건물을 수색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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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전쟁 초기만 해도 '러시아가 실수한 거다' '곧 쓰라린 패배를 안고 퇴각할 것이다' 등 희망 섞인 전망도 있었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러시아는 공세를 더욱 강화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려는 서구 국가들에 핵전쟁의 위협도 서슴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 폭격으로 무너지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듯, 모든 전쟁은 잔인하다. 군인보다 무고한 민간인이 더 많이 죽고 다친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최소 수천 명 무고한 사람들이 이번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언론에는 이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끔직한 사진과 동영상들로 넘쳐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희생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벌어진 건 사실이다. 더구나 그 이유라는 것도 우크라이나가 민주화와 친서방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데, 따지고 보면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과 정부의 당연한 권리 아닌가? 도대체 러시아가 이를 무력으로 막을 권리가 있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민주화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고 러시아는 이를 탄압할 어떤 명분도 권리도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 특히 NATO(나토) 가입 문제는 국제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고 위험한 문제다. 러시아가 이에 반발하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평화 유지의 두 가지 방법론

근대 국제정치의 역사를 보면 국가들간 평화 유지의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초강대국 또는 제국의 헤게모니, 다른 하나는 강대국간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다.

냉전시기 세계가 큰 전쟁 없이 그나마 평화가 유지됐던 것은 미국과 소련의 각 진영 내에서의 강력한 헤게모니, 그리고 미국과 소련간 절묘한 세력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현상을 타파하려 공격적 행동에 나서면 필연적으로 전쟁이 벌어진다.

지난 두 차례 세계대전을 비롯,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번 전쟁도 유럽에서 강대국간 세력균형이 무너진 것이 구조적 원인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부분 서구의 공세적 나토의 팽창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미국과 서구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아래 지도를 보자.
 
ⓒ CNN 보도 갈무리
 
위 지도 상 옅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국가들이 냉전시대 나토 동맹국들이다. 짙은 노란색으로 표시된 국가들은 구소련 위성국가들로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동맹국들이었다.

양 진영간 세력균형이 냉전체제의 기본질서였다. 이 세력균형에 결정적 균열이 간 사건이 1990년 독일 통일이다. 모두가 이후의 사태를 우려하는 상황에서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만나, 독일이 통일되더라도 나토의 경계선은 "동쪽으로 1인치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약했다.

물론 이후 벌어진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폴란드를 비롯 동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서구로 편입되고 나토 동맹국이 됐다. 소련을 이어받은 러시아는 내부 정치불안으로 이를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서쪽 국경선 대부분이 NATO 진영에 포위되는 초유의 국가안보 위기상황을 맞게 됐다.

우크라이나는 그런 러시아에게 말하자면 최후의 보루다. 우크라이나마저 나토에 편입되면 마치 19세기 러시아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는 서구에 완전히 포위돼 유럽-중동으로의 모든 진출로가 막히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가 본격적으로 친서방의 길을 걷게 되면서 러시아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 내정에 개입 친러 정권을 세우고 때로 무력을 앞세워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2020년 친서방 민주화세력을 등에 업은 젤렌스키 정권이 본격적으로 유럽연합(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하자 마침내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공산권 붕괴 이후 미국과 서구의 팽창주의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지난 2월 25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나토 영상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지난 2월 25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나토 영상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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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사태가 이 지경으로 커진 것은 공산권 붕괴 이후 미국과 서구의 공격적 팽창주의가 주요한 이유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충분히 예견됐고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노엄 촘스키, 조지 케난을 비롯 국제정치의 여러 석학들이 미국과 서구의 자제를 요구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민주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중립노선으로 외교를 전환해야 한다고 주문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서구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는 위험한 친서방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세계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서구 역시 당장은 물론이고 앞으로 동유럽에서 심각한 외교 안보의 곤경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무리하게 전쟁에 뛰어든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해야 했다는 말인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구화,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숭고한 노력을 이런 힘의 논리로 폄훼하는 것이 정당한가? 무엇보다 힘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시민들, 그들의 터전을 파괴하는 러시아의 야만적 행위에 세계가 힘을 합쳐 맞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조언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 힘의 맹신, 국익을 내팽개친 포퓰리스트 외교정책은 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파멸을 면하기 어렵다.

서구와 우크라이나의 무모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라. 러시아는 이번 전쟁에서 절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협상을 벌이면서 전쟁 종식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두 가지다. 하나가 우크라이나 친서방 정권의 교체, 다른 하나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와 중립국화다.

서구의 직접 군사지원이 없다면 우크라이나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는 후퇴하고 우크라이나는 영토를 일부 빼앗기고 러시아의 실질적 영향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서구와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이 좀 더 신중했더라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물론 타협의 조그만 대가를 지불해야 했겠지만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의 대가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윤석열 당선인에 시사하는 것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통화를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통화를 하고 있다.
ⓒ 국민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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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반도 안보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격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한국 외교의 사활적 과제다. 일단 한미동맹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에게 절대적 요구다. 그러나 지나친 공세적 태도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자제해야 한다.

사드 사태가 어떤 결과를 불러 왔는지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가 중국에 굴복해야 하나, 차라리 사드를 더 들여오자고 하는 것은 정치와 선거에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국가 안보를 백척간두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말이다.

외교 경험이 전무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는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했던 실수를 똑같이 해서는 안된다. 외교와 안보는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문제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정말 우리에게 교훈이 되면 좋겠다. 

태그:#우크라이나, #N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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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전)울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서울대학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대학원 졸업(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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