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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말랭이(봉우리의 방언)에 책방을 연 지 두 달째다. 산 마을에 동네책방이 열렸다는 소문은 지역 소식지와 SNS로 퍼져나갔다. 특히 지난 춘삼월과 사월의 월명산은 벚꽃으로 장관을 이루어서 지역주민 뿐만아니라 외지 방문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 명소다. 그 덕분에 책방 <봄날의 산책> 역시 그들의 봄나들이 산책길에 있었다.

책방은 영리사업체이기에 한 달 한 달 마감하면서 몇 권의 책이 팔리고 이익은 얼마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일하는 책방지기 문우들에게 책방의 운영 결과를 매달 보고해야 책임을 다한 듯,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이 일을 해야 맘이 편하다.

책방지기들은 판매한 책값이 정확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만 사실 난 이익 금액에 별 관심이 없다. 한 권 팔리면 2000-3000원 남고 그것도 이런저런 이벤트로 사용하기에 특별히 기대할 만한 이윤은 없다.

그보다는 나의 눈길은 언제나 사람에게 쏠린다. 어떤 손님이 와서 어떤 책을 사고, 방명록에 쓰인 그들의 인사에 더 마음이 가고 애정이 생긴다.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특별한 인연으로 이루어졌으리란 믿음도 한몫한다. 책방에 온 사람 정도라면 설사 책값을 덜 받았으면 어떤가. 가지고 싶은 책 한 권 그냥 가져가도 절대 탓하지 않으련다.
 
새벽에 눈이 떠져 책방의 책들을 보다 <이어령의 마지막수업>을 다시 읽었다.
▲ 책방에 새벽향기를 전한 <이어령의 마지막수업> 새벽에 눈이 떠져 책방의 책들을 보다 <이어령의 마지막수업>을 다시 읽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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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4월을 마감하면서 그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주종인 시와 에세이 말고도 더러 내가 좋아하는 인문학 작가들의 책을 준비한다. 그중 올 2월에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이 세상 세람들과 마지막 인터뷰를 모은 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지음)이 있었다.

철학자, 대학교수, 문화부장관, 언론인, 문학비평가 등 수많은 이름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을 창조적으로 보여준 철학자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말의 소리를 책방에 울리고 싶었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이라는 거대한 동굴을 들려다보고 그 벽에 삶이라는 빛의 열매를 드리우는 능력은 선생이 가진 특별한 힘이다. - 19p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 식은 땀이 밤 이슬처럼 온몸에서 반짝인다.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산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 오늘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 23p
 
자신의 죽음을 앞에 놓은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모습은 자신의 삶이 선물이었길, 축복이었길 바란다. 죽음이란 탄생 이전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선생의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독자들에게 삶과 죽음의 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겨준다.
 
글쓰는 사람은 매번 패배한다네.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네. 나는 평생 도전이 필요한 인간이었네. 계속 쓰고 또 쓰고 다시 썼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다시 하는 거라네 - 29p
 
선생이 말하는 '패배'나 '도전'이란 말은 선생의 글쓰는 삶이 모든 영역에서 백전백승한 줄 알았던 독자에게는 의문을 갖게 했다. 동시에 한 공간에 같이 얼굴 부비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평범한 현자의 모습을 보게 했다.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써. 글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영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 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거지. - 30p
 
나의 이익을 찾는 사람 에고이스트를 남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 에고이스트로 명명하면서 선생은 글쓰는 이의 진정한 책무가 무엇인지를 철장을 나온 호랑이 같은 포효로 전해주었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 40p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생각이 아니야. 상기하는 거지. 이미 알던 것을 깨워서 흔드는 거지. 책이라는 건 그렇게 흔들어주는 역할을 해. 머리를 진동시키는 거지. 그런데 오히려 머리를 굳히는 책들이 있어. 굳은 머리에 아예 콘크리트를 들이붓는 거지. - 164p

 
 
선생은 20대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을 비판한 <우상의 파괴>로 문학계에 등장한 이래 끊임없이 새로운 질서를 위해 기존의 사고를 파괴하는 창조자였다. 수많은 명예이름표가 있어도 끊임없이 새 물을 길어올리기 위해 우물을 파는 자로 살았다.
 
발톱 깎다가 눈물 한방울 너 거기 있었구나, 멍든 새끼발가락. -67p

"요즘엔 아프니까 밤낮 몸무게를 재거든. 시간에도 무게가 있어. 매일 가벼워지거든... 디지털 저울은 액정에 숫자 나오면 끝이지만 옛날 체중계는 동그랗게 얼굴이 달려 있었어." 이왕 몸을 달 거면 얼굴 있는 체중계에 올라가고 싶다고 했다. 거울처럼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겠다고. 신이 그에게서 목숨 같은 언어를 가져가고 오직 한 방울의 눈물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일까? - 68p
 
선생의 눈물 한 방울 속에 담겨진 새끼발가락, 가벼워지는 체중, 날아온 작은 참새 한 마리 등은 삶과 죽음이 투쟁하는 원형경기장을 푸른 풀밭으로 바꿔 놓았다. 언제든지 위대한 철학자 교수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인간은 누구나 그 근원에 작고 보잘 것 없는 벌거벗은 모습의 시원(始原)이 있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최고의 가치임을 말해주었다.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 154p

허공에 날아든 단도처럼, '존재했어?'라는 스승의 말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167p

나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하는가를 규정하는 기준치로 '나의 이야기(스토리텔링)'를 말해준 선생의 가르침이 가슴을 떨리게 했다. 특히 글을 쓰고 싶어 안달하는 내게 고유한 나의 존재(실존)를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함을 자성하는 시간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라고 말한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는 매일, 바로 오늘, 바로 이 순간이 탄생과 죽음의 신비를 느끼는 기쁨의 향연임을 알게 한다. 새벽을 깨치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요란스런 책방도 눈을 뜨며 선생의 마지막 말에 귀 기울인다.

"이번 만남이 아마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예요"라며 말했던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본 듯 마음에 슬픔과 위로의 물결이 들고 난다. 품위 있게 빗어 넘긴 백발, 여전히 호기심의 우물이 잘랑대는 검은 눈동자, 터틀넥과 모직 슈트가 잘 어울리는 기개 넘치는 이 시대의 어른 이어령 선생. 고이 잠드소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은이), 이어령, 열림원(2021)


태그:#이어령의마지막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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