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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제일 잘 나온 사진"이라고 말하는?정 대표
▲ 서산 수석동사진관장 정용신 "내 평생 제일 잘 나온 사진"이라고 말하는?정 대표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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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지역 문화복지에 쓰임이 된다면 사진이든 항공촬영이든 언제나 달려가 도와주는 43살 정용신씨. 그의 모토는 '남는 건 사진뿐'이란 말이다. 그는 자신을 '사진쟁이'라고 말했다. 코로나로 인해 일하던 대형마트에서 빠져나와 수석동 작은 동네에 '수석동사진관'을 연 정용신씨. 다들 무모하다고 말렸다. 하지만 그에겐 자신감이 있었고, 결국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운영하는 사진관은 그저 사진을 찍고, 뽑고, 포토샵 해주고, 액자를 파는 보편적인 '사진관'이 아니다. 방문자들의 추억을 찾아드리고 인생을 기록해주는 곳이다. 너무 많은 분이 찾아주는 덕분에 이제는 100% 카톡 예약만 받는다.

이곳이 입소문을 탄 것은 또 다른 배려 때문이었다. 오픈하면서 밤늦게 하교하는 학생들과 퇴근하는 동네 주민들이 마음 편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24시간 간판불 켜두기'. 이유는 여자 중고등학교 앞 마을임에도, 가로등 불빛이 약해서 해가 지면 으스스한 동네로 변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와 지난 15일 만났다.

"찾으시는 고객님마다 '전기세 많이 안 나와요?'라며 '동네가 환해져서 너무 좋다.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하시는데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뿌듯해요. 모두가 아껴주는 이 간판불, 영원할 수 있겠죠? '500년쯤 뒤에도 존재할 수석동사진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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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석동사진관 서산본점 내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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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경영 최고의 가치는 '샘플'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

"샘플을 보고 사람들이 다시 찾아온다는 거죠. 제가 9~10살쯤 엄마를 따라 화장품 가게를 들렀는데 사장님이 '이게 좋아야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 가겠지?'라며 샘플을 한 움큼 주셨어요. 당시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제가 사진관을 경영하는 최고의 가치가 됐죠.

좋은 상품들이 입고되면 저도 항상 단골손님들께 연필, 볼펜, 향수, 핫팩 등등 재미있는 선물들을 드리곤 해요. 물론 아주 약간 문제가 있는 상품들을 드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상처 있는 액자라든가, 조금이라도 잘못 나온 사진은 바로 폐기했어요."  
- 어린시절 재밌는 얘기가 있다면 더 들려달라.

"재밌는 얘기는 아니에요. 뒤돌아보면 가슴 아픈 얘긴데 처음 꺼내네요. 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게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난 교통사고에요. 머리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어요. 참고로 인지능력은 정상입니다(웃음).

사고 당시, 피부가 터지지 않았으면 뇌출혈로 죽었을지도 모를 목숨이었죠. 흉터와 맞바꾼 목숨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어요. 매일 죽음을 꿈꾸며 살았죠. '빵 셔틀'이라고 아시죠? 지금의 제 덩치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요. 어린 시절엔 몸이 약하다 보니 철없는 아이들이 그걸 놀리거나 괴롭히는 일이 많았어요.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괴롭힘을 당하는 게 두려워서 일부러 아픈 척 조퇴를 한 적도 많았어요. 그러다 한 1년 정도? 친구들 몰래 헬스클럽 다녔죠. 새벽에도 가고 학교 끝나고도 가고. 시간만 있으면 무조건 갔어요. 정말 열심히 운동했나 봐요. 한 개도 간신히 했던 턱걸이를 20개는 기본으로 할 정도로 튼튼해졌죠. 물론, 그 이후엔 상상하시는 대로에요. 아무도 절 괴롭히지 못했죠."   

- 현지인 수준으로 일본어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서산시 지곡면에 있는 서일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게 됐어요. 1학년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아봤는데 세상에나 일본어만 바닥을 쳤더라고요. 곧장 시내 서점으로 달려가 일본어 소사전을 샀어요. 2~3학년 선배들에게 교과서와 자습서를 구하고요. 겨울방학 내내 달달 외워버렸어요.

결과는요? 전교 1등이었어요. 그해 겨울엔 충남 도내 외국어 경시대회에 나가서 2등까지 했지 뭐예요. 1등은 일본에서 전학 온 친구였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무튼 일본어 글자를 하나도 모르던 제가 지금은 현지인 수준으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예요. 앞으로는 일본에서의 사업도 꿈꾸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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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진로/직업체험프로그램을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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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직업이 있는데 사진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뭘까?

"서울에서 내려와 집 근처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죠. 동갑인 친구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걸 보고 너무 멋있어 보여 당시 월급 전액인 150만 원으로 'DSLR카메라'를 샀어요. 친구와 함께 쉬는 날이면 전국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죠. 아쉽게도 그 당시의 사진들은 몇 해 전, 집이 화재로 전소되는 바람에 다 사라져 버렸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멋진 풍경도 보러 다니고 직장 동료의 모습들도 촬영하며 지내다가 어느날 생일을 맞은 동생에게 우연히, 아주 우연히 뒷배경에 멋진 조명이 켜져 있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각도로 그 친구를 찍은 사진을 현상하여 액자로 선물해 줬어요. 동생이 '형,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 이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선물이야'하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그래! 누군가가 기뻐할 만한 일을 하자!' 그게 계기가 되어 26살 나이에 신구대학 사진영상미디어과에 입학했어요. 부모님께는 회사가 파업 중이라서 서울 친구네 놀러 갔다 오겠다 말씀드리고요. 입학식 날에야 전화를 드렸더니 '너 또 얼마 못하고 그만둘 거 아니니? 빨리 내려와라'하셨는데, 그게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제 천직을 찾았어요 부모님~'"

- 살아가면서 가장 인상 깊은 한마디가 있다면?

"'핑계 대지 마라! 의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 말은 사진계의 거목이자 포토그램'(인화지 위에 물체 혹은 사람을 놓고 빛을 줘서 인화하는 방식의 사진)의 거장 최광호 담당교수님 말씀이세요. 이분을 만난 건 제 인생 최고의 터닝포인트였죠.

아니, 그분의 인생 자체가 제게 오롯이 들어온 순간들 모두가요. 오죽하면 사진과 다른 교수님들께서 제게 '리틀 최광호'란 별명까지 붙여주셨겠어요. 정말 교수님의 '솔직한 사진'에 미쳐 있었어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교수님께서 내준 첫 과제물이 '필름 1롤 촬영 후, A4 정도 되는 종이에 밀착인화(인화지 위에 필름을 놓고 빛을 줘서 필름사진 크기 그대로 인화하는 방법)를 해서 제출하는 것'이었거든요.

하필 그때가 학교 암실이 공사 중이라 개인 작업실이 있는 학생들 외에는 아무도 과제를 해 가지 못했어요. 그때 교수님께서 강의실 암막커튼을 모두 치고 불을 끄게 하시더니 휴대폰에 있는 불을 켜면서 '자, 여기가 암실이고, 이게 라이트다. 핑계 대지 말고 안되면 되게 방법을 찾아볼 생각을 해야지'라는 거에요.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래도 된다고? 저게 된다고?' 그 사건 이후로 저는 학교도 가지 않고 밤낮으로 촬영과 슈퍼에서 얻어온 검정비닐과 빈 박스로 빛을 막아 자취방 화장실을 암실로 만들어 휴대폰 불빛을 이용하여 사진 인화에 푹 빠져버렸죠. 그때부터 제 인생이 또 한 번 바뀌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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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르신들 장수사진 촬영(태안군 안면노인복지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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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사진복원전문가가 됐나. 사진을 접하면서 잊지 못할 일이 있다면.

"졸업 후 '대한뉴스'란 일간·주간지 신문사에 박봉을 받고 취업을 했어요. 당시 외교통상부와 국회를 드나들며 여러 유명하신 분들 사진촬영도 했었죠. 하지만 제가 꿈꾸어왔던 곳이 아니더라고요.

2008년 대형마트 사진관에 실장으로 취업했죠. 몇 달 후 운영권을 인수 받아 '사장님' 소리도 듣고요. 학교에서 배운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르더라구요. 웃으면 웃는다고 혼나고, 얼굴에 점은 왜 뺐냐고 혼나고, 또 왜 안 뺐냐고 혼나고. 정신없이 그렇게 15여 년의 세월을 보냈어요. 20대 때에 들어가서 40대에 나오고 나니 어느새 '사진복원전문가'가 되어있더라고요(웃음).

잊지 못할 일은 일본여행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당시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친구와 2박 3일 일본으로 넘어갔었어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어딜 가든 사진관을 눈여겨보게 되더라고요. 어느 사진관에서 둘의 사진을 찍고 인화했는데 글쎄 사진을 바라보던 그 친구가 '형, 인화기 성능이 별로거나 사진 화질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요'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답했죠. '넌 화질이 보이니? 난 우리의 추억이 먼저 보이는데?' 사진을 전공한 사람으로서의 고집이랄까요? 화질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사진 속 주인공과의 추억이더라고요.

일본여행 후 제 가게 앞에 이런 안내문을 만들어서 크게 붙여놨었어요. '카톡사진인화전문! 남는 건 사진입니다!'"
 
-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두꺼운 양장앨범만큼이나 수많은 일이 있었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낡고 찢어진 아버지의 흑백사진을 가져오신 어르신과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오신 분 등 무수해요. 손주 사진을 이쁘게 뽑고 싶다고 하셔서 앨범으로 만들어드렸던 기억도 있고요. 운산 어느 농부는 '달래 사진 좀 이쁘게 찍고 싶다'고 하셔서 사진값으로 달래를 받은 적도 있어요(웃음).

그중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은, 80세쯤 되시는 어르신이 영정사진을 찍고 싶다며 방문하셨던 일이에요. 그때 다른 안쪽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나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었어요. 새 생명을 축하하는 의미의 순간과 한쪽에선 생명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순간! 사진사란 직업은 여러 삶의 순간들을 직시하고, 공감하고, 함께하는 직업이랄까요. 뭔가 무거운 직업이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참 또 하나 생각하네요. 어떤 손님이 카카오톡으로 '원본 사진은 잃어버렸는데 이걸 깔끔하게 해줄 수 있냐'는 문자가 왔어요. 문제의 사진은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고 빛도 반사되어 있었으며 각도도 틀어져 있었죠.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사진이었어요.

처음엔 저도 원본이 없으면 어렵다 말씀드렸는데 어떡하든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제 나름대로 궁리를 했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원본이 없어도 되더라고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요. 그 일을 계기로 사진복원 전문가가 됐어요.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어느 순간부터 사진관 사장님들께서도 의뢰를 해주시고요. 얼마 전엔 인터넷 스마트스토어도 오픈해서 조금씩 주문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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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석동사진관 천안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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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올해 8월부터는 천안에서도 같은 분위기의 사진관을 오픈하기 위해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곳의 이름 또한 '수석동사진관'이에요. 최신형 드론으로 항공촬영서비스도 계획 중이고요, 훼손된 옛날 사진복원과 합리적인 가격, 유행을 따르지 않는 수수한 가족사진 촬영을 서비스할 예정이에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가 아닌 천안의 가장 한적하고 따듯한 동네, 동남구 원성2동에 자리 잡았어요. 인심 좋은 동네 분들 덕분에 주차공간도 넉넉해서 찾기 편한 사진관일 거예요. 어떻게 보면 서산본점보다 더 수석동사진관'스러운' 곳인데 저는 그곳 분들께도 돈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갈 거에요.

수석동사진관 서산본점, 천안점,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LA지점, 런던지점, 두바이지점…. 그렇게 한 500년쯤 지난 후에도 지속될 사진관을 만들어나가는 게 제 꿈이에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본 '미야코지마'라고 하는 남쪽 바다 작은 섬을 여행하던 중 발견한 바닷가 주변의 멋진 기암괴석의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많은 돌은 누가 옮겨놨을까?'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새파란 바닷물, 기암괴석들…. 바로 '바람'과 '파도'가 그런 거죠. 잔잔한 바람과 파도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멋진 풍경은 볼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처음부터 스튜디오에서 시작했더라면, 하기 쉽고 돈이 되는 일만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해봐요. 남들처럼 장가 가서 아이들도 있겠죠?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겠죠? 그런데 글쎄요, 저 같은 사람도 세상에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겠지만, 저는 사진이 좋아서 시작했어요. 사진으로 행복을 주고, 또한 눈물을 훔치게 해주는 천상 '사진쟁이'요.

요단강을 여러 번 건널 기회를 놓치고 이렇게 현실에 존재하는 저로서는,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고 또 행복해요."

인터뷰를 마친 그가 어네스트 허밍웨이의 '지금 당신이 무얼 못 가졌는가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당신이 가진 것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라는 인용문을 말했다.

그는 "내일은 또 어떤 사람이 이 문을 열고 들어올지 기대됩니다. 내일은 또 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드릴지 기대됩니다"라며 "캄보디아의 어느 시골 흙길을 거닐던 아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제 삶을 윤택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말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수석동사진관서산점, #정용신대표, #남는건사진뿐, #사진복원전문가, #수석동사진관천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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