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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유희춘의 무덤 옆에 있는 첩 남원방씨의 무덤
▲ 미암 유희춘의 첩인 남원방씨의 무덤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유희춘의 무덤 옆에 있는 첩 남원방씨의 무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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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묘가 있는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가면 유희춘 부부의 묘 오른쪽 아래에 첩 남원방씨의 묘가 있다. 정부인의 묘가 아닌 첩의 묘가 함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데 유희춘의 사위인 윤관중의 묘 아래에도 그의 첩의 묘로 보이는 무덤이 있어 당시 양반시대부들의 첩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윤관중의 무덤 옆에 첩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 유희춘의 사위 윤관중의 무덤  윤관중의 무덤 옆에 첩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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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은 양인 이하의 여성을 첩으로 취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는 신분사회의 계급의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직을 떠돌게 되는 남자의 관직 생활과 같은 거주 형태로 인해 첩이 필요해진 때문이기도 하였다. 부인과 별거하는 동안 자신들의 수발을 담당할 여성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유배생활 뒷받침한 남원방씨

미암 유희춘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7년 동안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유배 생활에는 첩이 있었다. 미암은 종성 유배시절에 15세 연하의 남원방씨를 얻어 그녀와의 사이에 4명(해성, 해복, 해명, 해귀)의 딸을 두게 된다.
<미암일기>를 보면 사위인 윤관중을 비롯 누이 조카인 오언상도 첩을 얻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보면 16세기 조선 사회에 첩을 얻는 일이 일반화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암의 유배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첩이 수발을 들며 생활의 불편함을 던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암이 유배에서 해배되자 첩은 해남에 내려와 살게 된다. 관직에 복귀한 미암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 송덕봉은 주로 담양에 있었고 첩은 미암의 고향인 해남에 머물러 살게 된다.

첩을 알뜰히 챙긴 유희춘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첩에 대한 대우와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첩은 신분적 관계 속에서 하대만 받고 살았을까? 미암 유희춘의 첩을 대하는 태도는 적어도 본부인 송덕봉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암과 여류 문인이기도 하였던 부인 송덕봉의 관계는 당시 사회를 통해 보면 아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못지않게 첩을 대하는 것 역시 매우 친밀하고 적극적으로 보살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첩의 딸들 역시 서울에 있는 유희춘과 편지를 주고받고 방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암일기>를 보면 서울에 있는 미암은 해남으로 가는 인편이나 서신을 통해 끊임없이 첩의 안부를 묻거나 농산물 등의 선물을 보낸다.

"1569년 6월 초7일
병사 이대신이 쌀과 콩을 해남누님 집과 첩의 집에 보내고 아울러 윤서, 이유수, 오언상을 초대 했으며, 또 벼 넉섬을 첩의 집에 보내주었다.

1570년 7월 12일
해남 누님댁의 계집종 주면이 내려가므로 나는 여러 곳에 편지를 쓰고 대구를 누님과 첩의 집에 보냈다."


미암은 첩이 낳은 딸을 양인으로 속량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서녀의 딸을 대하고 챙기는 모습이 부인에게서 나온 딸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73년 12월 초11일
신 한 켤레와 수영에 보낼 서장을 해남 누이에게 보냈다. 두 서녀의 신발 두켤레와 해명의 혼수 명주배 한 필을 해남의 첩의 집에 보내는데 김진도(진도군수)의 행차에 부쳤다.

1576년 3월 21일
해명과 해귀의 종량從良을 장예원에 청하는 단자와 보성의 사출문기斜出文記와 함께 부관으로 보냈다."


유희춘은 가토加土나 일가들을 만나기 위해 해남에 내려와 있는 동안 본가에 오면 첩과 딸들이 함께 와서 생활하였으며, 유희춘은 첩의 생계 대책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인다.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는가 하면 노비를 지급하여 돕기도 하였으며, 첩은 유희춘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상당한 부를 집적하고 인근 지방관의 도움을 받아 서문밖에 20칸에 이르는 집을 짓기도 하였다.

"1576년 1월 27일
노奴 내은동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첩이 말하기를 24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했다고 하며 좋아서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1576년 3월 10일
첩의 언문 편지가 왔는데 거기에 "영암의 와공이 비록 갈두에 와서 기와를 굽는다고 해도 길이 멀고 형편이 궁색해서 하기가 어렵겠기에 돌려보냈습니다. 그보다는 관와官瓦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어서 만들면 굽기가 어렵지 않을 듯하니 청컨대 선전 윤관중에게 편지를 해주시어 성주에게 전달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애첩을 사랑한 윤관중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유희춘의 묘지 입구에 있는 신도비
▲ 유희춘 신도비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유희춘의 묘지 입구에 있는 신도비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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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의 사위인 윤관중 역시 첩을 얻어 가정을 소홀히 하고 미암의 속을 썩였다. 윤관중은 파직을 당하여 미암 유희춘을 실망시키고 또 첩을 얻어 미암과도 갈등을 일으킨다. 미암은 윤관중에게 "첩이 몸에 유익하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사위가 장마 비를 무릅쓰고 첩을 찾아 먼 길을 떠나자 "몹시 안타깝다. 한스럽다"고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윤관중은 첩을 가까이 한 나머지 학문을 게을리 하다 집안의 참판 윤의중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받기도 하였다.

"1570년 12월 21일
관중이 첩의 사랑에 빠지고 사냥에 버릇이 들어 심지가 거칠어지고 약해져서 글 읽고 짓는 것에 뜻이 없던 차에 지난번 참판 윤의중 공이 와서 집안의 모든 사촌 아우에게 필묵을 나누어 주면서 관중에게만 주지 아니하며 "음탕하고 사냥이나 하는 놈에게 붓, 먹이 필요 없겠지" 라고 하는 바람에 관중이 드디어 분을 내고 절에 올라가 독서에 전심하고 가사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며 사냥하던 일을 콧물이나 침같이 여기고 애첩과 이별하기를 떨어진 짚신 버리듯 했다고 한다.
 

1573년 7월 17일
윤관중의 행색을 생각하면 몹시 안타깝다. 본시 그 부친 해빈이 편지로 중추에 내려오라고 명했으며 나도 이런 장마속에 가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누누이 말렸는데도 관중이 첩을 그리워하여 초조하고 열광하며 며칠 동안을 참지 못하고 막힌 물을 무릅쓰고 가니 한스럽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이 첩을 두는 것이 용인되었으나 부인이나 같이 살던 장인, 장모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희춘의 형제는 2남 3녀였으나 유희춘이 해배되었을 당시에는 오천령에게 출가하여 해남에서 사는 누이와 한사눌에게 출가하여 남원에 사는 누이만이 생존해 있었다.

그런데 누이의 조카 오언상 역시 첩을 얻는다. 그것도 2명의 첩을 얻고도 남의 노비 말대를 간음하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미암의 누이는 이를 해결하기 의해 소송을 해서 얻은 계집종 4명으로 갚아줄 수밖에 없었다.

"1573년 6월 19일
해남에서 집안사람의 편지가 왔는데 오언상이 이미 두명의 첩을 두고도 또 남의 집 노비 말대와 간음을 하여 누이가 소송을 해서 얻은 계집종 4명으로 갚아줬다고 하며 거기에 미치고 빠져 그가 슬퍼하고 원망을 한다고 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서열, 도덕, 명분을 중요시하게 되자 처첩의 구별이 생기고 적서 차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처첩의 구별이 엄격해지며 첩의 자식인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정당화되었다.

미암의 첩에 대한 인식은 그래도 관대하였다고 보여지나 조선 사회가 종법질서에 의해 점점 남성 위주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태그:#첩, #유희춘, #양반사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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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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