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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차를 타고 동네를 지나가는데 상가에 걸려 있는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24시간 배달 도전.'

막 오픈을 앞둔 가게의 선전포고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도전은 안 했으면 좋겠어. 정말" 내가 한숨을 푹 쉬자, 남편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현수막을 발견한 남편은 "어휴, 힘드시겠네. 다 사정이 있겠지" 한다.
 
'24시간 배달 도전.' 막 오픈을 앞둔 가게의 선전포고였다
 '24시간 배달 도전.' 막 오픈을 앞둔 가게의 선전포고였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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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과 총알배송, 로켓배송 등등은 들어봤어도 24시간 배달은 생소했다. 내가 지방에 살아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있었나 싶어 부랴부랴 검색에 들어갔다. 코로나의 영향일까? 생각보다 많은 가게에서 '24시간 배달'에 '도전' 하고 있었다.

'24시간 배달'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글도 제법 보였다. 그 밑엔 말리고 싶다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려 있었지만. 19시간 일하다 쓰러져 폐업했다는 댓글도 보였다. 배달앱이 생겼을 때가 생각났다. 아니, 누가 이런 걸 이용한단 말인가 코웃음 쳤는데 순식간에 퍼져 놀랐다.

처음 몇 달은 소상공인에게 수수료를 떼가려는 고약한 술수라는 생각에 일부러 식당에 전화로 주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며 배달앱은 일상이 되었다. 어쩌다 식당에 전화를 걸면 되려 배달앱을 사용하란 안내를 받을 때도 있어 당황스러웠다.
 
배달의 민족 앱 화면.
 배달의 민족 앱 화면.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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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배송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기저귀나 분유처럼 당장 급하게 필요한 물건을 받아볼 땐 고맙기도 하지만, 항상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나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는 잠을 포기한다는 생각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플랫폼을 이용하지 않으면 되는데, 요즘엔 그렇지 않은 플랫폼을 찾기도 쉽지 않다. 

빠른 배송과 관련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작업 환경 속에서 일하는지, 얼마 전 쿠팡 물류센터 화재를 통해 보았지만 불매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굳이 빨리 받지 않아도 되는 물건은 되도록 동네에서 구매하려 노력하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스스로도 답답하다. 

세상은 계속해서 더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이렇게 편리하게 만들었으니, 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더 많이 쓰고 누리라고 말한다. 무엇이 다른 이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다. 만들어진 틀 안에서 사는 것, 주어는 것을 누리는 것, 편리함과 수월성이 이렇게 무섭다.

다 같이 '최중' 하면 어때요?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2021년 4월 25일(현지시간) 오스카상 시상식이 끝난 뒤 주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관에서 특파원단과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 오스카상 수상 소감 말하는 윤여정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2021년 4월 25일(현지시간) 오스카상 시상식이 끝난 뒤 주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관에서 특파원단과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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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주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1등', '최고' 막 그런 거 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우리 다 '최중' 되면 안 돼요? 그냥 같이, 같이 살면..."

'최고가 아닌 최중이 되자'는 그녀의 말은 한동안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퇴사 전 친구에게 했던 넋두리가 떠올랐다.

"다 같이 열심히 안 하면 안 되나? 다 같이 적당히 하면 되잖아. 얼마나 잘 살겠다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계속되는 야근으로 몸과 마음이 다 고장 난 상태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뱉었던 말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열심히 산다'는 말이 무서웠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열심히 뭔가를 할 수는 있지만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았다.

퇴사 후 1년간 유럽을 여행하며 여러 유럽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나의 회사생활은 놀라움과 논란 거리였다. 하루 12시간 근무는 기본이고, 어떤 사람들은 일하다가 과로로 죽기도 한다는 내 이야기에 그들은 토끼눈을 뜨고 몇 번이나 진짜냐고 물었다. 

프랑스인인 한 친구는 자신은 주 4일 근무를 한다며, 한국 정부에서는 왜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는 회사들을 가만히 놔두는 것인지 의아해했다(주 52시간 근무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다짐

새해가 되면 다들 이런저런 결심들을 한다. 나도 올해 이루고 싶은 몇 가지 소망을 송년모임에서 나누기도 했다. 아이가 크면서 '경단녀(경력단절여성)'로서의 삶을 끝내고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시점이어서 그런지 생각이 많다.

그래도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쳇바퀴 위를 성실히 달리며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른 채 내가 돈을 쓰는 건지, 돈이 나를 쓰는 건지 몰랐던 그런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돌아보면 회사 다니면서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불필요한 소비를 많이 했던가. 지금은 그보다 필요 없는 것을 훨씬 적게 산다. 앞으로도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 

쳇바퀴에서 내려와야지만 쳇바퀴에서 열심히 달리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리게 흐르는 것과 천천히 움직이는 것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지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이런 당장에는 쓸데없는 것들을 마음껏 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끊임없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외쳤던 '바틀비'처럼 나에게도 열심히 살지 않는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더 가지고 소비하기 위해 애쓰지 않겠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당연한 존재방식이라 여기는 숨 가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또 모르지 않는가. 이런 나의 선택으로 누군가는 숨통이 트일지도(굳이 이런 나의 시도를 '자발적 가난'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부유했던 적이 없으니 '자발적'이라 말하는 것도 웃기다).

언제까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당장 내일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내몰릴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최대한 이런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물론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다는 선언이다.

얼마 전에 지나가다 보니, 현수막이 걸렸던 자리에 디저트 가게가 생겼다. 가게에 들러 뭐라도 하나 사야겠다. 24시간 배달에 도전하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으나, 부디 장사가 잘돼서 '24시간 배달' 도전은 없던 일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새해, #윤여정, #바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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