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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봄을 세우는 주인이다'라는 말을 군산 말랭이 마을에서 실감한다. 작년에 이어 두 해째 말랭이 마을 입주 작가로 거주하게 되었다. 아마 올해도 작년만큼이나 바쁜 일상이 예상되어 감기 기운에도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몸도 마음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마을어른들의 문해교육을 위한 사전 만남
▲ 동네글방워크숍 마을어른들의 문해교육을 위한 사전 만남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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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마을 입주 후 나의 기억에 남을 만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산 말랭이에 책방을 오픈한 것과 또 하나는 독립출판사를 등록해서 책 몇 권을 출판한 것이다. 세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본업(학원운영) 이외에 또 다른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3월부터 12월까지 매달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를 했고 동시에 말랭이 사람들도 문화마을조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올해 마을에서 내가 활동할 주요 무대는 '동네글방'이다. 평균 75~80대 마을 어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늘 '공부'라고 말했다. 그들의 학력수준은 초등학교 미 졸업자부터 중학교 졸업자까지 다양하다. 공부라는 것이 반드시 학교 공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을 그들은 바랐다.

동네에서 공부를 가르쳐주면 무슨 시간을 내서라도 배우고 싶다는 그들의 소원을 '동네글방'에서 이루고자 한다. 소위 '문해교육' 지도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나는, 지난 1월부터 '국가문해교육센터'를 통해서 성인들의 문해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 목적과 수업 프로그램을 익히고 있다.

매스컴에 소문난 몇 지자체 성인들(순천 할머니, 제주 할머니)들의 문해교육 사례를 살피고, 우리 말랭이 마을 어른들만을 위한 특별한 교육을 고민하면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를 낭송하고 시를 쓰는 말랭이 할머니(가제)'다.

"어머님들, 이번 시간에는 글방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어머님들의 문해실력, 다시 말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사전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글자 하나를 더 알고 덜 안다고 해서 지금 어머님들의 삶에 큰 어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있다고 생각하심 안 되요. 중요한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려는 도전과 용기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임을 잊지 마시고 언제나 어머님들 스스로에게 격려와 칭찬을 주셔야 해요. 결코 옆 사람과 비교하지 마시구요. 아셨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누구?"라는 나의 질문에 어르신들은 "나여 나"라고 대답하며 다음으로 이어졌다.

"일단 제 소개글을 보시고 유사하게 어머님들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소개글에는 학력이나 경력을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정서적인 내용을 얘기나눠요. 예를 들면 좋아하는 꽃이나 색깔, 좋아하는 말, 기억에 남는 선물, 여행가고 싶은 곳,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 등 뭐 이런 얘기들을 나눠드린 종이에 써보는 거예요. 제가 한 문항씩 불러드릴게요. 글자를 모르시면 손 들어주세요. 도와드릴 거예요."

하얀 종이와 필기도구를 받으면서 어른들은 벌써부터 손이 떨린다고, '우리가 어떻게 그 어려운 걸 써'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은 나의 질문마다 하나씩 글을 써가며, 소리나는 대로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덕순님은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이란 질문에 '손자들이 그려준 그림'이라고 답했고, 정자님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진달래꽃'이라며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 구절을 말했다. 명희님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아고, 우리 글방 작가님이지'라며 종이에 큼지막하게 책방작가님이라고 써서 나를 감동시켰다.

워크숍을 끝내고 지도자 3명이 모여 검토한 결과, 우리 마을 어머님들의 문해실력이 너무 높아서 '낫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던 그 말이 참말이 아니라고 수업계획표를 수정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기초적인 한글 낱자를 거의 알고 있는 상황이라 학습의 출발을 낱자 중심에서 단어와 구, 절 중심의 수업으로 변경했다. 이를 위해, '매주 시 한 편 낭송과 필사하기' 그리고 제시된 시의 어구를 자신의 단어로 '바꿔말하기나 쓰기' 등의 응용 단계도 조금씩이라도 포함시켜 보자고 했다. 또한 글이 연상되는 그림 그리기를 함께 병행하기로 했다.

"어머님들과 올해 꼭 이루고 싶은 저의 소망은요, 어머님들이 써주신 귀한 글들을 시어와 그림으로 살려내어 어머님들이 이름을 단 시화집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책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못할 일도 아님을 우리가 보여줄 수 있어요."
 
군산의 근대시절 바닷가모습을 그린 벽화
▲ 말랭이마을벽화1 군산의 근대시절 바닷가모습을 그린 벽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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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책방 뒤 도로벽에 벽화 작업이 한창이다. 작년까지 오감을 호강시켜 주었던 능소화 나무를 다 뽑아버려서 내심 서운했는데, 어느날 벽면에 칠해지는 하얀 페인트를 보며 도대체 무엇이 그려질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났다.

주말 내내 책방을 열고 방문객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벽화를 잊고 있었다가 퇴근하려는데, 이틀 사이 벽면에 그려진 그림이 마치 불꽃 신호탄처럼 화려하게 변신해 있었다.

어떤 칸에는 '신흥학원'이란 글씨와 교실의 모습이 있었고, 그 옆 칸에는 군산근대의 회색빛 부둣가를 표현한 그림도 있었다. 또 다른 칸에는 산말랭이로 연탄을 배달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었다.
 
말랭이 동네에 있었다는 신흥학원의 모습을 그린 벽화
▲ 말랭이벽화2 말랭이 동네에 있었다는 신흥학원의 모습을 그린 벽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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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신흥동'. 새롭게 발전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이곳에 학원이 있었다는데, 아마 그를 추억해 벽화 그림을 넣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내 눈에는 올해 말랭이 마을 '동네글방'에서 공부할 '마을 어머니 학생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벽화를 그린 것 같아서 능소화를 없애버린 서운함이 다소 가셨다.

이러나저러나 말랭이마을에 봄이 왔다. 아니 말랭이 주인들이 봄을 세운다. 평생 다 해도 부족한 '공부'하는 마음으로 봄을 세우고, 말랭이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봄을 세운다. 그 한켠에 있는 책방 '봄날의 산책'은 산 말랭이에 우뚝서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봄을 포옹한다. '말랭이 어머님들, 올해 동네글방에서 멋진 시화집의 작가로 등단해요. 약속!'
 
산말랭이로 연탄을 배달하는 부자의 모습을 그린 벽화
▲ 말랭이벽화3 산말랭이로 연탄을 배달하는 부자의 모습을 그린 벽화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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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말랭이책방, #군산신흥동말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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