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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뭐든 한번 빠지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사람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만나 전공도, 직장도 내던지고 사회과학 작가로 변신했고, 마트에서 엉겁결에 들고 온 와인 한 병에 와인교 사도가 되어 와인 글을 연재하고 책까지 출간했으니. 하긴 몹시 진심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책을 쓸 수 있겠는가. 이쪽 일이 대체로 노력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이야기꾼 노릇 자체에 보람과 만족을 느껴야만 가까스로 지속 가능할 따름이다.

그런 내가 이번에 들고 온 '진심'은 다름 아닌 피아노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출장길에 혼밥을 하며 다채로운 미식 여행을 떠나듯, 나는 십여 년 동안 고독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방구석에서 하루 한 시간 나만의 음악 탐식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물이 이번에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이라는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피아노에 몹시 진심인 일본인

책을 쓰면 출판사로부터 10권에서 20권 정도를 저자 증정본으로 받는데, 대체로 지인들에게 선물하다 보면 모자라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2006년 이래로 한 푼이 아쉬운 전업 작가로 살다 보니 이제는 저자 증정본마저 강의 때 들고 가서 일일이 판매한다. 이번 증정본 20권도 알토란 같이 현금화하기 위해 옷장에 넣어놨다. 단 한 권을 제외하고는.

저자로서 책을 꼭 전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가현 사가시에 사는 63세의 어부 토쿠나가 요시아키(徳永義昭)다. 사실 이분과는 일면식조차 없다. 하지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에 담긴 20편의 이야기 중에 한 편은 온전히 토쿠나가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야말로 누구 못지않게 피아노에 몹시 진심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파친코' 손절한 50대가 푹 빠진 취미는 정말 의외다]
https://omn.kr/1wkrb

1960년생인 토쿠나가는 고교 졸업 후 인근 아리아케해에서 수십 년간 김 양식에 종사한 어부다. 2012년의 어느 날 도쿠나가는 TV에서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라 캄파넬라' 연주를 듣고 크게 감동한다.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고 클래식 음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음에도, 이 50대 남성은 무조건 '라 캄파넬라'를 직접 연주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1960년생인 토쿠나가는 고교 졸업 후 인근 아리아케해에서 수십 년간 김 양식에 종사한 어부다.
▲ 토쿠나가 요시아키 1960년생인 토쿠나가는 고교 졸업 후 인근 아리아케해에서 수십 년간 김 양식에 종사한 어부다.
ⓒ ?永義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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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전공한 아내에게 라 캄파넬라를 치고 싶다고 하니, 돌아온 대답은 '절대 무리!'였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토쿠나가는 라 캄파넬라가 연주될 때 해당 건반이 빛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발견했다.

일일이 영상을 멈춰가며 피아노 앞에서 건반 위치를 찾아 누르며 외우기 시작했다. 어부 일이 한가해지는 휴지기에 오른손 연습, 왼손 연습 번갈아 가며 매일 8시간씩, 어떨 때는 너무 열중한 나머지 12시간에 이르기도 했는데, 그렇게 석 달을 꾸준히 연습해 전곡을 외웠다.

꾸준히 연습하며 실력 향상 과정을 유튜브 동영상으로 올렸는데, 중년 어부의 라 캄파넬라 연주 도전에 감동한 사람들의 응원 댓글이 연이어 달리고 일본 각지의 학교에서 연주를 듣고 싶다는 초청이 이어졌다. 그래봐야 늦게 배운 연주 실력이 빤하지 않겠냐고?

환갑이 넘은 2021년 10월에 유튜브 채널에 올린 라 캄파넬라 연주 영상을 보면 그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50대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해 이 정도 완성도로 연주하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이 있었을까. 방구석 피아니스트인 나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연주를 듣다가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토쿠나가 요시아키의 라 캄파넬라 연주
ⓒ 도쿠나가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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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을 전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토쿠나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최신 영상에 번역기를 이용해 책을 보내고 싶다고 일본어 댓글을 달았는데, 금세 토쿠나가의 답글이 달리는 것 아닌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뤄줘서 고맙다며 자세한 내용은 페이스북 메시지로 소통하자고 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기술의 발전이 참으로 놀랍다. 덕분에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한국인이 실시간으로 일본인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배송 주소를 전달 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무척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토쿠나가의 반생을 그린 영화가 올해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내년 여름 일본 전역에서 상영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난해부터 폴란드 감독과 싱가포르 감독의 협업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데, 어부 일을 하고, 콘서트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유치원과 학교에서 연주하는 모습 등을 촬영하고 있단다.

올해 7월에는 유럽 촬영이 잡혀 있으며 다큐멘터리의 피날레는 쇼팽 국제 콩쿠르가 열리는 공연장에서 토쿠나가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될 것 같다고 한다. 폴란드 정부의 영화기금과 일본 NHK의 제작비 지원으로 촬영 중이며 유럽 영화제에 출품될 예정이란다.

다큐멘터리 촬영 때 나의 책을 소개하겠다며 "本当に有難う御座います(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이모티콘까지 넣어가며 메시지를 보내는 토쿠나가씨. 오히려 제가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유튜브 영상에 책을 보내고 싶다고 댓글을 달았는데, 금세 토쿠나가의 답글이 달렸다.
▲ 토쿠나가와의 유튜브 댓글 대화 유튜브 영상에 책을 보내고 싶다고 댓글을 달았는데, 금세 토쿠나가의 답글이 달렸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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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토쿠나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특히 궁금했던 부분이 있는데, TV에서 후지코 헤밍의 라 캄파넬라 연주를 듣던 순간이다. 나야 초등학교 때 동네 피아노학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접했다고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클래식 음악의 '클'자도 모르는 중년 남자가 팔자에도 없는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토쿠나가에게 직접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에 감동해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52살이나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졌습니다. 이 어려운 곡을 칠 수 있게 되면 나 자신이 뭔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뭔가 다른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피아노를 시작했습니다."

나도 정말 좋아하고 완주하고 싶은 곡이 있다. 바흐의 바이올린 곡을 부조니가 피아노로 편곡한 <샤콘느>인데, 나름 꾸준히 연습했지만 지금 내 연주 실력으로는 버겁다는 판단에 그만두었다. 그런데 토쿠나가는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어렵다는 라 캄파넬라를 연습해냈다. 분명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경제적인 보상이 있는 일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부 일은 막노동이 많아서 완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피아노 연주에서 사용하는 근육은 달라서인지 건초염으로 팔이 아파 매일 밤 찜질해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 1년 후에는 관객이 들어찬 공연장에서 꼭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년 만에 캄파넬라를 치면 관객들이 분명 놀랄 테니까요.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수십 번도 더 있었지만, 객석에서 청중들이 놀라는 얼굴을 상상하니 다시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노력할 수 있는 활력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토쿠나가는 처음에 단순히 개인적인 성취와 보람을 목적으로 라 캄파넬라를 연습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여러 곳에 초청되어 다양한 대중을 대상으로 연주하고 있으며, 그의 연주를 들은 이들은 용기와 희망과 감동을 얻는다. 이러한 연주 활동은 청중뿐만 아니라 연주자인 토쿠나가에게도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TV 프로그램을 녹화하면서 후지코 헤밍 씨 앞에서 캄파넬라를 연주했을 때, 그 일이 인연이 되어 후지코 헤밍 씨의 독주회에 초대받아 연주했을 때, '꿈이라면 깨지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치원에서 연주했을 때 한 아이가 감화되어 몰래 라 캄파넬라를 연습해, 1년 후 저에게 연주해 준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일본 전역의 피아노 선생님들로부터 저로 인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아무래도 환갑이 넘어 이제 어부 일은 어렵지 않냐고 하니, 김 양식 어부 일은 죽을 때까지 할 것이며 지금도 아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단다. 일본 전역으로 연주하러 다니고 있지만 막상 가족들은 매일 라 캄파넬라를 들으니까 소음처럼 느끼는 것 같다며 미안해한다. 지금은 쇼팽 에튀드 '혁명'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 3악장, 그리고 영화 <해바라기>의 OST도 연습 중이란다.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를 통해 토쿠나가 씨의 이야기를 접할 독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했다.

"꿈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손이 닿을 거리에 이미 기적이 와 있습니다, 그 기적을 손으로 잡느냐 놓치느냐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을 잘 받았다고 인증사진을 보내주었다.
▲ 책을 든 토쿠나가의 모습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을 잘 받았다고 인증사진을 보내주었다.
ⓒ ?永義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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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꺾이지 않은 진심

지난 4월 13일 저녁 7시 서초동 예술의전당 인근 스타인웨이 홀에서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북콘서트를 열었다. 70명 규모의 연주홀을 꽉 채운 청중들이 내 연주에 귀를 쫑긋 세우는 낯설고 낯선 상황이 벌어졌다. 피아노는 과연 내 비천한 손가락이 닿아도 되는지 황송한 마음마저 들게 만드는 함부르크산 스타인웨이 D-274.

북토크 중간중간 연주하기 위해 세 곡을 준비했는데 마지막 곡인 쇼팽 이별의 왈츠에서 대형 실수가 있었다. 앞선 두 곡을 무난하게 연주하다 보니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제법 손에 익은 곡이라 방심한 탓에 다른 곡에 비해 연습량이 적어서였을까. 어쨌든 아마추어만의 특권인 관객을 향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내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닳고 닳은 중년의 작가이다 보니 출간 행사에는 이골이 났지만, 공개 연주회는 처음이라 부담이 컸는지 북콘서트 후 한동안 몸살을 앓다가 이제야 가까스로 컨디션을 회복했다.

아직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한 실력이지만, 나도 언젠가는 바흐-부조니 <샤콘느>를 토쿠나가 씨의 라 캄파넬라만큼이나 멋들어지게 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여전히 꺾이지 않은 진심으로 오늘도 하루에 한 시간 연습을 어김없이 이어 나가련다. 내 연주를 듣고 놀라는 청중의 얼굴을 상상하며.

태그:#토쿠나가 요시아키, #임승수,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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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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