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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저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었습니다. 이날은 카자흐스탄의 승전 기념일입니다. 2차대전에 독일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이기 때문이죠.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옛 소련권 국가들은 모두 5월 9일을 '대조국 전쟁'의 승전 기념일로 챙기고 있습니다.

승전 기념일인 사실을 알면서도 큰 생각 없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중심가로 나오자 옷깃에 리본을 단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더 걷다 보니 전몰자의 사진을 든 사람, 작은 국기를 든 사람, 소련 국기를 든 사람, 심지어는 소련 시절의 군복을 입은 사람까지도 보입니다.
 
소련군의 모자를 파는 상인
 소련군의 모자를 파는 상인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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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저는 '판필로프 공원'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도심 공원의 중앙에 오래된 성당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공원에는 2차대전 승전 기념비도 있더군요. '판필로프'라는 이름 자체가 '판필로프의 영웅'이라는 2차대전 전사자를 기려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2차대전의 승리를 축하하고 전사자를 추모하는 카자흐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추모비 앞에 쌓인 붉은 카네이션을 바라봤습니다. 이 전쟁과 승리가 카자흐스탄에 갖는 의미를 더 오래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추모비 앞의 카네이션
 추모비 앞의 카네이션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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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자흐스탄의 역사에서, 2차대전은 여러 미묘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카자흐인은 원래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은 유라시아 초원 무역의 핵심이 되는 땅이었죠. 인간이 최초로 말을 가축화 한 흔적도 현재의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됩니다. 다양한 초원 민족과 교류하던 카자흐스탄은 15세기경부터 하나의 민족 집단을 구성합니다.

러시아의 카자흐스탄 장악은 18~19세기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 카자흐스탄은 우즈벡이나 준가르 등 주변 국가의 압박을 받고 있었죠. 압박을 받던 일부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에 자발적으로 복속했습니다. 물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가 언제나 이렇게 평화롭게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요.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세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죠. 러시아는 점차 중앙아시아에 대한 간섭을 강화합니다. 카자흐어나 유목 전통은 물론 걸림돌이 되었죠.
 
카네이션을 사는 사람들
 카네이션을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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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은 중앙아시아로 러시아인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합니다. 각 민족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기 위함이었죠. 러시아인뿐 아니라 다른 슬라브인, 때로 독일인과 유대인도 중앙아시아로 이주했습니다. 1차대전 기간에는 징집에 반대하는 카자흐인을 대규모로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소련이 들어선 뒤에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직접 접해 있는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 짙었습니다.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카자흐스탄은 1936년까지도 러시아 아래의 자치 지역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카자흐스탄에는 미개간지가 많았으니, 그만큼 러시아인 이주자도 많았습니다. 소련이 벌인 집단농장화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였죠. 특히 이 과정에서 카자흐인의 전통적인 유목 생활 방식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뭄과 기근으로 카자흐인 인구는 점차 줄어갔습니다. 특히 1930년대 초에는 대기근을 겪기도 했죠. 늘어나는 러시아인 이주자와 줄어드는 카자흐인 인구는 인구 역전까지 불러왔습니다. 카자흐스탄 땅에 카자흐인보다 러시아인이 더 많아진 것이죠. 이 사건을 당시 집단농장화 책임자의 이름을 따 '골로쇼킨 제노사이드'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스탈린 시절 카자흐 민족주의 인사는 대부분 숙청되었습니다. 흐루쇼프 시절에도 토지 개간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결과는 심각한 실패였죠. 소련 정부가 카자흐스탄에 건설한 핵실험장 문제는 지금까지도 카자흐스탄 국토에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 젠코프 성당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 젠코프 성당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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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카자흐인에게 러시아는 언제나 침략자였습니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카자흐스탄은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죠. 그러나 여전히 카자흐스탄 인구 중 15% 이상이 러시아계입니다. 러시아어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죠.

그렇다면 2차대전의 승전이 카자흐스탄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과정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이들은 누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일까요. 소련일까요? 러시아일까요? 아니면 카자흐 민족이었을까요?

'소련의 전쟁'이었던 2차대전에 참여했던 카자흐인 전사자의 이름과 사진을 공원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소련의 군복을 입은 카자흐인들이 그린 미래는 무엇이었을까요. 소비에트와 공산주의의 이상이었을까요? 그저 살고 있는 땅을 지키고 싶었을 뿐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희생으로 조금이나마 더 대우받을 수 있을 카자흐 민족을 생각했을까요? 그랬다면 참 역설적인 상황이겠죠.
 
전사자를 추모하는 영원의 불꽃
 전사자를 추모하는 영원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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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뿐은 아니었습니다. 소련의 지배란 카자흐인에게 언제나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당장 소련의 멸망이 그랬습니다. 카자흐스탄 역시 소련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0년대 말부터 정치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은 1991년 12월 16일에야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소련의 구성국 가운데 가장 늦게 탈퇴를 선언한 것이죠. 카자흐스탄의 독립 선언과 함께 소련은 '영토 없는 국가'가 되었고, 열흘 뒤 공식적으로 해체됩니다.

카자흐스탄이 마지막까지 탈퇴를 주저한 이유는, 탈퇴 이후 카자흐스탄이 겪었던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련 해체와 함께 중공업 수요가 급감하면서 카자흐스탄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죠. 소련권 국가들이 모두 겪은 위기였지만, 카자흐스탄은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러시아인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생활수준이 낮아지며 출생률도 크게 줄어들었죠. 2000년대 초반 자유시장경제로 전환을 완료할 때까지, 카자흐스탄의 인구는 꾸준히 감소했습니다. 2010년에 들어서야 독립 당시의 인구를 회복했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인구 구조를 보면, 20세를 전후한 인구가 크게 적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주를 비롯한 여러 영향이 있겠지만, 1990년대 초반 출생자가 크게 적은 것은 경제적 이유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겪어야 했던 거대한 혼란과 경제적 위기 속에서, 카자흐인에게 또 소련과 러시아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2019년 카자흐스탄의 인구 구조표
 2019년 카자흐스탄의 인구 구조표
ⓒ UNF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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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카자흐스탄은 그 모든 역사를 겪고 회복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 지배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어디에나 함께 적혀 있는 러시아어와 카자흐어처럼 말이지요.

판필로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 뒤, 저는 독립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1991년 카자흐스탄의 독립을 기념하는 공간입니다. 어쩐지 전승 기념일인 오늘은 이 기념탑이 꽤나 쓸쓸해 보입니다.

소련으로서 치러야 했던 2차대전과 그 소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카자흐스탄이 치러야 했던 대가를 생각했습니다. 둘 모두, 상처와 영광의 기억이 함께 남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역설을 갖고 지금까지 또 30년이 흘렀습니다.
 
함께 선 두 기의 무덤
 함께 선 두 기의 무덤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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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필로프 공원에서 작은 무덤 두 개를 봤습니다. 하나는 정교회 십자가가, 하나는 무슬림의 초승달이 놓여 있더군요. 아마 한 사람은 러시아인, 다른 사람은 카자흐인이었겠죠. 두 사람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을 왠지 유심히 바라보게 됐습니다.

충돌하는 가치, 역설적인 역사 속에서도 함께 살아갔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모습입니다. 어쩌면 전쟁에서도 독립에서도 그들이 품었던 꿈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알마티는 도심에서도 멀리 장쾌한 설산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도 독립도 함께 지켜보았을 높은 산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쩐지 위로가 되는 풍경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카자흐스탄, #알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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