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부여 초촌면 추양리와 외산면 가덕리 주민들이 자매결연 협약식을 위해 모여있다.
▲ 부여 초촌면 추양리 마을 두레 풍장 전수관 앞  부여 초촌면 추양리와 외산면 가덕리 주민들이 자매결연 협약식을 위해 모여있다.
ⓒ 오창경

관련사진보기


"별거 아뉴. 모심기도 끝나고 한바탕 노는거유."
"풍물 소리에 돼지가 '나 잡아 잡수' 하며 잔칫상에 드러눕는데 워쩐대유? 아따, 카메라 놓고 괴기(고기)부터 한 점 드시고 하셔."


별거 아닌 잔치에 돼지까지 잡은 충청도식 유머가 난무하는 잔치 분위기 속에서는 제대로 인터뷰가 될 리가 없다. 일단 모인 사람들 속에 섞여서 마치 그 동네 원주민인양 함께 먹어주고 놀아주기부터 해야 입이 열린다.

지난 15일,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두레 풍장 전수관 마당 한구석 바비큐 그릴에는 돼지고기가 솔향을 풍기며 익어가고 마을 광장에는 100명은 훨씬 넘을 것 같고 150명에서 조금 모자랄 것 같은 사람들이 모인 잔치판이 벌어졌다. 게다가 킥보드를 타고 어른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아이들까지, 근래에 보기 드문 시골 마을 풍경이 펼쳐지는 마을이었다.
 
두 마을의 자매결연 협약식 전에 벌어진 바베큐 파티. 오른쪽에 있는 이(강원식, 65세)가 돼지 한 마리를 통 크게 내놓았다.
▲ 부여 초촌면 추양리 두레 풍장 전수관 마당에서 벌어진 바베큐 파티 두 마을의 자매결연 협약식 전에 벌어진 바베큐 파티. 오른쪽에 있는 이(강원식, 65세)가 돼지 한 마리를 통 크게 내놓았다.
ⓒ 오창경

관련사진보기


한바탕 고기와 술이 오가는 친교의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와 외산면 두 마을의 자매결연식이 시작되었다. 자매결연이란 어떤 지역이나 단체들이 서로 도움을 받기 위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일을 말한다. 자매결연의 내막에는 서로의 필요에 의한 유기적인 결합이며, 대놓고 이해관계를 따져보겠다는 속내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걸치는 것도 없는 두 지역이 순수하게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부여군에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두 마을의 자발적이고 민간 주도적인 자매결연식에 다녀왔다. 행사장마다 얼굴을 내미는 지방의회 의원들 한 명 초대하지 않은 자리였다. 물론 언론 플레이도 염두에 두지 않아서 기자 한 명 부르지 않은 자리였다. 내가 그 자리에 끼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계기였다. 추양리 지인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행사 1시간 전에야 알고서 서두른 덕분이었다.

"신나서 함께 노는거쥬"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와 외산면 가덕리는 부여에서도 동서의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들로 서로 교류할 일이 별로 없는 마을이었다. 초촌면 추양리는 백마강이 내준 비옥한 벌판이 펼쳐진 곳에 형성된 마을로 논산시와 경계 지역에 있다. 외산면 가덕리는 보령시와 경계에 있으며 전형적인 산골 마을로 부여군에서도 서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이해관계는커녕 서로 마을의 이름도 모르고 교류조차 없던 마을이 친구처럼 가까워진 끝에 자매결연까지 맺게 되었다.

작년 부여군 지역 공동체 활성화 재단에서 주최한 공동체 한마당에서 추양리 두레 풍물단 공연을 관람한 가덕리 사람들은 혼이 쏙 빠져 달아나는 경험을 했다. 추양리(고추골) 두레 풍장은 대통령상까지 수상했을 정도로 알아주는 가락이었다. 공연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는데 가덕리에서 배우고 있는 풍물과는 맥이 다른 신명이 있는 가락이었다. 가덕리 사람들과 상쇠 윤종산(65)씨는 추양리 두레 풍물 가락을 한 수 배우기로 결의하고 추양리 두레 풍물단의 문을 두드린 것이 발단이었다.
 
남녀노소의 인구 층이 다양하고 인구 수가 많은 마을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 부여 외산면 가덕리와 초촌면 주민들의 자매결연 협약식 기념사진 남녀노소의 인구 층이 다양하고 인구 수가 많은 마을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 오창경

관련사진보기


"초촌에서 외산까지는 부여의 끝에서 끝을 오가는 거리쥬. 보통 친분으로는 되덜(되지) 않는 일이지만 가덕리 사람들이 원판(매우) 흥이 좋고 열심히 하니께 우리도 신나서 함께 노는거쥬."

요즘 말로 '놀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 같다. 자매결연을 맺기까지의 과정과 두 마을에 어떤 효과가 있을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놀기'부터 해야 한단다. 간단한 자매결연식이 끝나자 각 마을의 가수(?)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현란한 춤판부터 벌어졌다.

시골마을 한가운데 등장한 나이트 클럽(?)에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땀을 흘리며 가락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흔들고 뛰었다. 두 마을 사람들의 한데 어울리고 엉켜서 노는 모습에 누구든 빨려 들어가는 춤판, 놀자판이었다. 역시 음주가무를 좋아했다던 동이족의 후손들이었다.

"이제 몸들 좀 푸셨쥬.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놀아들 보셔야쥬. 악기들 가져오세유. 노름마치로 갑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날라리 태평소 소리가 날아왔다. 상쇠의 꽹과리 소리가 앞장 서자 춤판이 놀이판으로 바뀌는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익숙한 타악기 소리가 이어지고 부여 초촌면 추양리 두레풍장 전수관 마당은 나이트클럽에서 한밤의 풍물 음악회로 무대장치가 변환된 것처럼 개갱깽깽 심장을 뛰게 하는 사물 악기 소리가 점령해버렸다. 흥이 실리지 않았다면 악기를 두드리는 어깨 근육이 남아나질 않을 만큼 흥겹고 열정적인 몸놀림들이었다.
 
초촌면 추양리와 외산면 가덕리 동서의 끄트머리 마을의 신명나는 풍물놀이 한마당
▲ 풍물놀이로 하나가 된 두 마을 초촌면 추양리와 외산면 가덕리 동서의 끄트머리 마을의 신명나는 풍물놀이 한마당
ⓒ 오창경

관련사진보기


말 한마디 없이, 노랫소리도 없이 사물 악기 소리만으로 발걸음은 가볍고 어깨에 흥이 실려 돌고 도는 놀자판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넋은 나가고 신이 올라 있었다. 신명이 나서 기악을 연주하며 향만 먹고 산다는 노는 신, '건달파'의 경지에 오른 듯했다.

킥보드를 타고 어른들 주변을 맴돌던 아이들도 어느새 악기를 들고 어른들 사이에서 북과 장구를 치며 함께 놀고 있었다. 추양리 아이들은 더 어린 시절부터 두레 풍장 전수관에서 들리는 풍물 소리를 듣고 자랐다. 풍장소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아이들은 어른들 못지않게 잘 놀 줄 알았다.

이런 '제대로 놀기'도 필요합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풍장을 치며 노는 풍경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곳이었다. 지방, 인구, 마을의 소멸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자조하며 관망할 수밖에 없던 현실에서 아이들과 젊은 부부, 놀이 문화로 활력이 넘치는 마을은 4차원의 세상으로 옮겨가 버린줄 알았는데 이곳에는 남아 있었다.

"우리 어릴 적에는 마을에 무슨 일만 있으면 풍장부터 치곤 했슈. 서로 눈치를 맞춰가며 치는 게 풍장 가락이유. 상쇠가 앞서고 북과 징이 받치고 장구는 가락을 쪼개면서 신명을 나게 해줘야 하는규. 네 가지 악기가 어울리게 치면서도 즐겁고 흥이 나고 편하게 칠 줄 알아야 하는규. 그 대신 뒷북을 치면 안돼유. 그땐 혼구녕을 내서 바로 잡아야 혀유."

추양리 상쇠 이규환(72)씨의 두레 풍장에 대한 정의는 이랬다. 어쩐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정의한 어록처럼 들렸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사회보다 두레 풍장 놀이 속에 더 생생한 교육과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추양리 두레풍물단이 매주 부여 외산면 가덕리를 방문해서 주민들에게 풍물을 가르치는 동안 가덕리 주민들은 손님 대접을 깍듯하고 융숭하게 했다. 그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 추양리 주민들이 가덕리 사람들을 초청한 것이 자매결연 협약식으로 일이 커져 버렸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순리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면서 행정의 협조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잘 놀기 위해 뭉쳤다는 말이 잘 어울리고 자연스러울 수가 없는 밤이었다.
 
추양리 마을의 두레 풍장 소리가 키운 아이가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풍장을 치고 있다.
▲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의 두레 풍장 키즈 추양리 마을의 두레 풍장 소리가 키운 아이가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풍장을 치고 있다.
ⓒ 오창경

관련사진보기


돼지를 잡아, 먹고 놀기에 딱 좋은 날이라며 흔쾌히 통돼지 한 마리를 낸 강원식(65) 주민과 여름 잔치에는 수박만한 디저트가 있겠느냐며 수박을 내놓은 익명의 주민은 추양리 두레 풍장 키즈에서 제대로 풍물을 즐기는 나이가 된 사람들이다.

언제부턴가 잘 놀고 잘 어울리며 함께 땀 흘리며 사는 것보다 근로 노동과 월급 생활자의 삶을 추구하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었다. 제대로 놀면서 몸으로 터득하고 익혀야 할 가치들은 등한시하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여러번 영육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과정으로 놀이판이 필요하다. 잘 놀고 어울리지 못해 부작용을 겪는 사례들이 속출하는 데는 이런 놀이 문화를 경시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모 루덴스, 인간은 놀고 즐기고 움직일 때 가장 사회적이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부여 초촌면 추양리 주민과 외산면 가덕리 동서 끄트머리 마을 사람들의 풍물 공동체를 통해 알게 된 날이었다. 추양리와 가덕리 주민들이 두레 풍장을 앞세워 '제대로 놀기'의 길을 터준 일이 우리 '전통 놀이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슴을 뛰게 하는 풍물 가락에 제대로 물든 밤이었다.

태그:#부여군 , #외산면 , #초촌면, #두레 풍장, #가덕리, 추양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