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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 변리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갑곶돈대의 모습.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 변리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갑곶돈대의 모습.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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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소년기에 벌어진 큰 외교문제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라면 청년기에는 강화도조약이라 할 것이다 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향후 조선왕조는 물론 김옥균 개인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민씨 척족정권의 집정에 따라, 메이지유신으로 부국강병을 구축한 일본이 정한론의 비수를 감추고 군함 3척에 함포사격 연습이라 가장하면서 1876년 2월 강화도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우리측 전권대사 신헌과 일본 특명전권관리대신 구로타 사이에 12개조의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 강압은 아니지만 분위기와 상황이 정상은 아니었다. 이로써 조선은 자율적 문호개방의 기회를 잃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 ② 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제2조) ③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여한다(제5조). ④ 조선은 연안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제7조). ⑤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제10조). ⑥ 양국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장정을 체결한다(제11조).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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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1조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며, 제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리고 제7조는 조선연안 측량권을 일본이 얻음으로써 군사작전시 상륙 지점을 정탐하게 하였으며, 제10조는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었다 할 수 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어 차차로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분기점이 되었다.

이 조약은 비록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권을 가진다"는 조문을 넣었으나 그것은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었다. 조약 체결 후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 진출에 당황한 청나라는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주선했고(1882) 이후 조선은 영국 등 유럽 각국과 통상조약을 차례로 체결하여 구미 자본주의 앞에 본격적으로 개방되었다.

조선이 쇄국주의를 청산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각국과 국교를 연 것은 이른바 은둔국의 처지를 벗어나 세계사적 추세에 발맞추어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민족국가 건설과 자율적 산업혁명의 계기가 되지 못하고, 집권세력이 외세에 영합하고 정치·경제적으로 그것에 예속되는 계기가 되어 이후 근대화가 아닌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주석 8)

강화도조약에 대해 다른 시각도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강화도조약은 조선에게 '어둠'의 역사가 아니었다. 일본은 이 조약에 임해서도 계략의 검은 마수를 숨기고 있었지만 조약 그 자체는 조선의 '밝은' 미래에 대한 의지가 실린 것이었다. 그 '밝음'의 미래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아시아 국가 최초의 관세자주권 실현의 성과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더 밝은 미래가 보였다. 그러나 2개월 만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공든 탑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주동자 색출을 명분으로 출병을 단행한 청국은 때 아니게 조선을 속방화하려고 들었고, 일본과 서양 열국은 다투어 최혜국 조항을 적용하여 관세자주권의 입지를 붕괴시켰다.

불평등관계가 여기서 시작되어 '어둠'의 역사, 시련의 역사가 현실로 닥쳤다. 그 시련 못지않게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진실의 은폐로 일그러진 근대의 역사상이 오랫동안 우리를 덮고, 우리를 상징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주석 9)

김옥균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지켜보면서 오경석 등 선배, 동지들과 향후 대책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4월에 제1차 수신사 김기수가 일본에 파견되고, 그는 7월에 귀국하여 <일본견문서>와 <동유기(東遊記)>를 작성했다. 또한 어윤중이 일본과 청국을 돌아보고 지은 <중동기(中東記)> 등을 검토하면서 내외의 정세를 연구하였다.

개화사상가들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일파의 보수정책, 부패와 무능에 불만을 품고 나라의 부강한 발전과 문명개화를 위해 시급히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봉건양반 출신의 청년관리, 지식인들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계급적 제약성 때문에 당시의 정세를 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 스스로가 앞장서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들 가운데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그밖의 소수 양반출신 개명 청년관리와 지식인, 유홍기를 비롯한 일부 중인 출신의 선진적 지식인, 중소관리만이 나라의 급속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들 개화사상가들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김옥균을 중심으로 점차 결집하였다. (주석 10)


주석
8>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180쪽, 창작과비평사, 1994.
9> 이태진, <1876년 강화도조약의 명암>, <한국사 시민강좌> 36, 138쪽, 일조각, 2005.
10> <한국근대민중운동사>, 10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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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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