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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시민사회단체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비난의 목소리에는 사실과 왜곡이 구별되지 못한 채 뒤섞여 있었다. 활동가가 정계에 진출하면 이유야 어쨌든 '운동이 정치 입문 코스가 됐다'고 비난받았고, 개인 신상 또는 회계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부도덕하거나 어리숙하다고 손가락질받았다. 그 결과 시민사회운동의 힘은 점차 약해져 온 듯하다.

그러나 외부의 따가운 시선만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다. 소위 '87 민주화 세대'와 그 이후 세대 운동가 사이에는 사회운동·노동·리더십 등에 관한 관점의 차이와 갈등이 발생했다. 단체 신뢰도 하락과 경제위기 등으로 후원자가 감소했고, 상근 활동가들의 생계는 물론 단체 유지조차 점점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수년 동안 진영론과 광적인 정치 팬덤 현상이 한국 사회를 덮어버렸고, 장기적인 경제 침체와 가계 부채 증가가 이어졌다.

이러한 현실에서 단체와 운동 또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시민사회단체와 운동의 존재 자체가 위기'라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혼란 속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위기 담론은 거침없이 확산했고, 차세대 활동가들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결국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정부의 민간위탁 사업이나 공무원 별정직 업무에 투신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현실 인식 속에서 그동안 지켜온 가치와 방식을 수정하고, 또 누군가는 풍찬노숙의 삶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 부정과 자기 정당화 사이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동료들과도 갈라진 듯한 어색한 관계로 지내야 했다. 과로, 때로는 그 이상의 아픔도 활동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려고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운동을 한 것은 아닌데"라는 자조 섞인 절망이 뒤따른다. 어떻게 하면 절망의 늪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과 해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운동의 위기가 아니다, 낡은 시선의 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단체와 운동은 계속 뛰고 있다. 다시 단체들과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후원하고 함께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단체와 운동은 계속 뛰고 있다. 다시 단체들과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후원하고 함께 하자.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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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는 자유의 본체이고 시민사회운동은 그 심장이다. 뇌 역할을 하는 정치가 기능을 멈추고 공적 의사결정의 흐름이 막히면 사회는 뇌사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시민사회운동이 잘 버티면 곳곳의 시민 활동이 정치라는 뇌를 깨우고 시민사회를 회복시킬 수 있다. 마치 심장이 멈추지 않고 몸 구석구석 피와 산소를 전달하면 수십조 세포들이 근육과 기관을 움직여 기적처럼 몸을 회복시키는 것과 같다.

이건 기적이 아니라 의지의 발현이다. 논리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정념의 힘이 폭발한 결과이다. 이 정념의 힘, 자유와 삶에 대한 의지가 충만한 시민사회의 심장이 바로 시민사회운동이다. 그래서 시민사회운동은 행정조직이나 제도정치와 전혀 다른 세계이고, 전혀 다른 철학과 논리로 작동된다.

심장 같은 시민사회운동은 때론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을 폭발적으로 창조하면서 결승선 같은 거대한 통일점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운동이 늘 통일된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운동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경합하면서 만든 정념과 실천이 담겨 있다.

정치적 선악이 분명하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여러 사회 문제가 그 빛과 정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운동도 한가지 방식과 논리로 작동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빠르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그리고 통치 방식도 교묘해진 오늘날에는 운동도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은 노동·환경·장애인·젠더·소수자·난민·노인·공공서비스·공동체 돌봄·주거·아동청소년·문화·평화·교육·지식·과학기술·자영업·소비자·주민자치 등 수많은 분야에서 때로는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시각과 실천 방식이 위계를 벗어나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여러 사회 난제에 맞서고 있다.

그래서 지금 시민사회운동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차이와 다양성, 연대와 환대 같은 개념들이 민주주의와 함께 강조되고 있다. 사회혁신, 사회적 경제, 커먼즈1)와 같은 용어들이 전통적인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새롭게 재조명하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통일된 존재처럼 움직이는 것은 특정 시기에 나타나는 모습 중 하나이다. 만일 이 하나의 모습을 시민사회운동의 본질이라고 착각하고 현 상태를 진단한다면 위계 없이 조각나 보이는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은 위기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은 '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운동을 진단하는 낡은 시선의 위기'다. 운동의 다양한 정념과 실천을 과거 사회 변화의 분수령에서 드러난 '대동단결'이나 대규모 시위와 같은 통일된 무엇인가에 묶어버리려는 낡은 생각이 만든 위기일 뿐이다.

낡은 시선에는 단지 이런 대동단결과 대규모 시위를 향한 열정만 담긴 것이 아니다. 열정의 표출을 위해 다른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담겼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시선에서 운동을 바라보면, 개인적인 결정만으로 운동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도, 개인 신상이나 회계를 어리숙하게 처리해서 문제가 돼도, 사회적 가치를 명목으로 활동가의 노동을 폄하해도, 실용적이지만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조직 내에서 사용해도, 그래서 단체와 활동가가 조금은 더 고생해도 된다.

사실 진짜 위기란 낡은 시선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단체와 운동의 신뢰가 떨어지고 유지가 어려워질 때마다 이 시선에 대한 향수를 불러들여 다시 어려운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고, 위기의 원인을 위기의 해법으로 착각하는 그 자체이다. 결국 이렇게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소환하자

그렇다면 희망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오늘날 희망이 사라지는 이유, 저 낡은 시선의 기원은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대표 주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앞세운 구호 TINA2)는 "쓸데없이 딴생각이나 더 좋은 세계에 대한 희망 같은 거 품지 말고 신자유주의가 정한 게임 규칙 안에서 개인의 성공을 위해 기업과 시장이 원하는 자기 계발에 충실히 하라"는 신조다.

시간이 지나면서 TINA는 시민사회운동을 향해 줄다리기의 승리만을 강조하는 낡은 시선과도 연결되었다. 물론 TINA에 맞선 TATA3)도 있다. 하지만 TATA를 믿지 않는 듯한 우리 안의 낡은 시선에서 절망과 위기를 넘어서는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 낡은 시선이 심장 같은 시민사회운동을 위기라고 규정하고 운동이 이 시선의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단체와 운동은 불안에 빠진다. 신뢰와 후원이 약해지니 '협치'로 포장된 정부 보조금과 민간위탁 사업을 찾게 되고, 이것이 단체의 중요한 기반과 대표적 성과가 된다. 결국 점점 행정의 언어와 문법을 받아들이고 이에 길들여진다. 그럴수록 그 성과를 위한 낡은 시선이 다시 호출되고, 행정의 언어와 문법을 따라가지 못해 정부의 지원이 끊기면 절망은 더 커진다. 시민사회운동은 사회에 피와 산소를 공급하는 자율적인 심장이 아니라 정치의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인 근육이 돼버리는 듯하다.

시민사회단체의 다양한 정념과 문법은 행정의 그것으로 점차 획일화되고, 냉혹한 현실만 마주하는 사회에는 희망과 웃음이 사라져 분노와 슬픔의 정념만 가득하게 된다. 희망과 웃음이 사라진 분노와 슬픔은 우리의 영혼과 신체를 갉아버리고 절망을 키울 뿐이다. 사라진 희망을 소환하고 웃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심장이 다시 제대로 뛸 수 있다. TINA를 거두고 다시 TATA를 믿자.

지금도 여전히 심장은 뛴다. 활동가들은 외롭게 홀로 시위에 나서고 오체투지의 절규도 주저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준비한 토론회나 시민학교가 실망스레 끝나도 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남몰래 속앓이하면서도 온라인 탄원서나 성명서를 들이밀거나 모금을 요청하는 '고귀한 뻔뻔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지만 전국 곳곳에서는 생태 전환과 사회적 경제, 공동체 돌봄을 향한 도전이 이어진다. 주민들이 모이는 공공 공간이 폐쇄되지만 지역 주민과의 활동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펼쳐진다. 스스로 연구하는 활동가들이 나타나고, 서로 다른 분야의 활동가들이 만나 환대하면서 연대의 힘을 키운다. 심장은, 희망은, 생명은 강제로 멈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뛰는 시민사회단체와 운동이 바로 저 낡은 시선과 위기에 대응하면서 웃음을 되찾고 희망을 소환하는 가장 생명력 있는 태도일 것이다. 희망은 공허한 이데아가 아니라 지금 뛰는 심장박동 그 자체이다. 아무리 낡은 시선이 위기를 초래하고 위기를 규정하더라도 활동가들이 현장을 뛰고 연대의 힘을 키우는 한 심장은 멈추지 않고 정치라는 의식과 함께 자유의 본체는 다시 깨어날 수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현실이 얼마나 더 절망적이었을까?

이제 시민사회운동이, 단체가, 활동가들이 저 낡은 시선을 벗어나 이 사회의 심장을 계속 뛰게 만들자. 그렇게 시민사회라는 자유의 본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소환하자. 그 방법은 어쩌면 간단하다. 다시 단체들과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후원하고 함께 하자.

1) 커먼즈는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생존과 존엄성을 위해 필요한 유무형의 자원을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규칙을 정하고 관리하고 사용하는 삶의 양식이자 기반이다. 전통적으로는 공동 수로, 공동 목장, 어촌계 등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바다, 공기, 물은 물론 여러 지식과 데이터, 디지털 플랫폼, 전파, 마을 축제와 골목, 마을 공동체 운동, 주민 자산화, 공동체 토지신탁, 협동조합 주택 등도 커먼즈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There Is No Alternative'의 약자로 더 이상 다른 대안은 없다는 뜻
3) 'There Are Thousands of Alternatives'의 약자로 우리에겐 수천 가지 대안이 있다는 뜻

덧붙이는 글 | 글 이승원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선임연구원, 커먼즈 네트워크 활동가.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9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시민사회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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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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