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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다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주치의를 만나 첫 번째 검진을 진행했다. 미국은 병원 진료를 받기 위해 반드시 주치의를 지정해야 한다.

신규 환자를 받아 주는 의사를 찾고, 첫 상담을 통해 주치의로 지정할지 말지 결정한다. 그런 다음 몸에 문제가 있으면 해당 주치의를 통해 1차 진료를 받고, 추가 진료가 필요한 경우 주치의가 전문의를 연결해 주거나 필요한 검사를 받게 해준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가 가진 민영 보험사가 해당 병원과 주치의를 커버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내가 가입한 보험사와 연계된 병원이 아닌 이상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기에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신규 환자를 받을 수 있는 의사가 많지 않아서 주치의를 찾는 과정에서 애를 먹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지 6개월 만에 주치의를 찾을 수 있었고, 일차 상담을 통해 간략한 나의 정보를 의사와 공유했다.

이렇게 밝은 내가 우울증?

민영 보험으로 연간 1회 건강 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4개월 만에 주치의를 찾았다. 나의 주치의는 하버드 대학 졸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동안 유튜버를 꿈꾼 활기찬 여성 의사다. 아이들의 소아과 건강 검진을 한번 받은 적이 있고, 이상하다고 여길 증상이 없었기에 마음 편히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가 첫 번째 상담할 때 나눈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냐며, 문진하기에 앞서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다. 특별히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없어서 내가 먼저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다고 말하려다 최근에 체중이 증가한 게 생각나 그 이야기를 했다. 

2월부터 6월까지 4개월 동안 4kg가량 체중이 증가했고, 지금은 체증 감소를 하려 노력 중이라 했다. 의사는 왜 살이 찐 것 같냐고 물었고, 평소에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데 그땐 아이들 간식 바구니를 내가 먹어 치워 비울 정도로 달콤한 음식에 대한 욕구가 대단했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먹어서 임신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보스턴에서 지난겨울과 겨울을 닮은 봄을 보내며 겪은 상황을 이야기하던 중 뭔가 떠올라 말했다. 

"달콤한 음식이 당기는 것도 이상했지만 날이 흐리거나 비가 와서 해를 못 볼 때 너무 힘들었어요. 몸이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거든요. 그런 날은 오후가 되면 졸리기도 하고, 뭔가 한 일도 없이 피곤했어요. 아이들이 하교하고 오는 시간이면 괜히 짜증이 나거나 체력이 완전히 소진된 느낌이 들어 당황할 때도 많았고요. 그러다 여름이 왔을 때 진짜 행복했어요. 지금은 여름이 저물어서 앞으로 다가올 가을 겨울이 벌써 두렵기도 해요. 또 그렇게 힘들까 봐요." 

여기까지 다 들은 의사는 뭔가 생각난 듯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말했다.

"새드(SAD)네요."

새드(SAD)는 'Seasonal Affective Disorder'의 약자이고, 우리말로 계절성우울증이다. 계절성우울증은 봄에 시작하는 경우와 가을에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의 경우는 '겨울 우울증'이라 부르는 가을에 시작하는 우울증이라 했다. 의사가 알려준 새드(SAD)의 주요 증상은 다음과 같았다.

- 평소에 즐기던 일들을 더 이상 즐기기 힘들거나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
- 슬프거나 마음이 울적하고, 짜증이 나거나,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겨울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평소보다 잠을 많이 자고, 평소보다 식욕이 왕성해져 단 것과 탄수화물 음식을 찾게 되고, 살이 찐다고 했다. 지난겨울과 봄, 아이들 간식을 내가 몽땅 해치우며 야금야금 찐 살들이 곧 '겨울 우울증'에 시달린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었다. 

여름이 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햇살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달콤한 간식을 찾던 습관이 완전히 사라졌고, 오르기만 했던 체중계 숫자도 멈췄다. 울적한 기분도, 에너지가 소진되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예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주치의를 만나고 온 후, 토네이도가 매사추세츠주를 한 차례 지나가며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자주 온다. 구름 낀 날이 해가 뜬 날보다 잦아지니 벌써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난 겨울을 지내며 곶감처럼 쪼그라들었던 내 마음과 아이들 간식 바구니를 비웠던 내 손길들이 떠올랐고, 덜컥 겁이 났다.  

우울한 마음마저 달래주는 달리기

의사는 나에게 빛 치료(라이트 요법, Light Therapy)와 상담, 약물 치료가 있는데 빛 치료를 먼저 시작해 보자고 했다. 빛 치료는 조명을 통해 인공적으로 햇살과 유사한 빛에 노출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 방법이다. 그리고 하루 중 최대한 일찍 자연광에 노출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자연광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다가 새삼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운동과 햇살을 한 번에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달리기였다. 식물이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광합성 과정을 거쳐 에너지를 흡수하듯 나에게 햇살은 에너지 공급원이고, 그 에너지를 슬기롭게 쓰는 방법이 달리기는 아닐까. 

해를 바라보고 싶어 모자도 쓰지 않고 선크림만 간단히 바르고 해를 향해 달린 날들이 있었다. 눈이 부신 것도,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도 그저 즐겁기만 한 나를 보며 이렇게까지 좋을까 싶은 날들이 있었다. 잠들기 전 다음 날 일기예보를 가장 먼저 챙겨 보고 지도로 달리고 싶은 길을 체크하는 밤들이 있었다.  
 
동네를 달릴 때 마주하는 풍경, 이 풍경을 놓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동네를 달릴 때 마주하는 풍경, 이 풍경을 놓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 김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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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새드(SAD)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지난여름,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했던 말이 있었다. 

"이번 겨울에는 지난번처럼 울적한 마음으로 지내지 않을 거야. 애들 간식에 손도 안 대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에너지 넘치게 살 거야. 우중충한 날씨를 이겨내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지!"

나에게 새드(SAD)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지금, 나의 의지만으로는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고, 해결되지 않을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뇌가 지배하는 나의 육체를 내 의지가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난겨울 몸소 겪은 변화의 이유를 알았으니 이번 겨울은 다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동시에 샘솟았다. 햇살이 온 세상에 쏟아져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여름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제대로 못 했다. 그사이 돌계단 내려가듯 기온이 떨어지더니 두꺼운 구름이 밀려오고, 비가 되어 흩날리는 계절이 왔다.    

말간 해가 얼굴을 보여주면 나는 언제든지 해를 향해 달릴 것이다. 계절이 만드는 두터운 그림자로 내 의지가 꺾이는 날에는 철퍼덕 엎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돌 듯, 나는 해를 향해 달릴 것이다. 
 
햇살이 아깝다며 빨래를 널었는데, 이제 내 몸을 뉘고 싶다.
 햇살이 아깝다며 빨래를 널었는데, 이제 내 몸을 뉘고 싶다.
ⓒ 김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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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태그:#미국, #보스턴, #계절성 우을증, #우을증, #빛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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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에 자리 잡은 엄마, 글쟁이, 전직 마케터. 살고 싶은 세상을 찾아다니다 어디든지 잘 사는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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