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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노동자로 여러 일을 경험했습니다. 편집자와 대리운전을 거쳐 현재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결국 노동조합이냐고요? 일 하는 사람들에게 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기자말]
방송인 출신 현직 정치인인 A씨는 대리기사의 고충을 이해했습니다
 방송인 출신 현직 정치인인 A씨는 대리기사의 고충을 이해했습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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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기사를 하며 만난 유명인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이는 정치인 A씨입니다. 그의 차를 대신 운전한 건 2018년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그는 국회의원은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콜밭' 중 하나인 광화문역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더를 수행하고 나면 대중교통이 끊기는 시간대라 신중하게 콜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도착지가 서울 송파구 잠실의 한 대단지 아파트인 콜이 떴습니다. 순간 '지금 출발해서 도착하면 대중교통이 끊기지 않을까', '대단지라 나오려면 시간 걸릴 텐데' 등 여러 고민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어떤 기사 프로그램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만, 카카오 같은 경우 콜이 떴다 사라지는 시간이 1~2초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워낙 많은 기사가 대기하며 경쟁하기 때문이지요. 더 고민하다 놓치겠다 싶은 생각에 '콜 수락' 버튼을 터치했습니다. '어떻게든 연계가 되겠지'라는 기대감을 품고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경유 요청한 A씨, 똥콜인가 긴장했지만...

통화 후 출발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고객이 지정한 출발지에 도착해서 보니 A씨였습니다. 방송인 출신으로 워낙 대중적으로 유명했기에 한눈에 알아보겠더군요. 화장기가 옅은 걸 제외하면, 겉모습도 방송에서 보던 그대로더군요. 술을 거의 마신거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일행이 더 있었습니다. 일행 두 명을 포함해 총 3명이 차량에 탑승했습니다. 대중교통이 간당간당한 시간대라 경유지가 없길 바랐습니다.

"목적지가 잠실 XX아파트 맞으시죠?"
"네."
"내비게이션 추천 경로로 가겠습니다. 다니시는 길이 있으시면 미리 안내 부탁드립니다."


늘 운행 시작 전 하는 확인 멘트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네. 가다가 두 곳 들렀다 갈게요."

아뿔싸.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습니다. 머릿속이 도착시간과 경로 등을 그려보느라 분주해졌습니다. 경유지도 광화문에서 잠실로 '가는 길'에선 한참 벗어나 있었습니다. 다행히 A씨는 본인이 먼저 "추가요금을 지불하겠다"며 "경유해 줄 수 있냐"고 묻더군요.

대리운전 현장에선 경유 요금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불편하고 피곤한 일이지만, 대리기사에게 있어선 '시간과 돈'이 결부된 중요한 문제이지요. 그래서 선뜻 먼저 추가요금을 내겠다는 A씨의 말에 안도했습니다.

대리기사 고충을 이해하고 배려한 A씨
 
방송인 출신 정치인 A씨는 대리기사를 배려했습니다
 방송인 출신 정치인 A씨는 대리기사를 배려했습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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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가는 내내 일행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로 유튜브 방송 제작과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앞서 A씨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낙선했습니다. 언론을 통해 그의 행보를 알고 있었기에 대화 내용이 흥미롭더군요.

A씨는 정권에 따라 흥망이 교차한 방송인이었습니다. 이후 2018년 전격적으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에 입당하며 정계에 진출했습니다만, 바로 '금배지'를 달진 못했습니다. 일면식도 없지만, 언론에 비친 그를 보며 방송과 권력이 합작한 진영논리 안에서 때로는 수혜를, 때로는 피해를 보며 살았고 그 구조 안에서 생존하고자 발버둥 친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A씨는 방송으로 보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털털했습니다. 특히 돌아가는 길이지만, 일일이 일행을 챙겨 데려다주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본인의 목적지로 곧장 가면 30분 정도면 가는 길이었는데, 지인들의 집을 들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지요.

일행 두 사람을 내려준 후 서둘러 최종 목적지인 잠실로 향했습니다. 둘러 가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돼 도착 후 이동이 걱정됐습니다. 도착지는 대단지로 주차장이 넓기로 소문난 아파트였습니다. 경유하느라 1시간 이상 걸린 데다, 차를 대고 다시 외부로 찾아 나올 생각을 하니 아득했습니다. 주차 후 이동 경로를 생각하며 해당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A씨가 말을 건네더군요.

"기사님, 다른 대리기사님들이 이곳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가면 너무 넓어 나오기가 어렵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기사님만 괜찮으시면 여기서 세워 주세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너무 반가운 말이었지요. 다만, 대리기사는 최종적인 주차까지 완료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래서 망설였더니 그가 거듭 제안하더군요.

"주차장이 넓어 나오려면 오래 걸리실 거예요. 저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어요. 전 괜찮으니, 기사님 편한 대로 하세요."
 

그가 간접 경험을 통해 대리기사의 고충을 공감하고 있고, 대리기사인 필자를 진심으로 배려해 주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의 진짜 속내를 알 순 없습니다. 다만 대리기사로서 노동현장에서 받은 그때의 배려는 잊히지 않습니다.

"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표하고 재빠르게 강남 콜밭을 향해 움직였지요. 사소할 수 있으나 그는 제겐 꿀콜이었습니다.

A씨는 현재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입니다. 대리운전을 하며 노동현장에서 만나는 고객의 정치적 노선이나 입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단 그가 나와 내 노동을 어찌 대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대우엔 인간적인 매너를 포함해 돈과 시간이 관련돼 있지요.

제아무리 진보적 이미지의 셀럽이나 정치인도 '가는 길'이라 우기며 경유 요금을 주지 않거나, 주차장 뺑뺑이를 돌린다면 '진상'으로 기억되지요. 먹고살기 위한 대리운전 노동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의 관계엔 단순히 좌-우로 선 그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A씨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떠하든, 전 A씨를 남의 차를 대신 운전하는 사람의 고충을 공감하고 배려한 정치인으로 기억하게 됐습니다. 대리운전 현장엔 꿀·똥콜은 있어도 좌우는 없습니다.

태그:#대리운전, #꿀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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