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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증의 정치클럽: 여의도 밖 정치 시리즈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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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닉네임 있는데, '어깨꿈'"

명함을 주고받고 박경석 대표가 건넨 말입니다. 어떤 뜻이냐고, 유쾌한 말투에 가볍게 되물었다가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깨질 꿈'. 비장애인이었던 시절 꾸었던 꿈들은 어차피 깨질 것이었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박경석 대표는 스물네 살 때 행글라이더 추락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이후 5년간 집에서만 지내다 죽기 위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러다 보니 살게 됐습니다. 살기 위해 공부하다 보니 야학 교사가 됐고, 가르치다 보니 싸우는 사람이 됐습니다. 어차피 깨진 꿈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박 대표의 싸움은 올해로 22년째입니다. 애증의 정치라는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박 대표일 것입니다. 수없이 실패하고 실망했을 터지만, 정치를 논하며 그가 가장 많이 말한 단어는 '자부심'이었습니다.

10월 25일, 혜화의 전장연 사무실에서 박경석 대표를 만났습니다. 장애인 정치의 현주소와 그가 경험한 정치의 힘에 대해 물었습니다.

낙인과 갈라치기, 정치의 전략

- 지난해 지하철 시위 이후 언론과 시민들의 태도가 변화했다고 느끼시나요?

"지난 22년간 비슷한 방식의 투쟁들이 꽤 많았는데 왜 이제야 큰 이슈가 됐을까요.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이에요. 출근 시간에 타는 건 그동안 저희가 상상도 못 한 일이었거든요. 비장애인들이 출근하는데 감히 거기까지 갈 수 있냐는 거였죠. 올해는 지난해보다 언론 보도는 줄어들었죠. 하지만 보도 빈도보단 언론이 지하철 시위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장애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표피적인 방식으로 다뤄지기 때문이에요.

죄 없는 시민의 발목을 왜 잡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시민은 정말 죄가 없냐고 한다면, 이런 죄는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장애인이 이동하지 못하는 문제를 차별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냥 불쌍한 장애인 조금 도와주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준석 대표가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90%인데 아직도 지하철을 외친다고 말한 거죠.

2001년도에 오이도역에서 리프트 사망 사고가 난 뒤,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이 2004년까지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100%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박원순 시장 때 2022년까지 100% 설치하겠다고 또 약속했고요. 지하철 이동권 문제는 90% 좋아졌다는 것 가지고 생색낼 게 아니에요. 서울시장이 두 번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리고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에 대한 어떠한 애도와 사과도 없었어요.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이 사회가 얼마나 반성했고 일반 시민들은 이 문제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의 측면에선 (시민들이) 공범이라고 생각해요."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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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연의 핵심 의제는 이동권, 노동권, 교육권, 그리고 탈시설입니다. 이 4가지는 왜 중요한가요?

"핵심이 아니라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이동해야지 교육받고, 교육받아야 노동에 참여할 기회가 생기고, 노동하지 못하면 자본주의 용어로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노동 영역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최저임금 적용에서도 제외돼요. 그리고 중증장애인은 시설로 보내지거나,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요. 투자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죠. 투자의 문제는 결론적으로 예산의 문제예요. 국가가 예산을 써서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지 못했어요.

이건 헌법에 명시된 거예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든지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한 게 대한민국 공화국이잖아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사회가 아닌데, 비장애인의 기본권만 따로 있냐고 하면 이젠 목을 날리는 대신 철저하게 배제하죠. 이게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취하고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에요. '이 정도 보살펴 주면 됐지'라는 거죠."

여의도 밖의 자부심

- 오랜 기간 운동에 몸담으면서 느낀 정치와 운동의 차이가 있나요?

"운동도 정치죠. 세상 모든 사람은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보통 정치라고 하면 국회, 여의도 정치를 말하죠. 엄밀하게 말하면 저는 정치가 아닌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여의도 밖 정치를 하는 거예요. 여의도 밖에 있다가 언제든지 여의도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여의도 밖에서만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모순적이라고 봐요. 결국은 정치를 바꿔야 세상이 바뀌는 거잖아요. 여의도 안팎이 긴밀하게 영향력을 주고받아야 일상적 관계가 회복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투표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공약한 거 잘하는지 보고, 억울한 거 있으면 가서 얘기하고, 참사가 생기면 빨리 조치하고 이런 것들이 다 여의도의 정치와 여의도 밖의 시민운동이 잘 소통해야 하는 일이에요."

-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출마 제안을 받았을 땐 고사하셨는데.

"뜻이 있는 개인은 가서 잘하면 좋겠어요. 여의도 안의 정치를 많은 사람이 원하죠. 밖에서 백날 싸워봤자 그 안에서 한번 논의해서 제도를 바꾸는 게 좋다고 해요. 우리 운동도 여의도의 정책을 바꾸는 영향력을 발휘해야 해요. 그러려고 지하철도 타고 집회도 하는 거죠. 하지만 둘을 비교 평가할 건 아니라고 봐요.

물론 (여의도 안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겠지만, 진짜 세상을 제대로 바꾸는 건 대중적 힘이 어떻게 조직되는가의 문제예요. 저는 그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나까지 욕심부리면서 (국회에) 갈 필요 있나 싶어요. 당시엔 대중이 어떻게 목소리 내게 할지 고민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거기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여기 남으려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나라도 남아야지' 했어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보다 싸우는 동지들이 많아졌어요."
 
지난 3월 24일 오전 서울 지하철 시청역 승강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들이 선전전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24일 오전 서울 지하철 시청역 승강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들이 선전전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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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동지들이 늘어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부심이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목소리가 스스로의 힘이 될 수 있다. 장애인이라고 부끄러워하고,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살다가 이게 나의 권리였구나, 나는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왜 구걸하면서 기다렸을까 자각하는 장애인들이 많아졌어요. 그걸 자각하니까 싸울 힘이 생긴 거고요. 싸울 힘이 있어도 구체적으로 조직하고 행동 계획을 같이하지 않으면 또 흩어지는 거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행동 전술이 대중적으로 넓혀진 것도 있고요. 그러니까 또 자신감이 생기는 거죠."

- 시민운동, 그중에서도 유독 장애 운동에 대해 왜 이렇게 정치적으로 주장하느냐는 비판이 있는데요.

"일반 시민들이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비판은 갈라치기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전장연은 정권에 관계없이 싸워왔어요. 김대중부터 문재인까지 5개의 정권을 거쳤지만, 누구도 이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어요. 다만 다루는 방식이 윤석열 정부와는 달랐죠.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됐어도 약속한 대로 내놓을 때까지 지하철을 탔을 거예요. 정권과 관계없이 어떤 놈이든지 다 싸운다, 얼마나 정치적이에요.

정치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정치의 본질적 기능은 공동체 내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파적 이익만 가지고 싸우니까 붕당정치가 된 거죠. 그러니 장애인의 정치가 통할 리가 있나요?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선에 있는 사람에겐 정치가 더 올라가기 위한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싸움이겠죠. 그 선 밑에 있는 사람을 올려주지도 않고 정치적으로 갈라치는 건, 장애인을 정치적 영역의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거예요."

전장연이 모두에게 준 선물

-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해서 뭐가 바뀌냐'며 포기하지만, 전장연은 실제로 변화를 이뤄왔습니다. 그 성과를 자랑해 주신다면요?

"활동 지원 서비스가 만들어졌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겼죠. 저상버스 도입이 그래도 서울은 50% 가까이 되고요. 22년 전의 예산과 지금의 예산을 보면 많이 변했어요. 운동으로 변했든 다른 걸로 변했든 간에,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 의지를 확인하고, 비장애인 사회에 그것을 선전했어요. 그러면서 굉장히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해왔어요. 22년간 지하철로만 내려간 건 아니에요. 토론회 하라 그러면 토론회하고, 친절하게 하라 그러면 친절하게 했죠. 제도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유튜브 구독, 좋아요도 해달라고 하고요.

그보다 자랑하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노들야학 학생이 왜 투쟁해야 되냐고 저에게 묻더라고요. 자기는 그보단 직장에 가고 싶다고요. 그런데 이 학생은 초등학교 공부도 모르고, 뇌병변 중증 장애라 제품을 만든다거나 하는 생산적인 일이 불가능해요. 밥 먹고 똥 누고 돌아다니는 모든 생활에 활동 지원 서비스가 필요한데, 이 세상의 기준으로 무슨 취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사장이라도 고용했다가는 골치 아플 거예요. 이런 기준이 있는 사회에서 그 꿈을 꾸길래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죠.

우리가 싸워서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도 만들고, 저상버스도 만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따지면 번 돈이 3~4조가 넘더라. 우리가 그 돈을 22년을 싸워서 만들었다. 단지 내 주머니에 안 들어왔을 뿐이지. 그럼 우리가 선물로 준 거 아냐! 우리가 싸워서 이 세상에 준 선물이 얼마냐, 이게 더 자랑스럽지 않니?

그랬더니 혹해서 돈 한 푼도 못 받으면서 자랑스럽다고 해요. 저는 (그 학생을) 그렇게 꼬신 게 자랑스러워요. 배우지 못해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이 사회에 선물을 주는 투쟁인지. 이 투쟁은 비장애인에게 주는 선물이었어요. 이 선물을 만드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우리가 주는 건 선물입니다. 나중에 늙으면 다 깨달을 거예요."

- 대표님도 그런 자부심을 기반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 거죠.

"'어차피 깨진 꿈'인데요. 비장애인으로 살면서 소외된 사람들, 나랑 관계없던 사람들을 몰랐을 때 이 체제가 가르쳐준 꿈을 꿨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했고, 건강하려고 했고, 군대도 지원해서 대한민국의 건전한 남성으로 다른 이들을 깔보면서 살려고 했어요. 그런 꿈이 빨리 깨진 게 다행이죠. 또 다른 삶의 꿈을 꿀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 얼마나 좋아요. 보통 사람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돼서 비장애인의 꿈을 못 꾼 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치료받아서 비장애인이 될 꿈도 없고 비장애인이 경쟁하는 방식의 꿈을 가지고 싶지도 않아요."
 
‘모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전장연의 지하철행동 지지 기자회견’이 지난 1월 19일 오전 서울 4호선 혜화역에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빈곤사회연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모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전장연의 지하철행동 지지 기자회견’이 지난 1월 19일 오전 서울 4호선 혜화역에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빈곤사회연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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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전장연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갑자기 윤석열 대통령이 반성을 해버렸잖아요. 저는 그 반성을 믿는 사람이에요. 꼭 반성시켜야겠다고 생각해요. 믿든 믿지 않든. 결국은 반성을 시키는 것도 우리의 힘인 거죠. 그게 국민 주권이고 정치잖아요. 구체적으로 반성시킬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이것이 반성이라고 이야기하는 투쟁이 필요해요(17일 윤 대통령은 국민통합위원회 김한길 위원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국민통합위원회의 활동과 정책 제언들은 저한테도 많은 통찰을 줬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정책 집행으로 이어졌는지는 저와 우리 내각에서 돌이켜보고 반성도 많이 하겠다"고 밝혔다. - 편집자 주).

그래서 진짜 반성하면 3374억 원의 예산을 내년도에 반영하라고 할 거예요. (전장연이 주장해 온 장애인 권리 예산) 1조 3천억이 터무니없다고 하니까, 3374억을 11월 20일까지 기획재정부 장관이 약속해라. 그중 3350억은 이동권과 관련된 예산인데요. 특별교통수단이라는 광역 이동을 지원하는 내용이에요. 지금은 하루 8시간밖에 운영하지 않아 대기 시간도 길고, 지역 이동도 불가능해요. 그래서 차량당 기사를 2명 배정해서 16시간 운행하라고 요구했어요. 그 돈을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해요. 지방에 떠넘기지 말고요. 지방에 떠넘기면 돈이 없다고 안 해요. 그리고 동료지원가 사업 24억 복원을 합쳐서 3374억이에요.

그래서 25일 김한길 위원장한테 쫓아갔어요. 윤석열 대통령이 김한길의 통합위원회에서 내놓은 정책 제언이 옳았다면서 반성하겠다고 했잖아요. 통합위원회가 지난 1월 내놓은 정책 제언 중 '모두를 위한 이동의 자유' 의제의 첫 번째 과제가 특별교통수단 개선이에요. 그럼 그거라도 해야죠."

"애정의 정치를 하시죠"

- 어떻게 정치에 대한 희망을 붙들고 계시나요?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희망은 만들어 가는 사람의 몫이지 주어진 것이 아니잖아요. 조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기반인데, 열심히 해봤자 별로 한 것 같지도 않고, 세월은 가니 지쳐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애증과 환멸을 느낀다는 건 집착이 있고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럼 포기하지 말아야죠. 포기 또한 정치더라고요. 사람은 관계를 만들고, 관계의 흐름에서 변화가 가능한 영역이 정치에요. 비구니가 되고 산에 가서 풀 하나를 얻어먹어도 관계가 영향을 미치잖아요. 근데 관계없이 나는 평온하게 가겠다는 것도 크게 보면 정치죠."

-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에게 나의 싸움을 이해시켜야 하는 과정이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잖아요.

"미워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더라고요. 욕은 많이 하죠. 근데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정치를 포기하거나 희망을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 그들한테 더 큰 선물을 줄 준비를 해야죠. 갑자기 나처럼 쫄딱 망해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늙으면 누구나 다 요양원으로 가게 될 거고, 무능력하다고 할 거고 노동 생산력이 없어지잖아요.

억울할 때는 그냥 빨리 저기 오락실 가서 샌드백 치면서 풀고, 그러고 나서 그들한테 어떤 더 좋은 선물을 줄까 생각해야 해요. 애정의 정치를 하시죠."

덧붙이는 글 | 뉴스레터 서비스 '애증의 정치클럽'에서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웹사이트를 참조해주세요: https://lovehateclub.com


태그:#박경석, #전장연, #애증의정치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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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당신을 위한 품위있는 정치이야기" 미우나 고우나 정치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정치 보는 힘을 기르는 곳, <애증의 정치클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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