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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학년 여자 반 담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담임 배정을 받고 새로운 아이들의 명단과 사진을 입수하고 그 아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느닷없이 제가 바람둥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것이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제 마음의 성채를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던 아이들이 새 주인을 만나자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제게 이렇듯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옵니다. 가끔 낡은 교무수첩에서 만나는 옛 아이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보다도 지금 현실 속의 아이들과 나누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이 제겐 더 뜨겁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단 일각도 과거로 회귀하여 추억을 더듬을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담임배정이 끝난 뒤의 교무실 풍경은 흡사 시장 속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교무실 통로 사이를 오가며 새로 정해진 자리로 개인 사물을 옮기다보면 북새통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전담임을 찾아가 새로 맡게 될 아이들에 대해 정보를 캐내어 귀담아듣는 부지런한 교사들도 눈에 띕니다. 그런데 그때 전임 담임과 후임 담임 사이에게 오고 가는 대화가 듣기에 민망스러울 때도 더러 있습니다.

"요 녀석은 내가 정리를 했어야하는 건데. 김 선생, 고생 좀 하겠는데."
"학급 전체분위기를 생각해서라도 상황 봐서 정리하죠, 뭐."

가만 보면 정보를 제공하는 쪽이나 제공받는 쪽이나 무슨 악의 같은 것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반 아이들을 끔찍하게 챙겨주는 분들도 그런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습관처럼 입에 붙은 이 무렵의 인사말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새 담임 교사가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아이를 과거 자신의 경험만으로 부정적인 선입관을 심어주는 것은, 그것이 동료교사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곱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 흔히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학급 전체의 분위기를 위한다는 말도 어딘지 수상쩍어 보입니다.

종호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개학 첫날부터 결석을 하더니 일 주일 내내 소식이 없었습니다. 입학원서에 나와 있는 전화 번호도 불통이고 해서 속수무책으로 날짜만을 버리고 있던 어느 날 더벅머리에 사복 차림을 한 그가 교무실에 들어섰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눌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자퇴원서 쓰러 왔는데요."

그 말에 교무실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눈길에는 하나같이 어떤 반감 같은 것이 묻어 있었습니다. 더벅머리에 사복 차림으로 찾아와서는 느닷없이 자퇴 운운했으니 그럴 법도 한 일입니다. 학생으로서 버릇없고 예의가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견 불량기가 있어 보이는 그의 인상이 더욱 그런 생각을 부채질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아이는 더벅머리로 인해 덥수룩해 보여서 그렇지 어딘지 순박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퇴원서를 쓰러 왔다는 그의 말투도 나쁘게만 해석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무슨 생각을 하다 말고 문득 그가 우리 반 종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네 이름이 종호 아니냐?"
"저, 김종호 맞는데요."
"그래? 내가 네 담임이다."
"아, 안녕하세요?"

이런 대화가 오고가자 교무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자퇴 사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걱정할 것 같아서 자퇴원서를 쓰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넌 참 예의가 바른 아이구나. 학교를 그만둘 것이라면 그냥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될텐데 일부러 자퇴원을 내려고 학교까지 올라오다니. 너처럼 예의 바르고 훌륭한 아이를 학교를 그만두게 할 순 없다."

종호의 아버지는 직업상 자주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관광기사였습니다. 어머니마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시자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사람 좋은 새엄마와 정이 들기까지는 낯선 집보다는 어두운 밤거리가 더 다정한 공간이었습니다. 가출한 지 약 한 달만에 집에 와보니 집엔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계약기간이 완료되어 집을 비워주어야 했던 그의 부친으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종호에게는 그 일이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종호는 3일 동안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학교를 다니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런데 그 3일 동안 저는 종호를 설득하는 것 말고도 학교의 윗분들과 동료교사를 또한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분들의 논리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개학 일주일이 넘어서야 머리도 깍지 않고 교복도 입지 않은 채 나타나서 자퇴원서를 쓰러온 아이는 뻔하지 않느냐. 그리고 첫인상이 너무 좋지 않다. 거기에 가정도 문제가 있는 아이가 아니냐. 지금은 담임의 말에 감동하여 며칠 잘 다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학교를 그만둘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학급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이 하나 구제하려다가 반 전체 아이들을 망칠 수도 있다.

종호는 그러한 선생님들의 우려를 말끔히 뒤집고 단 한 차례도 결석이나 지각을 기록하지 않은 채 학교 생활에 성실하다가 다음 해 3학년이 되어 조기 취업을 하여 학교를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졸업식을 하던 날 제 책상에는 작은 선물 꾸러미와 편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가 준 편지와 제가 그에게 준 생일 축하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가 제게 준 편지의 한 대목과 제가 그에게 써준 시의 한 구절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를 믿어주신 분은 이 세상에 선생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배신하는 것은 저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아이였지. 나도 너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단다.'

저는 지금도 그의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합니다. 만약 그날 제가 어떤 그릇된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그를 대했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의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흙 속에 그대로 처박아 두었다면 말입니다.

교사의 직업을 보석 찾기로 비유한 외국 시인이 있습니다. 저는 올해도 보석 찾기를 해볼 생각입니다. 아니, 아이들 가슴 깊이 숨겨진 것들을 스스로 찾아내게 하여 그 휘황한 광채에 황홀해하는 모습을 꼭 보고야 말겠습니다. 마치 바람난 사람처럼 열정에 휘둘려 아름다운 보석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즈음에 제게 메일 편지를 보내온 한 아이처럼 미완성이어서 더 눈부신 보석도 눈에 띄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아이 편지 어디쯤에서 광채가 뿜어지고 있는지, 사람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한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편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편지

이제껏 선생님들과 정을 별로 붙여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기억 속에는 선생님들과의 기억이 별로 없어요.. 매일 혼난 거는 빼고..하지만 이제 제 기억 속에 간직해둘 소중한 분이 생겼어요..그분은 참 행복하실 것 같아요..전 누가 절 기억해 주는 게.. 절 소중하게 생각해 준다는 게 참 고맙고 행복하거든요..^^

선생님..이제 이런 말 해봤자..소용없다는 것 알지만..참 죄송해요..속으로는 좋은 선생님 만났으니 이제 정말 잘해 보자. 항상 이런 맘은 갖고 있었어요..근데 그게 잘 안 되었던 거 같아요.. 제가 노력을 하지 않은 거죠. 정말 이렇게 후회해보긴 첨인 거 같아요..봄방학 하기 몇 일 전..선생님이 자꾸 헤어진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거 같아서 그때마다 속이 좋지 않았어요..선생님은 저희를 한 사람 한 사람 더 보시려고 이리저리 쳐다보시며 활짝 웃으셨는데...

마냥 철없는 우리는 그저 놀기에 바빠서..정말로 죄송해요..1년간 저희에게 아픈 모습 보이지 않으시고..꿋꿋하게 저희 곁에 있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공부 못해도 말썽 피워도 사고 치고 다녀도 항상 정직해야 된다고 언제 한번 말씀하신 말 귀담아 들었어요..저도 그 말대로 이제부터라도 정말 정직해 보려구 해요..노력해도 안 된다는 생각 많이 했지만..이제 노력하면 뭐든지 된다는 생각으로 2학년 때부터 정말 열심히 해보려구요..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저 공부도 열심히 하구요..무용도 더 열심히 해서..늦게 시작한 만큼..정말로 잘해서..좋은 대학가려구요.. 담임 선생님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안준철 선생님하고는 안 헤어질 거예요..저 졸업할 때까지는 선생님께서 제 맘속을 맡아주는 맘속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항상 제 이야기 들어주시고 절 이해해주신 선생님..
비밀 이야기할 때는 친구 같고..옆에 있을 때는 아빠 같고..좋은 말씀해주실 때는 선생님이 되어주신 분이세요...그래서 그런 선생님을 진심으로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해요..
선생님~!!*^^*♡♡♡♡♡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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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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