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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이면 개학입니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마음에는 늘 설레임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개학을 며칠 앞두고 산을 찾는 오랜 습관이 있습니다. 큰 일을 앞에 두고 목욕재계를 하던 옛 선인들을 흉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겐 그만큼 아이들과의 첫만남이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산에 다녀온 다음 날은 새벽같이 일어나 담임 반 아이들에게 전해줄 시와 편지를 준비합니다. 학부형님들에게 드릴 편지도 따로 준비합니다. 어제 그 일을 모두 끝냈습니다. 준비 끝입니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설레임일 뿐 두려움은 아닙니다.


<시와 편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산길 잘 못 들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골마저 흔적이 없어진
묵은 낙엽길 헤쳐가다가
나는 보았네

손톱 만한 도토리들
낙엽더미 속에서
노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을
갈참나무가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더러는 실패하여
뿌리 내리지 못해도
편안한 얼굴로
거름이 되어
산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을

영락없는
노란 콩나물 대가리
고 작은 생명들이
낙엽더미 아래서
애 쓰는 모습
애쓰다가 숨진 모습

내겐 모든 것이 다
신기하고 아름다웠네.
-시, '낙엽더미 아래서'

해마다 해오던 일이지만 개학을 며칠 앞두고 산을 찾았단다. 너희들을 만나는 새로운 일을 앞에 두고 무언가 마음을 다지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연을 닮은 가슴 큰 사람이 되어 너희들은 만나고 싶었을까.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늘 편하게 가던 길을 버리고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여 산을 올랐구나. 그러다가 보게 된 거지. 갈참나무에서 떨어진 수많은 도토리들이 낙엽더미에 파묻혀 노란 싹을 내고 있는 그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아무도 없는 침묵의 산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단다. 누군가 그랬지.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라고. 한 해 동안 나는 무엇보다도 너희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고 싶구나. 한 그루의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애쓰다가 때로는 실패해도 그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넉넉한 모습을.

세상에는 주연도 있지만 조연도 있지. 물론 단역도 있기 마련이고. 어느 것이 내 것이 되든 그 역에 충실한 사람이 크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그럼 오늘 편지는 여기서 줄이마. 안녕!

2002년 3월 2일
너희들과의 만남이 정말 즐거운 담임 선생님이


학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안녕하십니까?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습니다. 아직 완연한 봄이 아닐지라도, 봄은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하는 저희 교사들에게는 언제나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그런 계절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도 약속을 했듯이, 학생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런 저런 조건들로 비교하거나 편애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으로 대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학부모님께서도 자녀님을 형제들이나 이웃 아이들과 비교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자녀와 자주 대화를 나누시고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귀담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담임인 저와도 자주 대화를 가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법은 전화를 사용하셔도 좋고, 간단하게 편지(전자메일도 좋습니다)를 적어주셔도 좋고, 직접 학교에 찾아오시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조차 쑥스럽지만 학교에 오실 때는 아무런 부담을 갖지 마시고 오셨으면 합니다.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번거로움이 없도록 꼭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지만 그 자람이 바르고 풍성하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적절한 간섭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나친 간섭보다는 기다려주는 여유와 자녀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겠지요. 우리 어른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어주어도 자녀들은 그로 인해 적지 않은 힘과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무조건 통제하거나 이유 없이 자유를 막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담임으로서 편한 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학창시절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배우고 체득하는 기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남의 자유도 인정할 수 있는 시민정신을 기를 수 있도록 지도할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준법정신을 기르고 건강한 생활태도를 갖도록 하려고 합니다. 본교는 여학생의 경우 지나치게 짧고 꽉 쪼이는 치마나 머리에 무스를 바른다든지 하는 것은 학교에서 규칙상 금하고 있으며, 학교에서의 휴대폰 사용도 역시 금하고 있음으로 휴대폰을 새로 구입하거나, 휴대폰을 학교에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지도해주셨으면 합니다.

끝으로, 아이들에게는 성적 말고도 학창을 통해 배우고 성취해야할 것이 많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실 것을 외람되이 강조 말씀드리면서 오늘은 이만 줄일까 합니다.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2002년 3월 2일
관광경영과 3학년 2반 담임 교사 안준철 드림


어제 저는 학교로 가서 첫 수업 준비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중국인 철학자가 쓴 <참 소중한 생명(아이필드 출판사)>이란 책에서 그럴듯하고 흥미있는 글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한 소녀가 태어나기 전에 즉, '내'가 있기도 전에 '나'는 두 번이나 생명의 위험을 겪었다고 말했다. 한 번은 '내' 외할머니가 전쟁통에 총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옷보따리가 아닌 '내' 외할머니를 맞추었더라면? 외할머니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내' 어머니조차 없었을 테니! '나'와 '내 엄마' 내 외할머니' 모두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위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가 '오빠'를 임신했을 때였다. 불행하게도 유산이 되는 바람에 '오빠'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고, 그 대신 '내'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오빠가 죽지 않고 태어나고 엄마가 다시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 때의 아이는 '내'가 아닐 것이다.

두 소녀의 공통된 결론은 '지금까지 살아 있기가 진짜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생명은 행운이며, 나아가서는 하나의 기적이다.-

이 글이 제 눈에 확 띈 것은 요즘 아이들이 갈수록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면서도 정작 자기 생명에 대한 소중함은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줄곧 해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이 하나의 기적이라고 믿는다면 생에 대한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과목이 영어라 첫 수업을 위해 팝송도 한 곡 준비를 했습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영웅(hero)입니다. 자기 밖에서 영웅을 찾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안에 영웅이 있음을 말해주는 감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이 곡을 택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한 가사의 일부입니다.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영웅이 있지요
현재의 자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 내면을 보면 거기에 대답이 있지요
그러면 당신의 슬픔이 녹아 사라질 것입니다
살아나갈 힘을 주는 영웅이 그대 안에 있지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희망이 사라졌다고 느껴질 때 자신을 들여다보고 힘을 내세요
그러면 자신이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첫수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부의 방향을 말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고민해 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방향을 알고 그곳으로 가야할 이유를 알게 되면 열정과 가속이 붙기 마련입니다. 아이들 내부에 그런 힘이 없는데 밖에서 속도 전쟁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망의 봄!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참된 시작을 위해 준비하는 마음에는 설레임이 있을 뿐 두려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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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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