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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변 절벽에 피어나기 시작한 돌단풍. 동강할미꽃과 함께 동강을 지키고 있다.
ⓒ 강기희

강원도 정선 지방에도 봄꽃이 활짝 피었다. 어느 곳에선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목련과 개나리가 눈부시게 피어났다. 긴 봄추위를 견딘 꽃들은 짧은 생애를 맘껏 발산하고 있었다. 고삐풀린 봄 날씨는 진달래와 벚꽃까지 피워냈다.

여린 소녀의 젖봉우리 같던 진달래와 벚꽃 망울이 문을 열던 지난 주말(14일) 정선 동강을 찾았다. 걸치고 간 외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은 좋았다. 수줍게 꽃망울을 여는 꽃들의 환희는 여행자의 기분까지 들뜨게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제장마을과 연포마을. 두 마을은 동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정선 동강으로 가려면 42번 국도 광하교에서 6번 군도로 갈아타야 한다. 동강변에 있는 정선 귤암리 길은 여전히 꽃 잔치 중이다. 동강변에만 자생하고 있는 동강할미꽃의 아름다운 몸짓도 그대로였다. 이번 주가 지나면 동강할미꽃은 내년을 기약하며 꽃을 하나 둘 떨어낸다.

동강할미꽃을 대신해 동강 지킬 돌단풍을 만나다

▲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동강할미꽃. 인간들은 죽어가는 동강을 살려내라.
ⓒ 강기희
지금 동강변엔 동강할미꽃을 대신해 바위나리가 한창 피어나고 있다. 좁쌀꽃 같은 바위나리는 몇 해 전 '돌단풍'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얻었다. 피어나는 잎이 단풍나무 잎과 닮아 있어 사람들은 바위나리를 돌단풍이라 명했다.

바위나리는 이 지역 사람들의 입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름이었다. 바위에 피는 나리꽃이라는 뜻이었고, '바우나리" 또는 '방구나리'라고도 했다. 바위나리는 꽃 피는 기간이 제법 길어 여름의 문턱까지 간다.

어릴 적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바위나리는 군것질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강변의 바위틈에 살고 있는 바위나리의 뿌리를 캐 껍질을 까면 훌륭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씹으면 아삭아삭한 게 먹는 맛도 제법 있었다. 30년이 훨씬 넘었으니 오래 전의 일이다. 요즘 아이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다.

귤암리에서 소로 밭갈이를 하는 농부를 만났다. 소는 암소였고 작년에 이어 올해 두번째 밭 가는 일을 하고 있단다. 하루 500여 평의 밭을 가는 소는 수태 중이었다. 다음 달엔 새끼를 낳을 거라고 주인이 말했다.

귤암리를 지나 동강 마을인 가수리 운치리 덕천리 제장마을과 연포마을까지의 암벽엔 바위나리꽃이 가득했다. 정선지역에선 '뼝때'라고 하는 암벽은 석회암층이라 다른 지역의 암벽과 달리 이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식물들이 많다.

동강변에 낮게 깔린 버드나무에 핀 연초록 새순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다. 봄기운 가득한 강변을 끼고 달린다. 속도는 최대한 줄인다. 물빛은 흐리다. 호사비오리나 원앙은 자취를 감추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물빛 좋은 시절엔 동강에서 물고기 노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관찰할 수 있었으나 이젠 먼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싯누런 물빛을 애써 모른척하며 동강을 따라간다. 운치리를 지나다 나리소에서 가던 길 잠시 멈춘다.

나리소는 동강이 굽이치면서 만들어낸 비경이다. 산을 넘지 못한 강은 산자락 끝에다 멋진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나리소는 여행자가 서 있는 언덕이나 백운산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물빛은 나리소라고 예외는 아니다.

동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세상 시름 덧없다

▲ 정선 동강변에서 밭갈이 하는 농부를 만났다.
ⓒ 강기희
몇 해 전만 해도 나리소의 물빛은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곳이지만 이젠 굽이치는 풍경만으로 족해야 한다. 나리소를 내려다보는 곳에서 활짝 핀 복사꽃을 만났다. 정선 지역에서 '개복숭아' 또는 '개복쌍'이라고 부르는 산복숭아의 꽃 빛이 유난히 짙다.

나리소를 지나 제장마을로 간다. 제장마을은 동강변에서 숨겨진 마을이다. 나리소를 휘돌아 나온 물길이 또 한 굽이 치는 곳에 있는 제장마을은 몇 해 전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룻배로 건너다녔다.

비가 조금이라도 내려 강물이 불으면 제장마을은 육지 속의 섬이었다. 옛날엔 백운산을 넘어 평창군 미탄면으로 가기도 했지만 요즘엔 다리가 놓여 많이 가까워졌다. 비록 다리가 놓였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제장마을은 은둔의 마을이다.

도로를 따라가다 속도를 조금이라도 높이면 제장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놓치고 만다. 제장마을로 들어서면 집 몇 채가 보인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 아담한 펜션도 있다. 휴대폰은 아예 먹통이다. 복잡한 세상 등지고 며칠 쉬기엔 그만인 곳이다.

한밤 중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부른다 해도 다음날 오후에나 도착할 정도로 ,제장마을은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제장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은 물소리와 바람소리뿐이다. 굽이치는 동강은 아름다운 모래톱과 자갈톱을 만들어 놓았다. 그 선이 하도 고와서 걸음 하기도 미안하다.

어느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한 '복실이네집'은 마을 끝에 있었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동강과 뼝때가 한 눈에 보이는 복실이네집 마당 가에도 봄이 풀어져 있다. 중국의 계림보다도 아름답다는 제장마을에 서면 아등바등 살아야 했던 삶이 우스워지고 세상 시름이 덧없다.

느껴지는 바람을 따라 동강변으로 나가본다. 주말이지만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학생인 듯한 아이들 둘을 만났다. 족대를 메고 강으로 나간 아이들은 잠시 후 탁한 물을 첨벙거렸다. 물고기인들 이런 물을 견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물빛은 어두웠다.

▲ 정선 동강의 비경인 나리소. 사람의 접근을 거부한다.
ⓒ 강기희
10여 년 전 제장마을에서 하룻밤 묵은 적 있었다. 여름이었고 잠자리는 강변의 자갈 위였다. 밤하늘엔 별빛이 쏟아졌다. 맑은 하늘에 피어난 별들은 금방이라도 눈두덩에 떨어질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별빛이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강변에 나가면 물빛은 싱그러웠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무릎까지 담그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가에 핀 물안개는 굽이치는 절벽을 거슬러 올라갔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럴 땐 감탄사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극치감을 여행자는 10여 년 전 정선 동강의 제장마을에서 맛보았다. 그 이후 세상의 모든 풍경이 시시해졌음은 물론이다.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몇 시간을 달려가 보았지만 허무만 느끼고 돌아왔다.

제장마을을 나와 연포마을로 갔다. 연포마을은 제장마을이 만들어낸 동강의 물굽이가 돌아치면서 만들어낸 마을이다. 강을 따라 연포마을로 가기엔 물길이 너무 험하다. 갔던 길을 되짚어 나와 6번 군도를 따라간다. 학생 수 서너 명이 고작인 고성분교를 지나면 연포마을 가는 길이 나타난다.

동강댐 반대 운동할 땐 걸어서 넘던 물레재

▲ 정선 제장마을에서 만난 동강. 물길이 휘돌아 치는 곳에 연포마을이 있다.
ⓒ 강기희
연포마을로 가는 길은 소로길이다. 주변으로는 집 몇 채가 비탈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고 있다. 밭을 지나는데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른 봄 시골에서만 맡을 수 있는 봄의 냄새다. 거름 냄새는 마을을 지날 때까지 따라온다. 마을버스의 종착지를 지나면 물레재가 나온다.

연포마을을 가려면 물레재를 넘어야 한다. 옛날 대홍수가 났는데 고갯마루에 물레 하나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람들은 고개를 물레재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개의 높이를 짐작해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예전 동감댐 건설로 시끄러울 때 사람들은 동강 탐사에 나섰고 차를 세워두고 물레재를 걸어서 넘었다. 왕복 삼십 리가 넘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동강의 아름다운 비경을 구경하기 위해 먼 길을 걷는 것도 마다지 않았다.

사람들은 걸으면서 산자락에 핀 들꽃을 공부했으며 산도라지 꽃을 처음 본다는 사람들은 그 꽃을 사진에 담기에 바빴다. 여름이 되면 뽕나무 열매인 오디와 산딸기도 따 먹었다. 요즘엔 걸어서 물레재를 넘는 이들은 없다.

물레재를 넘어 연포마을로 가려면 줄배를 타야 했지만, 동강댐 백지화 이후 제장마을처럼 연포마을에도 작은 다리가 놓였다. 배에 몸을 싣고 강을 건너던 지난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여행자만의 생각일까. 줄배를 기다리는 동안 강가에 앉아 정선아라리 한 곡조 뽑던 지난날이 추억으로만 남았다.

당시 여행자는 동강 생태 기행의 안내자로 동강을 자주 찾았다. 갔던 길을 몇 번이고 걸으면서 동강의 아름다움과 동강에 얽힌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그들은 하나같이 동강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동강댐 건설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전 국민이 반대하자 정부는 결국 댐 건설을 포기했다. 그때의 일은 국민이 나선 환경운동사에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동강은 전 국민이 나선 덕분에 두 동강으로 갈라지지 않았다.

황쏘가리, 어름치, 쉬리, 꺽지... 그러나 산란도 힘들다

▲ 연포마을에서 바라본 동강변. 정선 동강에 가면 어딜가나 저런 풍경이다.
ⓒ 강기희
그렇게 전 국민이 발벗고 나서 살려놓은 동강이 요즘 죽어가고 있다.

이제 곧 산란철이다. 동강엔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와 어름치, 그리고 아름다운 비늘을 자랑하는 쉬리와 꺽지 등 수십 종의 물고기가 살아간다. 동강은 물고기들의 낙원이었다. 그러나 올봄 이들의 산란은 어렵다.

강바닥에 깔린 뻘은 산란 터를 제공하지 못하고 물고기들의 먹이인 수서곤충은 멸종 직전에 있다. 또 누런 황토 빛 물은 햇볕을 차단해 물고기들의 산란을 방해한다. 알을 놓는다 해도 살아날 수 없는 게 요즘의 동강이다. 산란철을 맞은 동강은 죽음의 강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연포마을로 들어섰다. 몇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연포마을은 제장마을과 비슷한 형태의 마을이다. 강이 마을을 휘돌아 감고 강변으로는 백여 미터가 넘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강변에 서면 고개를 꺾는다 해도 그 끝을 보기 힘들다.

강변으로 나갔다. 강변의 모래톱은 곱기만 했다. 강변엔 그물을 놓는 어부의 배가 단단한 밧줄에 묶여있다. 배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강물은 선뜻 손을 내밀기도 싫을 정도로 탁했다.

죽어가는 동강의 신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물고기들의 숨 가뿐 비명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힘차게 물살을 가로지르던 쉬리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강물을 떠 밥을 지었던 오래전의 기억은 절대로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동강은 죽어가고 있었다.

연포마을, 뗏꾼들 기다리던 주막은 사라지고...

▲ 연포마을에서 바라본 동강. 어부의 배가 할 일이 없다는 듯 한가롭다.
ⓒ 강기희
연포마을엔 폐교인 연포분교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마라도 분교 다음으로 아름다운 곳에 있는 학교였다. 강변에 있는 학교로서 연포분교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학교는 없다. 학교는 몇 해 전 폐교 되었으며 안내판엔 30년간 16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적혀있다.

연포분교는 영화 <선생 김봉두>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두 칸뿐인 폐교가 영화의 무대였다. 아직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학교는 관리가 되지 않아 쓸쓸하다. 운동장도 예전에 비해 손상되었고 교문의 위치도 바뀌었다. 떨어진 문짝에서 깨어진 유리창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학교의 관사는 절반쯤 뜯어진 상태이고 남은 건물은 교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동강 기행을 하며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출출했다. 딱히 먹을 곳이 없었던 탓이었다. 연포분교 뒤편에 자리 잡은 연포상회로 갔다. 마을에서 유일한 구멍가게는 옛날 전방 수준이었다.

오래전 연포상회에서 닭백숙을 먹은 기억이 있는데 닭이 얼마나 큰지 3시간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 닭이 삶아질 때까지 기다리며 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깨다 했었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먹을 것이라곤 음료수와 라면 맥주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라면 하나를 끓여달라고 부탁했다.

여주인이 라면이 끓이는 사이 남편은 구멍 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흔든다.

"강물이 노랗게 변했는데 고기가 살아나겠어요. 이제 동강은 다 죽었어요."

연포상회집 남편의 말에 동강을 바라보았더니 강물은 흙탕물 수준을 넘어 노란빛으로 보였다. 구멍 뚫린 그물을 손질하는 남편의 손길이 더딘 이유가 오염된 동강에 있었구나 싶었다. 그 사이 라면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겁지겁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오후 5시가 되고 있었다.

주막집, 이젠 라면 끓여주는 일로 먹고살아

▲ 정선 동강변에 자리잡은 연포분교. 절벽과 학교 사이로 동강이 흐른다.
ⓒ 강기희
아우라지에서 출발한 뗏목이 한양으로 가던 시절 연포상회는 주막집이었다. 물살 거칠기로 유명한 황새여울 된꼬까리를 넘으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고 강단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술추렴은 기본이었다. 뗏꾼들은 황새여울과 된꼬까리만 지나면 힘든 고비 다 넘겼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삶의 고비를 연포상회에서 결정지어야 했다.

연포상회는 차라리 그 시절이 좋았다. 늘 사람으로 붐볐던 주막집이 이젠 여행객을 상대로 라면이나 끓여주는 일로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거친 사내들과 술잔 주고받으며 정선아라리 흥얼거리던 주막집 여주인의 삶 또한 오래 전에 동강을 따라 흘러가버렸다.

벼루에 담아 놓은 물같이 검고 깊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포마을의 지명은 이제 황포마을로 바꿔야 할 정도로 물빛이 변했다. 동강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지만 물빛은 예전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연포마을을 떠나 다시 물레재로 올랐다. 산 중턱에 피어있는 진분홍색 진달래꽃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는데 강물은 날이 갈수록 변해만 갔다. 걸어서 넘던 물레재를 승용차로 편하게 넘기는 하지만 죽어가는 동강의 고통에 찬 신음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나만의 여행지>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여행, #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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