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가한 가을 오후입니다.
 한가한 가을 오후입니다.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저녁 반주로 오디술을 한 잔씩 마셨다. 작은 유리잔에 술을 따라 놓고 건배를 했다.

아부지요, 오래 오래 사시이소오.”
“오래 살아가 뭐 하겠노? 마침맞게(마춤맞게) 살아야지.”


아버지는 술잔을 입에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산뽕나무 열매로 담은 오디술은 색이 불그스름한 게 고왔다. 술을 앞에 두고 또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말할 사람도 없이 혼자 외롭게 지내시던 아버지는 말동무가 생기자 신이 나신 모양이었다. 틈만 나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한 잔 술에 이야기꽃은 피고

“내가 술을 못 묵어서 안 묵은 게 아이라 일부러 안 묵었던 기라. 나는 술이 맛이 없더라꼬. 일부러 마시면 한 꼬뿌 정도 마셔도 암치도 않았는데 술이 맛이 없어서 안 묵었던 기라. 그래 안 마셔 버릇 했더이만 안 묵게 되데.

그런데 내가 딱 두 번 대취했던 적이 있었디라. 두 번 다 군에 있을 땐데 술 먹고 속에꺼 다 올리내고 보이까 다음 날 어떻키나 속이 안 좋던지, 그 이후로 술을 안 마셨지.”


아버지는 먼 옛날, 핫바지 입고 땡양달(햇살이 따가운) 길을 걸어서 군대에 입대하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났던 그 해 8월 초순에 군에 입대했다. 집에 나이로 21살, 만 나이로 20살이던 1950년 8월 초순에 아버지는 집을 떠나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밥 한 번 배불리 못 먹고 살았던 곤궁했던 그 시절, 국민학교를 마친 사람도 별로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나이만 먹었지 세상 물정에는 눈이 어두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청도 우리집에서 경산까지 70리도 더 되는 길을 걸어서 갔다 하였다. 중의 적삼에 핫바지를 입은 차림 그대로 경산 모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고 한다. 근 팔백 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던 운동장은 먼지가 자욱하더란다.

아버지는 운이 좋아서 미군부대에 배치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화려한 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매끼 고기로 배를 채우게 되었으니 군생활 반 년도 안 되어서 키도 크고 장골이 되어 버리더란다.

그 당시 우리 한국 군대는 부정과 부패가 심해서 군인들이 늘 배를 곯았단다. 위에서 이리 떼먹고 저리 잘라 먹어서 정작 군인들은 먹을 게 없고 입을 옷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군들을 만나면 불쌍해서 봐줄 수가 없더란다. 다 떨어진 옷에 군화라고는 볼 수도 없었고 헌 고무신짝을 끌고 다니더란다. 하도 굶고 잠을 못 자서 한국군들은 전투할 힘도 없었다고 한다.

홀로 지내는 외로움에 병은 깊어가고

그렇게 아버지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평안도 영변의 청천강을 건너기도 하고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건너뛰기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혼자 지내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외롭지 않았다. 아버지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놀러 다닐 일도 많았고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 친구 분들은 한 분 두 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이제 동네에는 안어른들만 남아 계신다. 몇 분 계시는 바깥어른들도 대부분 병중이시다. 아버지 역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하시다. 그래서 아버지는 종일 있어봐야 말 한 마디 나눌 사람도 별로 없이 텔레비전을 친구 삼아 지내시게 된 것이다.

외로움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일 지도 모른다. 날마다 홀로 지내는 그 외로움 때문인지 아버지는 점점 약해지셨다. 한 해가 다르고 한 달이 달랐다.

아버지 앞에 있으면 저는 아직도 어리광 부리는 딸입니다.
 아버지 앞에 있으면 저는 아직도 어리광 부리는 딸입니다.
ⓒ 이승숙

관련사진보기


추석을 한 열흘 가량 남겨놓은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처남하고 의논해서 장인어른 모시고 오자. 내 보기에는 장인어른 오래 못 사실 거 같다. 이번 겨울을 저래 혼자 계시게 놔두면 봄까지도 못 사실 거 같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 일인데 왜 그리 무심해? 처남한테 전화 한 번 해봐라.”

지난봄에 굳이 내려가시겠다는 아버지를 모시다 드리면서 가을에 다시 모시러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긴 했다. 하지만 난 잊고 지냈다. 그런데 남편이 먼저 그러는 거였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신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를 모시고 오면 힘들고 피곤할 게 뻔한데,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을 미적대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대로 겨울을 나면 아버지가 내년 봄까지 견디지 못할 거라는 남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어른들은 그러신다. 물 한 그릇 끓여먹을 힘만 있어도 내 집에 있는 게 더 좋다고. 자식이 아무리 잘 해줘도 내 집이 편하고 더 좋다고 그러신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눕고 싶을 때 눕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집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로움은 어찌하나. 사람 소리 하나 안 들리는 고적한 집에서 날을 보내고 달을 맞는 그 고적함은 어찌 하나.

우리집에 와 계셔도 아버지는 외로우실지 모른다. 저마다의 일로 바쁜 우리는 아버지를 혼자 계시게 할 때도 많다. 하지만 같이 먹는 식사는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맛이 있는지 아버지는 슬풋이 담긴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비우신다. 그리고 차츰 기운을 차리고 계신다.


태그:#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