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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기쌀을 해 먹기로 하고 나락을 베었다. 하루는 나 혼자. 또 하루는 우리집에 만들 <스스로세상학교> 학생 진성이와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인물탐방' 수업을 온 지영이가 함께 베었다.


콤바인이 잘 들어가게 논 가장자리로 두세 포기씩 주욱 베었는데 이 나락을 세 단 집으로
가져왔다. 나락을 보고 어머니는 바로 알아차렸다.


"올기쌀 해 묵을락꾜?"

"네. 어머니. 올기쌀 해 먹어요."

 

곧 어머니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푹 삶아서 바싹 말리지 말고 '꼬꼬부리' 하게 말려서 디딜방아에 가서 푹푹 찧으면 졸깃졸깃한 게 맛있다고 하셨다. 올기쌀의 개념설명과 나락 채취 시기는 물론 삶는 방식과 어느 정도 말려야 하는지까지.

 

더 나아가 맛까지 감칠맛 나게 설명을 하시기에 나는 속으로 이 올기쌀 가지고 적어도 4-5일은 어머니랑 놀 수 있겠다 싶어 그야말로 '땡 잡았구나' 싶었다.

 

그러나 어찌 예상이나 했으랴. '디딜방아'가 걸림돌이 될 줄이야.

 

어머님이 날 좋을 때 딱 하루 말린 나락단을 훑었다. 나는 바로 가마솥에 쪄서 알루미늄 샤시 망에 깔아 말렸다. 올기쌀을 처음 삶아 보는 나는 나락이 툭툭 터지고 하얀 쌀이 비쳐 나온 것을 보고 큰일났구나 싶었다. 어머니한테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보여 드렸는데 도리어 칭찬을 들었다.

 

"오찌 이리 잘 삶았노? 해 봤나?" 하셨다.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삶아야 디딜방아 가면 껍질이 잘 까진다고 하셨다. 문제는 말리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말려야 잘 찧이는지 어머니에게 틈틈이 검수(?)를 받았다. 어머니가 손가락을 사악 부벼 보시면서 좀더 말리라고 하시면 나는 다시 갖다 널었다.

 

아들이라고 봐 주고 하는 것 없다. 꼼꼼하게 검사 하시는 어머니.

 

드디어 어머니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고 나는 절구에 넣어 찧기 시작했다. 이 절구통은 우리 마을 이전 이장님네 가서 빌려 왔다. 동네에 절구가 있는 집이 없어서 여러 집을 뒤졌다. 나락을 훑는 홀태가 있는 집도 단 한 군데도 없어 손으로 훑어야 했다. 골동품 가게에서 언젠가 몇 만원에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다.

 

쿵쿵 절구질을 하는데 방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어머니 좀 있다가 잘 찧었는지 한번 봐 주세요. 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은조네 집 뒤에 디딜방아 내가 맡아 놨는데 와 그라고 있노? 절구질로 어느 세월에 찧으려고. 딴 사람이 먼저 가는고마. 어서 가아!"

"네?"
"우리 디딜방아는 뒤에 굴밤나무가 기우뚱해서 겁나서 쿵쿵 못 찧고 내가 어제 은조네 기풍띠기한테 가서 디딜방아 쓰냐고 했더니 비어 있다고 얼렁 와서 쓰라고 했다카이."

"디딜방아요? 나 못봤는데요?"

"또 씨운다. 내가 가 봤다카이! 언제까지 절구에서 그 많은 걸 다 찧을락꼬?"

 


어머님을 겨우 수습하고 내가 챙이질을 했다. 어머님도 현실(!)을 받아 들이시는지 챙이를 가져 오라고 했다.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 고수급 챙이질은 세상이 다 안다.


나는 절구질을 하고 어머님은 챙이질을 시작하셨다. 내가 하는 절구질이 딸릴 지경이었다.

한 바가지 넣고 채 다 찧지 않았는데 "아직 안 됐냐?" 하신다. 사부작 사부작 하시는 챙이질이 원로(!) 답다. 나락 껍질만 솔솔 잘 나간다. 나는 퍽퍽 챙이질을 하는데 어머님은 소리도 안 난다. 부채질 하듯이 사부작 사부작….

 


나는 팔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파 손을 바꿔 가며 찧었다. 절구 언저리를 짚고도 찧는다.

진성이도 참여시킬까 했지만 이 금싸라기 같은 나락이 절구 밖으로 튕겨 나갈까봐 좀 더 힘을 키워서 오라고 했다. 진성이는 아령을 가지고 힘을 키우고 있다. 진성이가 내 근육을 보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팔뚝에 힘이 오르기를 바라는 아령 운동.

 


어머니가 내게 주시는 올기쌀 한 줌을 진성이에게 줬다. 처음 보는 올기쌀. 올기쌀이라는 말도 처음 듣는다고 했다. 한참 설명했다. 우리말은 말 속에 의미가 다 들어 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한 입에 탁 털어 넣어 팍팍 씹어야 맛있다고 하니 진성이가 고개를 팍 젖혀 한 입에 털어 넣고 있다.

 


드디어 완성되었다. 1차 완성이다. 살짝 더 말려 한 번 더 찧어서 챙이로 까불어 내면

올기쌀이 완성된다.

 

그러나 완성이 아니었다. 새로운 문제가 있었다. 어머님은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신의 기억과 당신의 주장과 당신의 판단력에 대한 확신을.

 


내가 느긋해 있는 사이 어머님은 전혀 다른 계획을 착착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한테 얘기도 않고 틀니를 빼서 휴지로 닦고 계셨다. 목도리도 하고 선물받은 예쁜 털모자까지 쓰고.

 

틀니는 꼭 물에 닦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잘 하시는데 휴지에 닦는 거 보면 뭔가 나를 제쳐 놓고 추진하시려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준비 내용을 보면 제법 멀리 출장을 가시려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십원 있나?" 하고 소리치셨다. 나는 20원하고 300원을 갖다드렸다. 버스타고 가는데 10원. 돌아오는 버스 값 10원. 100원은 국밥 한 그릇 사 드시라 했더니 "너도 같이 한 그릇 해야지?" 해서 100원이 추가되고 찐빵 한 접시 사 먹자고 해서 또 100원이 추가되어 300원이 된 것이다.


진성이는 10원짜리 버스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웃는다.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올기쌀을 보자기에 똘똘 싸 드리고 바퀴의자에 태워 가자는 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해는 떨어지고 밥하고 불 때야 하는데 어머님은 은조네 집 기풍띠기한테 다 말해 놨다고 어둡기 전에 빨리 가자고 서두르셨다. 감감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이 상황의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무리가 잘 될까 등등. 참 감감했다.

 

 

"삽짝으로 안 나가고 뭐하노?" 해서 골목 밖으로 나왔다. 아랫집 한동띠기 할머니가 들깨를 베고 있었다. 잘 됐다 싶어 한동 할머니를 길게 불렀다.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저 할마이 또 사람 속일라. 가자. 어서 가자"하셨다. 나도 지지 않고 내 주장을 펼쳤다.

"어머니. 한동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지난번 비에 디딜방아가 다 떠내려 가고 없대요."

 

역시 바보같은 주장이 되어 버렸다.

 

"또 나므 얘기 듣는다. 남 얘기 들을 거 머 있어! 어서 가자."

 

나는 다시 바퀴의자를 밀고 올라갔다. 방법은 단 하나. 분위기를 내가 장악하는 것이다. 자꾸 어머니 주관에 끌려다니면 안된다. 어머니 주장과 판단이 무시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내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버스 정류장이라고 하면서 길목에 바퀴의자를 세우고 어머니랑 버스를 기다리자고 했다. 한참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먼저 말을 하셨다. 어머니가 잦아지고 내가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가 끊어졌나보다 여태까지 안 오는 거 보믄."

 

나는 능청을 떨었다.

 

"버스가 옛날에는 다녔는데요. 요즘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자가용 타고 다니니까 없어졌나 봐요. 어머니, 그래도 더 기다려봐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머니는 점점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고 하셨다. 여기에는 어둑발 지는 시간도 한몫 했지만 원래 있지도 않았지만 '없어진 노선버스'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썼다.

 

우리는 가볍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마루에는 내가 드린 10원짜리 동전 2개와 100원짜리 은전 3개가 뒹굴고 있었다. 이것을 보시더니 어머니는 완전하게 마음을 접으셨다.

 

"에이. 버스 와도 못 갈 뻔했네 뭐. 차비도 안 갖고 갔구만."


태그:#치매 부모, #올기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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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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