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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 박인환 시에 가수 박인희가 불렀던 가사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노랫말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는 들을 때마다 의혹이 일었다. 어떻게 그런 추억을 가진 연인의 이름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흘러서 기억조차 안개처럼 뿌예진다 해도 정말 잊혀질 수 있는 건지 궁금해서였다.

 

살다보니 당시에는 아무리 죽어도 못 잊을 것 같은 절절한 사연도 세월 앞에 속절없이 희미해져가는 걸 느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그녀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성 조차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전거 뒤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고 달렸던 늦가을 초저녁 바람결은 아직도 내 머리카락 사이로 감미롭게 부딪칠 것만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년간 무역회사와 바이어오피스를 열심히(?) 다녔다. 직장생활에서 흥미를 찾지 못하던 터에 쫒기 듯 사표를 냈다. 주변사람들의 자극도 있었고 뭔가 정체된 것 같은 내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돌파구가 그림이었다.

 

달마다 꼬박꼬박 갖다 주는 ‘착한’ 딸래미 월급을 내 결혼준비금으로 저축하고 있던 엄마에게는 충격이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그림을 하겠다고 했고, 엄마는 다 늦은 나이에 그림이 뭔 새꼬빠진 소리냐고 했다.

 

남영동 화실에서 죽치고 앉아 밤낮으로 그림만 그리던 때가 스물네 다섯 살 즈음이었다. 그림 속에 빠져 살다가 수중에 남아있는 돈이 바닥을 보일 때, 나는 내가 하는 ‘짓’이 막연하고 무모하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한테서는 여기저기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하는 일도 없었고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나 스스로가 하루를 사는 날파리 같았다.

 

집에서는 아직 금값으로 취급받는 나이(?)일 때 선이라도 봐서 후딱 해치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키지 않은 선도 몇 번 봤다. 잠깐 부모 비위를 맞춰주자는 맞선은 한 번의 식사로 끝났다. 그림 그리겠다고 직장까지 그만 둔 내 꼿꼿한 기세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한참을 바닥에서 빌빌거릴 때, 구세주처럼 ‘둘리(가명)애니메이션’ 회사와 연결이 되었다.

 

회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난곡에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려져 나온 그림(원화)의 움직임을 그리는 것(동화)이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지만, 일을 하면서 다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그 당시(1985년) 애니메이션 대부분은 일본작품이었다. 일을 받으면 원화에서부터 동화, 선화, 칼라, 편집, 촬영까지 끝내서 다시 일본으로 작품이 보내졌다. 그쪽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왕창 몰리는 한여름에 꼬박 밤을 새워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한 팀 일곱 명이 일하는 방에는 각자가 맡은 일에 집중하느라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넘기는 소리, 지우개 지우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는 바로 내 오른쪽 옆자리에서 일했다. 일하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싫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꾸준한 손놀림으로 일을 했다. 타고난 성격인 듯 느긋하고 나보다 두세 살 위인 언니 같았지만 알고 보니 동갑이었다. 

 

시골이 고향이고 맏이인 그녀는 농사짓는 부모님과 동생들 이야기, 서울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어찌어찌 인연이 되어 지금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나누며 나도 내 속 깊은 얘기를 꺼냈으리라. 나는 그녀가 내 옆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주근깨가 박혀있던 동그란 얼굴. 쌍꺼풀이 없는 눈도 왠지 듬직한 그녀의 체구만큼이나 미더움을 더했다.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를 때면 그의 텁텁한 목소리가 다정하고 그윽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에서 한 정거장 전인 ‘모자원고개’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녀의 자전거를 같이 타고 퇴근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면 서둘러 밥을 먹고 우리는 회사근처 동산을 산책하곤 했다. 산에 있는 나무와 풀에 대해서 그녀는 모르는 게 없었다. 하찮게 자라는 풀조차도 그의 입을 통하면 새롭게 보였다. 온화한 그녀의 성품이 여린 풀꽃을 다루는 손길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보고 같은 방 동료들이 농담을 했다.

 

“둘이 꼭 연애하는 것 같애!”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가락 했을 인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린 같은 나이였지만 나는 그녀가 내 투정을 받아주는 언니 같았고, 큰오빠 같았으며 진한 우정을 주고받는 연인 같았다.

 

우리는 직장에서 날마다 만났다.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서. 하루라도 안 보면 그녀가 너무 궁금했다. 일요일에도 우리가 만나는 곳은 그녀의 집 근처 모자원고개 아래 공군사관학교 후문이었다(지금은 없어졌다). 그곳의 너른 잔디밭을 걸으면서 나는 그녀가 돈을 모아 시골에서 농장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날도 후문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또 자전거를 타고 나올 것이었다. 그녀의 바지주머니 한켠엔 언제나 문고판 책이 들어있었다. 직장에서 쉬는 시간이면 가끔 두꺼비 같은 그녀의 손에 앙증맞은 책이 펼쳐져 있었다. 어쩜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끌리지 않았나 싶다. 자전거 바람에 코스모스가 흔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며 활짝 웃는 그녀의 고른 치아가 환했다.

 

마침 점심때였다. 나는 문득, 그녀가 혼자 살고 있는 자취방이 궁금했다. 한 번도 그녀가 나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 라면이라도 사들고 가서 같이 끓여먹으면 어떨까 물었다. 그녀가 내 말에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불안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아, 저… 미숙씨, 잠깐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여자가 우리 앞에 다가와 버티듯 서 있었다.

 

여자는 목이 깊게 파인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원피스와 같은 재질의 머플러가 코스모스처럼 한들거렸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무척 앳되고 귀여웠다. 여자는 그녀를 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와 나를 번갈아보며 따지듯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여기서 뭐하는 건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부부처럼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언뜻,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쳤다. 보랏빛 원피스가 내게 말했다.

 

“oo씨가 잘 해주죠? 이 사람 말하는 거 다 거짓말이에요. 하나도 믿지 마세요. 혹시 그 사람이 돈 얘기는 안 했어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군요. **대학을 중퇴했다고 했죠?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나두 속았어요. 이젠 정말 내가 먼저 끝낼려구 그래요. 이쯤에서 알게 됐으니 그쪽도 다행이에요.”

 

여자가 얘기하는 사이 그녀가 언제 자리를 떴는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뒷모습이 저만치에서 보였다.

 

집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발짝이 제대로 떼어지지 않았다. 꼭 귀신한테 홀린 것 같았다. 무엇인지 확실하게 잡히지 않아도 두 사람을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그들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자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여자가 다짜고짜 말하는데도 변명 한 마디 못하는 그녀는 정말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을까? 접근이란 말도 그에겐 가당치 않았다. 나는 정말 그녀를 좋아했으니까.

 

이쯤해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믿어야 되는지도 혼란스러웠다. 이쯤이 아니라면 어느 때쯤에는 괴물로라도 변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내게 돈을 부탁하거나 빌리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런 사람일 수는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거짓말과 진실이 뒤죽박죽 섞여 가슴이 답답했다. 여자의 출현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녀를 예전처럼 볼 수도 없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했던 두 계절의 시간이 내 마음 한곳에 접혀있다. 원망과 분노는 체에 걸러진 듯 다 빠져나가고 순전한 그리움만으로.

 

시간이 25년이나 흘렀다. 그녀와 여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여름 무더위가 가시고 늦가을 때늦은 매미울음소리가 잦아들면 그녀가 생각날 때도 있었다. 평생을 사귀어도 좋을 친구였다고 믿었던 그녀. 그녀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했던 여자가 나타나기 전, 나는 뒤늦게 그녀를 사랑했던 내 자신이 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던, 다정한 ‘연인’. 새삼 그 시절이 까무룩 하게 흘러갔다. 

덧붙이는 글 | '거짓말' 응모글입니다.


태그:#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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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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