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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럴듯한 곳을 여행한 것도 아니고 손에 책을 한 권 든 채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다만, 때가 가을이었고, 오직 그 이유만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문득 안에서인지 밖에서인지 이런 물음이 날아왔습니다.

"이 행복이 과연 온당한 거야?"

이런 난데없는 질문이 처음 저를 찾아온 것은 꽤 오래전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 물음이 사도바울의 가시처럼 오랫동안 제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가을을 좋아하고, 가을이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죄가 될 리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날은 모처럼 시내버스라도 타고 무작정 어딘가를 가볼 생각이었지만 평소에는 천변을 따라 한두 시간 걷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차도 없고 면허증도 없어서 멀리 떠나는 일이 애당초 쉬운 일도 아니지만, 저녁을 먹고 난 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서도 저는 그것을 가을여행이라 명명하곤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인데, 신발이 조금 닳아지는 것 말고는 아무도, 아무것도 훼손할 필요가 없는 이런 최소한의 행복 추구에 대하여 굳이 딴지를 걸 하등의 이유가 없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행복해지듯이, 그 행복의 정점에서 어김없이 그 물음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 물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일 수도 있고,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 상태에서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해마다 입시경쟁의 희생양이 되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거두어버린 꽃다운 나이의 어린 중고생들. 그들의 슬픈 넋이 종이비행기가 되어 저에게 날아 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태일. 그날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읽고 있던 책도 <전태일 평전>이었습니다. 정해진 행선지도 없이 무작정 시내버스에 올라 탄 것은 물론 가을 탓이었지만, 책을 읽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민주노총과 전교조 전남지부는 전태일 열사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전태일 평전> 읽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책을 몇 권 구입하여 조합원들끼리 함께 돌려가며 읽고 있던 터라 손에 책이 들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전태일 평전> 초판을 처음 읽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교단을 밟기 전 같기도 하고 그 이후 같기도 합니다. 그 기억을 굳이 더듬어보려는 것은 개정판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겹쳐지는 어떤 광경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상을 초월한 열악한 근무조건 속에서 일을 해야만 했던 사회적 약자인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는 전태일의 시선과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하여 끝내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중고생들을 바라보는 전교조 교사의 시선, 바로 그것입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1.5미터이다. 이것이 저 악명 높은 평화시장의 다락방이다. 원래는 높이 3미터 정도의 방이었던 것을 공중에다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여 그것을 두 방으로 만든 것이다. 여공들은 허리를 펴고 걸어 다닐 수가 없다. 청계천 6가 쪽 고가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면서 이 작업장들을 보면 마치 무슨 돼지우리나 닭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90쪽)   

'그들에게는 푸른 하늘을 쳐다볼 권리도 없고, 오늘을 생각할 시간도 없으며, 내일에의 꿈을 키운다는 건방진 여유는 더더구나 없다.'(94쪽)

'전태일. 1969년 가을, 그는 고독하였다. 서울에 와서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세월 동안 현실의 냉혹한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그의 가슴에 쌓여온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은 너무나도 많았건만 그러나 그 말을 누구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온 세상이 '현실과 한패'가 되려고 침묵 속으로 떠나버렸을 때 홀로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 짓밟히는 인간들의 괴로운 영상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그의 괴로운 길을 누가 있어 동반한단 말인가? (195쪽)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연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길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237쪽)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한 젊은 노동자가 죽어갔다는 것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되지 아니한다. 먼 나라의 어떤 유명한 영화배우가 손가락을 다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어도, 노동자가 죽어간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다.'(313쪽)  

<전태일 평전>을 읽는 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진 대목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바로 11월 13일이었습니다. 가을여행을 위해 <전태일 평전>을 들고 무작정 시내버스에 올라탄 그날이. 책장을 넘기다가 뒤늦게야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제 심장으로 차디찬 얼음덩이 하나가 쑥 들어와 꽂히는 기분이었습니다. 가을과 전태일, 그 중에서 가을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권'이란 단어입니다. 전태일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끝가지 지켜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어린 여공들의 '인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해직의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것도 다름 아닌 학생들의 인권, 즉 '인간답게 살 권리'였습니다.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이 기본권이 학교 현장에서는 아직 요원합니다. 이른 아침 등교하여 늦은 밤까지 오로지 시험점수만을 높이기 위해 수단화된 삶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진보교육감의 대두로 인권 조례가 발표되는 등, 위로부터의 개혁이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그 반대편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저의 걱정은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렇다고 가을을 좋아하고 가을이 오면 행복해지는 낭만적인 기질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무공해의 행복은 제 제자들에게도 애써 전수해주고 싶습니다.

다만, 이제는 이 물음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할 것 같습니다. 40년 전 전태일이 그랬듯이.

"이 행복이 과연 온당한 거야?" 


태그:#전태일,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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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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