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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은 압록강
뗏목 실어 오는 물
물 우에 자고 일고 몇 밤이러냐

동쪽은 두만강
간도살이 가는 길
고향을 떠나갈 때 눈물은 깊어

서쪽은 대동강
여을 경치 조흔 물
모란봉 돌아올 때 갈매기 너훌

중앙은 노돌강
력사 자최 깁흔 물
한양성 오백년에 몇 구비 젓나

남쪽은 락동강
곡식 실러 가는 물
이 쌀을 실어다가 님께 들이리

1934년, '창립 1주년 기념 특별호'라는 타이틀을 단 오케레코드 2월 신보를 통해 발매된 <5대강 타령>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이 불렀다. 작곡은 <노들강변>의 문호월이 했다. 제주도 민요 <오돌또기>를 채보하여 세상에 알린 문호월의 <노들강변>은 <아리랑><도라지><양산도><천안 삼거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5대 민요로 일컬어진다.

작사는 <타향살이>의 김능인이 했다. 앞에 인용한 가사는 초성에 쓰인 이중자음 ㅼ과 ㅺ을 ㄸ과 ㄲ으로 바꾼 것만 빼면 모두 원문의 표기를 최대한 살린 것이다. 김능인은 조국의 땅을 흐르는 5대강에 깃든 역사와 애환을 노래함으로써 은근히 민족의식을 민중에 전파하려 했던 듯하다.

압록강 철교 위로 아름답게 노을이 물들었다. 철교 왼쪽 끝의 건물은 유람선이 출발하고 닿는 중국 땅이고, 오른쪽 끝은 북한의 신의주이다.
 압록강 철교 위로 아름답게 노을이 물들었다. 철교 왼쪽 끝의 건물은 유람선이 출발하고 닿는 중국 땅이고, 오른쪽 끝은 북한의 신의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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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 그대로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두만강, 서쪽으로 대동강, 남쪽으로 낙동강, 북쪽으로 압록강이 흐른다. 그리고 '중앙'으로는 '노돌강'이 한양성 오백년 역사의 자취를 굽이굽이 깊은 물속에 담고 흘러간다.

'노돌강'은 본래 한강이 넘칠 때 노들섬 북쪽에 생겨나던 물길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노래 속에서는 한반도 '중앙'의 강을 뜻하므로 우리가 흔히 쓰는 '한강'으로 보면 되겠다.

'노돌강'은 문호월 작곡 <노들강변>에 나오는 '노들강'을 한자로 적은 음이다. '노'는 '老'로 옮길 수 있지만 '들'은 음이 같은 한자가 없어서 '乭'로 적었다. 한편 '노'는 소리를 적어 '鷺'로, '들'은 '들보'의 뜻을 적어 '梁'으로 나타내면 '노돌'은 현재의 지명 '노량(진)'이 된다.

강은 국경을 만들고 이별을 낳았다

먼 옛날, 넓고 깊게 흐르는 물은 국경선이 되었다. 그 물은, 적이 함부로 넘어오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에게 평화를 안겨주었다. 들판을 이루어 배고픔도 없애주었고, 물고기까지 선물하였다.

고구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천지가 만들어낸 압록강과 송화강 터전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졸본성과 국내성을 쌓았다. 뒷날 장수왕 15년(427)에는 대동강으로 옮겨 평양성에 도읍했다. 백제도 한강을 안고 그 남쪽에 한성을 구축했고, 대동강은 신라와 가야의 국경선이 되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썰물로 물밑의 흙이 드러난 한강의 풍경. 물 건너편이 북한땅이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썰물로 물밑의 흙이 드러난 한강의 풍경. 물 건너편이 북한땅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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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신라인이 서해를 건너 당나라 장안에 닿는 데에는 넉 달이나 걸렸다. 장보고가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세워 '해상 왕국'을 건설한 적은 있었지만, 그 이후 조선 시대까지도 해적의 침탈 등을 이유로 '빈 섬' 정책을 쓴 탓에 보통 사람들은 수평선으로 나아갈 일이 없었다. 따라서 바다는 민중들에게 노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노래는 강에서 태어났다. 중국 노래라는 견해도 있지만 흔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역시(漢譯詩)'로 일컬어지는 <공무도하가>의 창작 순간을 지켜본 곽리자고(霍里子高)가 강을 지키는 진졸(津卒)이었던 것이나, <서경별곡> 등 사사로운 이별을 담은 노래들의 배경이 바다 아닌 강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바다가 국경이 되고, 이별의 무대가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안창호가 나라를 떠날 때 남긴 <거국가>에 이상준이 곡을 붙인 것도 1910년이나 되어서였고,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하여 '우리나라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 <사의 찬미>를 유행시킨 것은 그보다도 더 뒤인 1926년의 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강에 막힌 채 이별의 눈물을 흘렸고,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에 서린 역사와 현실의 무게를 노래하였다. 1934년에 태어난 <5대강 타령>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한쪽 강변만 보여주는 압록강과 두만강

압록강의 북안 중국땅에 서서 <5대강 타령>을 흥얼거려 본다. 문득 노랫말처럼, 백두산에서 뗏목을 타고 몇 밤을 흘러내린 끝에 위화도를 한 바퀴 휙 돌아 신의주에 닿는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1388년 이성계가 말을 돌렸듯, 나 또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와 내가 몸을 튼 방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갈 수 없는 남쪽으로 달렸지만, 나는 그가 반대했던 북향을 선택해야 한다.

두만강에는 뗏목 유람선이 뜬다. 앞서 간 뗏목이 거의 북한땅에 닿아 있는 것이 사진에 보인다.
 두만강에는 뗏목 유람선이 뜬다. 앞서 간 뗏목이 거의 북한땅에 닿아 있는 것이 사진에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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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보다 나은 것은 강폭이 좁아 뗏목 유람을 시켜주는 점과, 강의 남안에 뗏목을 살짝 닿게 하여 함경도의 갈잎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놀라운' 체험을 하도록 해주는 점이었다. 하지만 좁은 강폭은 식민지 시대를 산 우리 겨레들이 북간도로 옮겨가는 통로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간도살이 가는 길'을 걸으며 '고향을 떠나갈 때' 그들의 '눈물은 (얼마나) 깊어'졌을까. 망국민의 역사를 증언하는 <5대강 타령>은 지금도 여전히 눈물겨웠다.

뗏목을 탄 채, <5대강 타령>보다 한 해 뒤인 1935년에 발표된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한번 읊조려볼까 마음먹어 본다. 그러나 이내 그만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 흘너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실고 / 떠나든 그 배는 어디로 갔소 /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 언제나 오려나'를, 눈물 없이 꿋꿋하게, 끝까지 부를 자신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토록 허약한 마음을 드러낸다면, 꽁꽁 언 얼음판을 딛고 만주땅으로 옮겨간 식민지 시대 이주민들에게 너무나 낯부끄러운 일 아닌가.

아무도 모르게 나는, '강 노래'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흥얼거린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낮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김소월의 '강'이 두만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두만강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을 자랑하는 앞뜰도 없고, 뒷문 밖에 '갈잎의 노래'가 무성할 정도로 평화로운 곳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야 누나야>를 부른다. 광개토대왕릉 앞에서, '나는 독립군의 후손입니다' 하면서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사달라고 청하던 조선족 아주머니가 떠오른 까닭이다.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갔던 선조들의 후손들이 아름다운 '강변'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거닐 수 없는 대동강, 들어갈 수 없는 한강

<5대강 타령>은 대동강의 절경도 증언한다. 모란봉을 휘굽어 흐르는 물길 위로 너울너울 갈매기가 춤을 추는 아름다운 경치를 노랫말로 보여준다. 하지만 설혹 평양에 간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은 대동강을 따라 거닐어보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 평양성도 을밀대도 보지 못한다.  

평양에 가도 대동강변을 거닐어보는 참된 답사는 할 수 없다.
 평양에 가도 대동강변을 거닐어보는 참된 답사는 할 수 없다.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김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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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온전한가. 그것도 아니다. 하류로 가면 강안 양쪽을 따라 휴전선 같은 철조망이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 임진강과 마주치는 두물머리에 닿는다는 이유로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 되어 갇혀버렸다. 보통 국민은 출입 허가증을 가진 고깃배에 얻어 탔다 하더라도 한강 하류를 직접 여행할 수 없다. <5대강 타령>은 '한양성 오백년 력사 자취'가 한강에 서려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해방 이후 찾아온 분단의 질곡사가 구름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낙동강은 또 어떤가. 본래는 너른 들판에서 거둔 곡식을 내 님께 갖다드리는 고마운 물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곳곳에 허리를 잘려 여기저기 '저수지'가 생겼고, 물은 고였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 팔백리를 달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물길이 아니다.

이제 낙동강과 함께 흐르려면 '로봇 물고기'의 벗이 되어야 한다. 어찌 차마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으랴. 어지간해서는 갈 수 없는 대동강, 가더라도 북안만 훑어볼 수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하류는 답사할 수 없는 반신마비의 한강 들과 대동소이하게, 분단과 아무 관계도 없는 낙동강마저도 반 토막 여행지가 되고만 것이다.

다시 노래한다. 소년처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하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 강변은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 있어야 하고,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엄마와 누나에게 '강변 살자'고 청원을 까닭이 없다. 그곳은 이미 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북 왜관 '호국의 다리' 밑을 흐르는 낙동강. 아래 왼편 작은 사진은 (왜관, 다부동 등지의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는) 1950년 8월 3일 미군이 폭파했을 때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오마이뉴스 조정훈 기자 촬영)은 2011년 6월 25일 강물에 붕괴된 모습이다.
 경북 왜관 '호국의 다리' 밑을 흐르는 낙동강. 아래 왼편 작은 사진은 (왜관, 다부동 등지의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는) 1950년 8월 3일 미군이 폭파했을 때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오마이뉴스 조정훈 기자 촬영)은 2011년 6월 25일 강물에 붕괴된 모습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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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구경북 에도 송고하였습니다.



태그:#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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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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