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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승에 가면 엄청나게 큰 나무가 있어야. 그 나무에는 이 세상 사람들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 이름표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는구나. 사람이 죽어 다시 이 세상으로 오는 것을 환생이라고 하는데, 그때 저승사자가 나무로 데려가 태어나고 싶은 이름표를 고르라고 한단다. 그러면 너는 워떻게 허겄냐? 당연히 살아 있을 때 부러웠던 사람의 이름표를 고르겄지? 그런디 그 이름표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걸어왔던 길도 마땅치가 않은 거여. 다른 이름표를 봐도 마찬가지고. 그려서 결국 자기 이름표를 떼어 이 세상으로 나온다는구나. 그러니께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지나고 나면 좋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여."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대로 아버지는 다시 당신이 걸어왔던 길을 택하셨을까.

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찾아와 버린 여름 덕분에 자꾸 하늘만 바라보게 된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니 어제보다 조금 더 높아진 하늘에 눈이 시려진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의 나뭇잎들은 초록 빛으로 무성해 지는데….

아침이면 찾아오는 이 적막함이 싫어진다. 잠시라도 손을 놓고 있으면 머릿속은 온통 여기 저기 꿰어 맞춰야 하는, 구겨진 계산으로 정신이 없고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세월이 흐르면 다 좋아진다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이제는 가끔씩 멍해질 때도 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열심히 생활한다는 것과 잘산다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 여름이 왔다고 해도, 딸아이가 라일락 꽃잎을 한 웅큼 주워왔다고 해도 살갑게 웃어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엄마, 이것 좀 봐."
"아니, 이게 다 뭐야?"
"응,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주웠어. 봐. 아직도 향기가 나잖아. 엄마도 맡아봐. "

살짝 열리는 아이의 손바닥에는 라일락 꽃잎이 가득 담겨있었다.

"됐어. 이런걸 뭐 하러 주워오니? 쓰레기만 되지. 당장 갖다 버려."
"엄마…."
"빨리 갖다 버리지 못해? 다 떨어진 꽃잎은 뭐 하러 주워 와, 주워 오길…. 누가 너한테 그런 거 주워 오라고 했어?"

퉁명스러운 내 말에 아이는 민망스러워 두 손을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금세 눈시울이 빨개져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학교에 갈 때까지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자꾸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뒤숭숭한데 아이의 빨개진 눈시울이 떠오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방, 아이들 방, 거실, 부엌, 목욕탕까지 청소하고 나서도 무엇인가 손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신발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겨울 신발은 닦아서 집어넣고 여름에 신을 신발들은 꺼내놓고 작아진 신발은 한쪽으로 빼놓고, 사놓고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은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집어넣고….

그러다가 한 쪽 구석에 테이프로 꼭꼭 싸매둔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궁금한 생각에 열어보니 투박하고 못생긴 검정 구두가 담겨 있었다. 내가 작은 아이만 했을 때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셨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검정 구두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싸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어느새 돌아가신 지 햇수로 20여 년이 다 돼가는 아버지. 그동안 하루하루 생활이 힘들다보니 아버지의 얼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평생 작은 구둣방에서 구두를 만드셨던 아버지는 어린 내게 거인 같은 존재였다. 구두를 만드느라 거칠어진 손만큼이나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막내였던 나를 유난히 귀여워해주셨다. 본을 떠서 가죽을 잘라 풀로 붙이고 망치질 하는 아버지 곁에서 나는 자투리 가죽으로 소꿉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가끔씩 아버지를 졸라 하얀 눈깔사탕을 사먹기도 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난쟁이와 구둣방 할아버지>라는 동화가 생각났고 언젠가는 아버지 구둣방에도 난쟁이 요정들이 찾아와 부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아버지의 구둣방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방이고 해봐야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로 좁았고 앉을 수 있는 공간 밖에 되지 않았다. 구둣방의 천장이 높은 것을 이용해 겨우 사람이 앉을만한 공간을 두고 널빤지를 끼워 만든 것으로 구두 진열장 뒤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었다. 가끔씩 특히 겨울에 시간이 너무 늦어 집에 갈 수 없는 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곳에서 주무셨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새벽녘까지 졸린 눈을 부비며 난쟁이 요정들을 기다리다 잠이 들곤 했었다. 그곳에 누우면 한 사람 정도 드나들 수 있는 구둣방의 작은 출입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내 발에 새 구두를 신겨주셨는데 한 번은 치수를 잘못 재서 다 완성한 구두를 신어보니 너무 작아 신지 못하게 됐다. 그렇다고 다시 구두를 만들만큼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나는 새 검정 구두를 툇마루에 모셔 놓고 신고 있던 구두를 한 해 더 신어야 했다. 구두 앞부리가 헤져서 다 벗겨지고, 작아서 발이 움츠려들 때까지. 그래도 툇마루에 반짝이는 새 구두를 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새 구두가 아까워 버리지 못했고,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한평생 구두 만드는 일밖에 모르시던 아버지는 가끔씩 저녁때면 내 손을 잡고 가게 가까운 공원에 가시곤 했었다. 구두가 망가진다고 놀 때는 벗어놨다. 내가 놀고 있으면 아버지는 구두 속에 나뭇잎을 가득 담아 놓거나 때로는 자갈을 가득 담아 놓으셨고,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했었다.

아버지는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구두를 만드셨지만 난쟁이 요정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 흔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하신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 아버지는 힘들고 어려웠던 모습보다는 내 구두 속에 사랑을 가득 담아주셨던 따뜻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난쟁이 요정은 힘들고 어려웠던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던 바로 아버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검정 구두를 꺼내 먼지를 닦고 신발장 위에 올려놓으며 뾰로통한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계를 보며 집안을 대충 치우고 나서 아이의 학교 공부가 끝날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손에 들려 있는 지갑 속에는 달랑 1000원짜리 지폐 서너 장 밖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작은 화분을 들고 마냥 좋아할 아이의 웃음으로 넉넉한 부자가 돼 있었다.

파아란 하늘에 난쟁이 요정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웃음과 똑같은….

덧붙이는 글 |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출간 기념 기사 공모] 글입니다.



태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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