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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불행하게도 없다. 다만, 뚜렷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굳이 있다면, 버튼만 누르면 건물의 위아래를 힘들이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엘리베이터 타는 재미로 하루 종일 신났던 병원의 기억, 너른 마루가 붙어 있던 안방 한 구석에서 삼베로 만든 두루마기처럼 긴 상복과 역시 삼베로 만든 머리에 올린 갓을 쓰고 양반 다리 놀음을 하던 기억, 이 두 가지 기억이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관련된 유일한 기억일 뿐이다. 그러나, 그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의 얼굴, 분위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리니 그럴 거라고 이해해 달라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였던 8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하얀 것이 오십의 초로의 아저씨가 된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들보다 모자랐던 어린 내 탓이었든, 돌아가시기 전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계셔야 했던 내 아버지 탓이었든 평생 내 의식·기억·추억 속의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한심하기만 하다. 그래선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성한 아들 둘로부터 20년 넘게 들었음에도 아직도 아빠라는 호칭이 내겐 낯설기만 하다.

지난 5월 25일은 아버지의 45번째 기일이었다. 26일 <오마이뉴스>에서 내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공모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비록 내 기억 속에 없는 아버지이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우리 엄마의 기억으로 오늘 내 아버지를 추억한다.

내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처음 참가한 전투에서 총 한 번 쏘지 않은 채 손들고 항복을 하셨다. 살벌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남 눈에 띄지 않은 채 조용히 남쪽에 남으셨고, 달랑 혼자 몸뚱어리에도 열심인 것에 마음이 동한 우리 외할아버지 덕(?)에 엄마와 결혼을 하셨다.

내 아버지는, 난리 후 한 서울의 어수선한 시장에서 쌀도 배달하고, 지게도 부리면서 가정을 꾸렸다. 첫 아이인 형이 태어나고, 다음 아이인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자그마한 가게를 마련했다. 셋째 아이인 동생이 태어나며 이제 살만하다 싶게 되었을 때 신부전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내 아버지는, 무려 여덟 살이나 어린 삼십 갓 넘은 사랑하는 아내인 내 엄마를 떠날 수 없다고, 올망졸망한 어린 아들 셋을 두고 갈 수는 없다고, 그러니 죽을 수 없다 하셨다. 하지만,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등지셨다.

매번 돌아오는 5월 이맘때, 하필 추운 겨울 지나 따듯하고 밝은 봄날에 그렇게 가신 내 아버지. 그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기에 더욱 허망한 내 아버지를 나는 오늘 애절하게 추억한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아버지" 응모글



태그:#내 아버지, #애절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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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여행과 느리고 여유있는 삶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같이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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