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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와 3남 가족들
▲ 아버지 팔순에 가족사진 아버지 어머니와 3남 가족들
ⓒ 윤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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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에는 그리운 아버지가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신다. 비록 사진으로 보시고 계시지만, 20년 전 한 많은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 아버지 영정을 모시고 대화를 나눈다. 부자간에 나눈 다감한 대화다.

"아들아!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느냐?"
"예, 아버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염려는 무슨 염려, 내 믿고 사랑하는 아들이 언제나 열심히 살고 있는데..."

무언의 대화는 계속된다. 아버지가 팔순을 넘겨 사시면서 마지막 응급실에 입원하시어 위독한 순간을 넘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방금 이 애비는 저승에 갔다 왔다. 그곳은 엄청나게 꿈에도 보지 못한, 기기묘묘한 호화찬란한 곳이었다. 그런데 아직은 올 때가 아니라며 나를 돌려보냈다."
"아버님도, 어찌 저승에 가셨단 말이십니까? 잠간 정신이 혼미하신 순간이시지요?"
"아니다, 네가 이 애비를 살렸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고맙다."
"자식에게 고맙다니요. 당연히 자식은 위급하신 아버님을 병원으로 모셨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하세하시기 3개월 전에 이런 순간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운 아버님과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을사 늑약의 해에 태어나 일제하에서 젊음을 보내시면서 나라 잃은 한을 달래며 살아오셨다. 10살에 청상과부 이셨던 숙모에게 양자 되어 한학과 한글을 읽히시고 아들딸을 8남매나 두신 다복한 가장이셨다.

맏아들이 해방정국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군청과 면사무소에 근무해 배급도 타면서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17살의 청상의 양모에 효도하고 자식들 양육에 최선을 다하시면서 그렇게 바라던 해방이 되었는데, 바로 분단의 장벽이 가로막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성인이 된 맏아들이 건준에 가입하였다.

단란했던 가정에 불행이 몰려오고 있었다. 맏아들이 군청과 면에 근무하면서 건준 조직에 열성이었는데 그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착실히 근무하면 장차 면장과 군수 될 것이라는 주위의 선망도 접어야만 했다. 건준 요원들이 좌경으로 몰리면서 결국은 밤 사람이 되어 보도연맹 가입을 종용받았지만 형은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친순을 기념하여 찍은 독사진.
▲ 아버지 70대 정정한 모습 친순을 기념하여 찍은 독사진.
ⓒ 윤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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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계속 잠행하다가 1948년 여순사건에 주모자로 피해 다녔다. 다음해 봄날 꽃샘추위가 극성을 부리던 1월 하순에 붙잡혔다. 한 달 이상 모진 고문을 받고 이어 조직원을 불라며 이곳저곳 대질신문을 벌이다가 그만 3발의 총탄에 숨지고 말았다. 22살에 형은 재판도 없이 좌익으로 몰려 운명해, 우리 가문은 기둥이 무너진 후, 을씨년스러운 나날만이 계속되었다. 1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후, 한여름이었다.  

6.25전쟁은 서울이 점령되고 7월 중순에는 빛고을도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1년 전에 죽은 형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리고 울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어린 내가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 오냐고 항변을 하였다. 철없는 어린애 말로 치부하시며 밥상차림은 계속되었다. 그런 여름날에 우리 집 대문을 박차고 군관동무와 호위병과 위원장이 들어섰다.

"이 댁이 윤영철 동지의 집입니까? 우리는 윤 동지의 조국통일에 혁혁한 투쟁을 하다 운명하심에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저희가 그 일을 완수하려고 왔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누구신데 내 아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까?"
"네, 다 알고 왔습니다. 오늘부터 아버님이 효지면당 위원장 이십니다."
"무슨 말씀이요? 나는 일자무식에 농사짓는 농사꾼이요. 똑똑한 사람 시키시오!"
"위원장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맡으시면 됩니다. 밑에서 알아서 합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제발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자꾸 그러시면 반동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맡으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군관동무의 반동이라는 한마디에 그만 입을 닫고 말았다. 어쩌면 아들이 1년 전에 재판도 없이 죽었듯이 당신도 그리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던 군관장교는 옆에 있던 둘째 형의 나이를 물었다. 19살이라고 하니 "그러면 우리 의용군에 들어와야 합니다. 나와 같이 일합시다." 하면서 바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6남매 자녀와 함께하신 부모님 칠순.
▲ 아버지 7순에 살아남은 6남매와 함께 6남매 자녀와 함께하신 부모님 칠순.
ⓒ 윤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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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이미 운명한 맏형이 아니라 위원장이 되신 아버지와 의용군에 간 둘째형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10살이던 나는 철이 약간은 들었지만 원두막에서 이북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노래와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 군가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펄럭이는 인공기가 분주소와 면사무소 학교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길가의 우리 집은 인민군들이 오다가다 쉬어가고 밥을 해내는 등 최대한 부역을 하고 있었다.

인민위원장이 된 아버지는 면민들이 수 없는 청원서를 접수받고 있었다. 평소에 감정이 있던 이웃 일가 친구 할 것 없이, 세상이 바뀌었으니 처벌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논밭에 물을 밤에 몰래 빼갔다며 고발을 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케케묵은 아주 오랜 감정도 토로하면서 처벌을 해 달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세상이 오래갈 것 같지도 않은데, 원수를 만들 필요가 없다며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난 후 9.28 인천작전으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펄럭이고 라디오 방송이 서울 탈환을 알렸다. 그런 후 9월 말에 인민군이 어느 사이 물러갔다. 그 때에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 쌓아놓은 쌀과 광목 솜털 설탕들이 교실마다 빼꼭 쌓여있었는데 면민들이 몰려와 창문을 부시고 마음대로 훔쳐가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는 면 간부와 그들을 말리고 있었다.

"면민들! 이것은 모두 정부의 것이니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됩니다. 자제해 주세요?"
"당신은 보아하니 인민위원장으로, 지금 군인과 경찰이 들어오고 있는데, 당신은 총살이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피하시오."

어린 나는 방금 그 면민의 말이 맞은 것 같아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말씀드렸다.

"방금 저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아버지 빨리 피하세요."
"오냐! 알았다. 집에 가서 할머니와 어머니께 서창면 진외가로 간다 말씀드려라."
"예, 어서 빨리 피 하세요."

아버지는 순간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군량 물품은 마구잡이로 지게와 심지에는 수레까지 갖고 와서 싣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난리 통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막는 사람이 없으니 힘이 센 사람이 장땡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어머니께 아버지가 피신을 진외가로 가셨다고 안심을 시켜드렸지만 그러나 아버지뿐만 아니라 의용군에 간 둘째형도 걱정이었다. 모두 무사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9월 말에 경찰과 국군이 효지면도 도착했다. 그동안 마구잡이 난리 치며 가져갔던 쌀 설탕 등 물건들을 다시 반납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한 나라의 것이 맞았다. 아버지는 순수하게 남북을 가리지도 않고 그저 다스리는 국가권력을 의미했다. 국군이냐 인민군이냐에 따라 정부를 선택한 분단국의 아픔이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당시의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도 같은 것 같다.

아버지는 광산군 서창면의 진외가가 아닌 안전한 피신을 생각하였다. 할 수없이 그리 멀지 않은 무등산을 택하였다. 지산면을 거쳐 무등산 입구를 한참동안 가다가 깊은 명상에 잠겼다.

"내가 지금 일시 피난을 위해 무등산을 향하고 있지만 과연 무등산은 안전한 곳인가? 의문이었다. 어쩌면 모든 인민군 부역자들이 무등산을 택한다면 결국 무등산은 군경의 토벌 대상이 되고 영원히 산을 내려오지 못한 빨치산이 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집안의 식구들을 생각했다. 17살에 윤문에 시집오시어 남편과 단 3개월 만에 사별하고 청상과부로 살아오셨다. 오직 양아들과 손자손녀를 손수 받으시며 꿈을 가지셨던 불쌍한 양모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혼인하여 양모 시어머니를 잘 모시며 자식을 8남매나 낳았다. 친정과 시가에서 칭찬과 칭송을 마냥 받던 아내를 또한 무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록 맏이는 잃었으나 남은7남매 자식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재삼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을 정하였다.

일단 무등산을 내려가서 양모와 처자식에 다가가기로 했다. 무등산자락에서 광주 도심을 거쳐 진외가 광산까지 과연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를 짜보기로 했다. 우선 군경무등산 토벌대의 검문검색을 피해야 한다. '인민위원장'의 티는 내지 않고 순수한 약초 캐는 사람으로 위장했다. 우선 산자락에 허름한 집에서 약초 캐는 꼴망태와 호미를 잠시 빌린 듯 메었다. 한참을 내려오니 바로 앞에 군경합동 수색대를 만났다. 마음이 떨렸다. 그러나 담대하게 기지를 발했다. 점점 가까워 왔다.

"누구냐? 손들어! 무등산에 좌익 빨갱이와 내통한 자가 아닌가?"
"저는 아닙니다.  보시다 시피 저희 어머니 병환에 쓸 약초를 캐러갔다 옵니다."
"이름이 뭐야? "  "네, 저는 광주에 사는 박석천이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효자이군. 이곳에 잘 못 왔다 갔다 하다가 걸리면 죽는 수도 있소"
"저 대장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증명하나 써 주시오. 앞으로 또 검문이 있으면..."
"거 참 귀찮게 하지만 효자 같으니 써 주리다. 대장 000 싸인 했소"
"대장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기지는 대단했다. 당시에는 주민증이니 도민증도 없을 때였다. 시내로 나오는 동안 3번이나 검문을 받았지만 그 증명서 하나로 통과되어 무사히 시내를 거쳐 광산군 서창면 만호리 진외가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다행히도 양자로 가서 서당을 다녔기에 외지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은 계속되었다. 과연 집안은 무사한가? 특히 둘째 아들인 영선 이는 북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어찌되었는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틀 이 지났는데 둘째 아들이 들어온 것이다.

"아니, 내 아들 영선아! 무사히 살아 있었구나. 그간 고생이 많았지?"
"아버지 절 받으세요! 외할아버지 할머니도 외삼촌도 절 받으세요."
"아니 의용군에 함께 있던 홍 군관은 어찌 되었나. 무사히 북으로 넘어갔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지요. 9.28수복으로 태백산맥을 다 막아버렸으니까요."
"그 홍 군관이 죽지 않고 살아야 되는데, 너를 이렇게 고향으로 보내준 고마움"

40대에 고문을 당하고 사선을 넘으신 부모님 8순 잔치는 의미가 컸다.
 40대에 고문을 당하고 사선을 넘으신 부모님 8순 잔치는 의미가 컸다.
ⓒ 윤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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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홍군관은 둘째형을 바로 의용군으로 데리고 간 장본인인데, 그와 마지막을 얘기를 하였다. 전주에서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태백산맥 방향으로 한참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밤을 만났다. 더구나 가을의 맑은 하늘에 달빛이 유난히도 밝았는데 달을 쳐다보다가 군관장교가 말했다. "윤 동지! 지금 우리가 북으로 철수 해 간다고 하나 살아간다는 보장이 없소. 그러니 윤 동지는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시오. 조국의 분단으로 영철 형 하나 조국에 바쳤으면 되었지 동지까지 너무한 일이요. 부디 살아가 고향 할머니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에 우리 만납시다." 둘째 형은 이게 참말인지 망설이고 있는데 군관은 명령이라면서 형을 남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참으로 조국은 하나요, 같은 동포라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얘기를 다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어떻게 전쟁의 결과가 처리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우선 진외가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보름이 지났을 까. 효골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인공기간에 자진 부역을 했거나 또는 강제로 부역을 한 모든 사람은 자수를 하면 그 어떤 죄도 묻지 않는다고 한 공고문이 나 붙었다. 만약 이번에 자수를 하지 않고 기피한다면 나중에는 엄중 가중처벌을 받는다는 경고도 함께 씌어 있었다.

아버지와 형은 물론 마을에서 부역한 사람들은 지서에 가서 자술서를 쓰고 나왔다. 전쟁은 서울이 수복되고 북진이 계속되어 평양에 까지 올라갔다. 이 대통령은 평양에서 연설을 했다. "본인은 그동안 하나인 조국을 소련이 북을 점령해 둘이 되었는데 언제고 북진통일을 이루어 하나 된 통일조국을 만들겠다는 나의 신념이 눈앞에 왔습네다. 이제 우리 동포들은 단결하여 통일을 이룹시다." 참석한 평양수복대회 군중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과연 그렇게 평양점령으로 전쟁이 끝날 것인가?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유엔연합군이 이때에 압록강 신의주를 넘어 만주까지 점령하여 원자폭탄 한 두 개만 투하하면 한반도는 바로 미국의 패권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웅대한 포부는 망상적이었다. 당장 미국본토에서 맥아더를 귀국시키고 있었다. 그 순간 중공의 모택동은 수백만 중공군을 투입하여 자국의 방비는 물론 북을 돕는 군사력을 추가 파병하고 있었다. 아무리 미국의 공군의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결국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그만 평양과 원산, 개성에서 모두 후퇴하고 있었다. 소위 그 유명한 1951년 1.4후퇴다.

1.4후퇴는 서울을 다시 인공의 수증에 들어가 남하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남쪽의 상황은 그간 자수했던 부역자 모두를 암암리에 체포하여 즉결처분을 내리도록 명령이 하달되었다. 문제는 다시 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하면 자수한 부역자들이 합세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간에 자수하면 그 어떤 죄도 불문에 붙인다는 경고문만을 믿고 자수한 부역자들은 밤이면 밤마다 붙잡히면 그만 총탄에 죽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형도 수 차례 잡으러 왔었지만, 용케 피해 무사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 견디어내지 못하고 둘째형은 인민의용군에서 국군에 자원입대하고 있었다. 나이가 미달이지만 자원은 그대로 받아주었다. 마을에서 "무운장구" 머리에 띠를 두루고 정식으로 환송도 해 주었지만 부모님들은 전쟁에서 살아온다는 보장도 없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 같은 조국에서 언제는 인민의용군으로 언제는 국군으로 복무를 해야 하는 형의 신세는 처량했다.

둘째 형은 제주도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바로 중부전선에 1사단 소속으로 배속되어 인민군과 전투를 하면서 "혹 홍 군관 장교를 만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들었는데  다행히 그와는 만나지 않았지만 수류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울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어머니는 그 먼 길을 배와 기차를 타고 면회를 다녀와 또다시 전선에 배치될까 전전 근근했으나 22개월 근무하고 상이제대를 하여 고향으로 귀가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형은 군에 간 절반이 전사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경 부상으로 동사무소에 군경원호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3년차에 들어간 전쟁은 3.8선을 경계하지 않고 휴전선을 정하는데 엄청난 남북의 전력 손실과 군 사망자를 내고 있었다. 특히 백마고지와 개성의 전선은 수없이 빼앗고 빼앗긴 전선으로 남북군인, 심지어 유엔군도 많은 죽음과 중 부상을 당한 슬픈 전투였다. 

그러나 막상 1953년 7월27일 역사적인 휴전협정(정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북과 중공 그리고 유엔대표 미군이 협정에 서명하고 있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특유의 고집으로 휴전협정에 응하지 않고 언제고 북진통일을 이룬다는 다짐하였다. 결국 그 협정 당사자에 남이 빠져 오늘날까지 전시 작전권이 유엔군을 대표한 미군이 갖게 된 사실을 기억하면 역사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완전한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을 60년을 맞는 올해다. 역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엄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관안구 노인대학에서 아버지 수료식에 어머니와 함께.
 관안구 노인대학에서 아버지 수료식에 어머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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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버지는 그동안 수차례 5번이나 사선을 넘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데 휴전이 된 몇 달 후에 면민 한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면 위원장인 아버지에게 덮어씌웠다. 모든 게 다 끝이 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경찰에 조사를 받으며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마치 6.25전쟁 전에 맏아들이 받은 고문 이상으로 고역을 치루셨다.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을 계속 고문했으나 끝내 사실이 아니기에 어떤 고문도 버티었다. 한단 만에 아버지를 지명한 자가 스스로 진 죄를 아버지에게 떠넘긴 무고죄로 결국은 자신이 한 짓이라는 자백으로 한 달 만에야 풀려나오셨다.

아버지가 풀려나시던 광주경찰서 정문에서 나는 13살에 어머니와 함께 마중을 나갔다. 당시 사십 중반의 연세인데 극 노인이 된 모습에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그 인공 때도 인민위원장으로 많은 원한 민원이 많았으나, 아버지는 이 세상이 오래가지 않을 터인데 영원한 원수가 되려 하는가? 반문하며 중재를 잘 섰기에 인명피해 한명도 없는 면당위원장으로 면민 모두가 신임을 했었다.

그 양반 법이 없이도 살아 갈분이라는 닉네임을 받기도 했다. 전쟁의 뒷자락에 인문군의 저지른 죄보다 아군이 쩍하면 좌익용공분자로 몰아 희생당한 숫자가 많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수는 100만이라고 하고 이산가족이 1천만 이라는 엄청남 아픔을 남긴 전쟁의 슬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아버지는 마지막 무고죄로 어쩌면 더 큰 고역을 당 하실 번했는데 하느님이 도우셨는지 무죄가 되었다. 근 6개월간 고문 후유증 치료를 하시고 겨우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고문 후유증에 좋다는 똥물은 마치 물마시듯 한 아버지 모습이 선하다. 아버지의 고행은 어쩌면 분단조국에 살고 있는 업보요 맏형의 분단조국에 하나 된 통일조국의 꿈에 여파이다. 아직도 분단을 조장하여 이득만을 취하는 권력자들의 욕망에 희생이다. 이런 아픔이 어디 우리 집안의 아버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버지는 남쪽의 빛고을 효골에서 태어나 효자로 친부모 양부모를 봉양했으며 아들4명과 딸 4명을 둔 한때 다복한 가장이었다. 그놈의 분단만 아니었다면 아들을 잃지도 않았을 터이고 둘째 아들이 전쟁에서 상이군인이 안 되었을 터이다. 그리고 당신이 다선번이나 죽을 고비도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고문을 이겨내고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고 있는 3남인 필자와 함께 남은여생을 보내시었다. 한 많은 세월을 잊으시려고 시조창에 몰입하시어 30여년을 전국을 누비며 노래하시며 한을 달래시었다. 억울하게 큰아들을 잃은 지 60년 만에 진실규명이 되고 명예회복을 하였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고향 선산에 고희 잠들고 계신다. 

나는 생각한다. 전쟁 그 때에 인명위원장으로 부역자가 살아가는 방법은 무등산에 입산하여 영원한 빨치산으로 사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과감하게 당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자식 된 도리와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의지에다 양모와 처자식을 생각하며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 험악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여 군경수색대를 통과 할 수 있었던 순간도 모두 아버지의 지혜였다. 아버지 말년에 30여년을 모시고 살아오면서 느낀 점이 많다. 만약 빨치산이 되셨다면 가족들은 과연 온전히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을까?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무뢰한 청을 드렸다. 그동안 살아오신 80평생 역경을 글로 남겨주시라고 했었다. 필자가 명색이 작가이면서 글쓰기가 얼마나 고행인 것을 알면서도 드린 청을 아버지께서는 6개월 동안 꼬박꼬박 써 주시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 부모님 방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누워 도란도란 내 기억에 희미한 우리 집안 역사를 질문하면 자세하게 답을 주시었다. 그러기에 그 오래된 아픔의 우리 집 역사를 이제는 머리에 거의 다 외워 버린 지도 모른다. 

이번 "아버지"라는 주제의 글을 쓰게 한 <오마이뉴스>에  감사한다. 아버지와 형이 이루지 못한 분단 68년의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의 각오는 오직 한반도에 평화 통일만이 우리의 살길 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리운 아버지! 존경하는 아버지! 부디 천상에서 영면하소서!! 소자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다시 맞는 6.25전쟁 63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전쟁이 중단된 휴전협정 60주년이 다음달이다. 지구촌에 제일 오랜 분단국에 살아오면서 언제나 분단조국이 통일의 그날이 올지 너무도 안타깝다. 작금의 남북관계나 북미관계는 한반도에 전쟁기운을 북돋고 있는 양상이다.

*아버지에 대한 응모글입니다.

아버지는 치욕적인 일제와 분단조국에 사시면서 당신은 여러차례 사선을 넘으시고 사랑하는 아들들이 분단조국에서 죽임을 당하고 한조국에서 어느때는 인밈의용군으로 또한 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부상을 당한 아들도 있다. 또한 아들의 고문과 당신의 고문으로 아픔을 사시다가 82살에 운명하시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셋째인 필자도 또한 용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어왔고 이제야 말로 한반도에 통일을, 그 동일도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30여년의 통일운동을 하고 있다. 4부자가 모두 분딘과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고 이제는 통일이다는 생각에 그리운 아버지를 그리면 서 쓴 글이다.



태그:#분단조국, #평화통일, #군관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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