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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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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성 넘어 비사수 보니
흐르는 붉은 돗대 낙화암을 감도네
옛 꿈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점은 날에 물새만 운다
물어 보자 물어 봐 삼천궁녀 간 곳 어듸냐
물어 보자 낙화삼천(洛花三千) 간 곳이 어듸냐

백화정(白花亭) 앞에 두견새 울어
떠나간 옛 사랑의 천년 꿈이 새롭다
삼흥사 옛 터전에 저녁 연기는
무심한 강 바람에 퍼져 오른다
물어 보자 물어 봐 삼천궁녀 간 곳 어듸냐
물어 보자 낙화삼천(洛花三千) 간 곳이 어듸냐

김정구가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은 월북작가의 곡이라 하여 해방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부른 노래 중에는 일제 때에 이미 금지곡이 된 노래도 있었다. 바로 <낙화삼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낙화삼천>은 조선 고유의 음계를 구사한데다 가사도 우리 조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1941년 11월 음반을 발매할 때 오케레코드사는 허가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일제의 조선군 보도부는 발매를 허가해 주었다.

이 노래는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제작된 영화 <그대와 나>의 삽입곡 중 하나였다. 본 주제가는 영화 제목과 같은 <그대와 나>. 창씨개명한 조선인 청년과 일본 처녀가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앞둔 상태에서 두 사람은 남자의 고향을 방문하고, 이윽고 자원 입대하는 청년을 여자가 격려하는 줄거리의 영화 <그대와 나>. 그 주제곡 <그대와 나>는 별로 인기를 모으지 못했다.
백마강 유람선의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고란사 앞 안내판의 사진(을 재촬영한 사진)
 백마강 유람선의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고란사 앞 안내판의 사진(을 재촬영한 사진)
ⓒ 고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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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인공 남녀가 백마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사공으로 출연한 김정구가 노를 저으면서 부른 <낙화삼천>은 인기가 폭발했다. 그러자 놀란 총독부는 부랴부랴 노래를 만들고 배포한 관련자들을 조사하는 등 압박을 가한 뒤 마침내 금지곡으로 묶어 발매를 금지시켰다.

<낙화삼천>에 그런 사연이 깔렸다고 해서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김해송을 민족운동가로 치켜올릴 마음은 전혀 없다. 두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한 <이천오백만 감격> 같은 노래야말로 친일의 극단을 달리는 반민족적 노래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1942년에 나왔다.

낙화암 (오른쪽 아래 1/3 지점에 송시열의 붉은 글씨 落花巖이 보인다.)
 낙화암 (오른쪽 아래 1/3 지점에 송시열의 붉은 글씨 落花巖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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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
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
나라님 부르심을 환히 받들어
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깊을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깊을 이천오백만

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聖壽)를 빌고  
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
미영(米英)의 무궁 원수 격멸의 마당
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깊을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깊을 이천오백만

노래 중의 '성수'는 물론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을 뜻한다. '무궁 원수 미영'은 미국과 영국이다. 천황을 위해 한 목숨을 영광스럽게 바치자는 내용이다. <낙화삼천>을 작사하고 작곡했다고 해서 조명암과 김해송을 민족예술가라 상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마강 이야기를 하면서 <낙화삼천>보다 더 유명한 백마강 노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꿈꾸는 백마강>이다. 1940년에 나온 이 노래는 <낙화삼천>과 <이천오백만 감격>의 작사가 조명암이 노랫말을 쓰고, 당시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임근식이 작곡을 했다.

백마강을 흐르는 유람선
 백마강을 흐르는 유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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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고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모치는데
구곡간장 울음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꿈꾸는 백마강>은 가수 이인권이 불렀다. 그 이전부터 이미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던 이인권은 <꿈꾸는 백마강>으로 더더욱 인기가도의 절정에 올랐다. 이인권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대중음악계 활동을 하여 1970년대의 인기곡 <바다가 육지라면>(조미미 노래)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1973년 9월 29일 생애를 마쳤다. 하지만 타계시 그의 나이는 아직 54세에 지나지 않았다.

부소산성의 삼충사. 계백, 성충, 흥수가 배향되고 있다.
 부소산성의 삼충사. 계백, 성충, 흥수가 배향되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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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백마강>의 지리적 배경인 부소산성을 올라본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역사유적은 1957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삼충사이다. 세 명의 충신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 세 분이 성충, 흥수, 계백인 것이야 정말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삼충사는 부소산성 정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를 걸으면 금세 나타난다.

산길을 조금 더 오르면 일출을 보기에 적당한 자리에 세워진 영일루(迎日樓)가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백제군들이 군량을 비축했던 창고자리 군창터가 남아 있다. 더 높은 곳까지 닿으면 사자루(泗疵樓)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사자루의 현판 글씨는 우리나라 근대 서예를 대표하는 해강(海岡) 김규진 선생의 작품이다. '白馬長江'. 현판 글씨가 마치 흘러가는 백마강의 강물처럼 유장하다.

김규진의 글씨
 김규진의 글씨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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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에는 김규진이 쓴 '미륵불' 세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사진의 하얀 동그라미 부분.
 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에는 김규진이 쓴 '미륵불' 세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사진의 하얀 동그라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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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의 글씨 중에서, 전문가들의 안목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작품은 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 바위에 새겨진 '彌勒佛' 세 글자였다. 56억7000만 년 뒤에 나타나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원해준다는 미륵불을 대중은 왜 기다릴까. 현실 세계의 조악한 정치 때문이 아닐까. 장소가 금강산이라는 점에 힘입은 바도 컸겠지만, 나는 구룡폭포 앞에서 미륵불 세 글자를 보며 감동에 젖었던 추억을 이곳 사자루에서 다시 한번 맛본다.

사비정에서 왼쪽으로 돌아내려가면 낙화암이 나온다. 낙화암은 660년 의자왕의 3000궁녀가 망국의 한을 안고 뛰어내렸다는 전설의 바위이다. 꽃이 떨어진 바위!

낙화암의 본래 이름은 타사암(墮死巖)이었다고 전한다. 사람이 떨어져(墮) 죽은(死) 바위(巖)라는 뜻이다. 그렇다. <낙화삼천>에도 <꿈꾸는 백마강>에도 낙화암으로 나오고, 모든 국민들도 다 그렇게 부르지만, 낙화암은 타사암일 뿐이다.

60m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죽은 백제의 여인들은 '꽃'이 아니다. 낙화암은, 좋게 말하면 후세인들이 그녀들을 미화한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충성 이데올로기와 성차별의 완고함이 묻어 있는 어휘이다. 아마도 그녀들이 안다면 이렇게 항변하리라. 우리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다!

'삼천 궁녀' 운운도 고쳐야 옳다. 당시 백제는 전체 인구가 200만 정도였다. 그렇다면 3000명은 여성 100만, 그 중에서도 아이와 나이 든 이들을 제외한 젊은 여성 20만 중 1/66에 해당된다. 21세기 현재로 치면 7∼8만에 이르는 인원이다. 아무리 의자왕이 미워도 '3000궁녀'를 들먹이며 비난해서야 타당하지 못하다. 절벽 아래에 남아 있는 '落花巖' 세 글자는 송시열이 썼다고 하는데, 누가 지금 그곳에 올라 '타사암'이라 새긴다면 그는 물론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잡혀가리라.

고란사의 겨울
 고란사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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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람선을 탈 차례이다. <낙화 삼천>과 <꿈꾸는 백마강>에 두루 등장하는 고란사 앞이 승선장이다. 이 사찰에 고란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절벽 사이에서 고란초가 자란다는 데 연유한다. 현지 안내판은 이곳 고란초를 원효대사가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636년에 무왕이 기암절벽 사이사이에 기이한 꽃과 풀들을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과 더불어 백제의 멸망을 상징하는 역사유적 정림사터 석탑
 낙화암과 더불어 백제의 멸망을 상징하는 역사유적 정림사터 석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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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떠난다. 배는 물길을 타고 천천히 구드래나루로 나아간다. 이 물길이 백마강이다. 금강 중 부여 일대를 흐르는 물길을 특별히 백마강이라 부른다. 즉 백마강은 낙동강, 한강, 압록강, 두만강 식의 이름이 아니다.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무장 소정방이 쳐들어왔을 때 풍파가 심했다. 소정방은 고란사 앞 바위에서 낚시를 드리웠다. 미끼는 백마의 머리였다. 백마에 용이 걸려들었다. 그 용은 백제를 지키는 무왕의 화신이었다. 푸른 용이 낚시에 걸리자 당나라 군사들을 실은 배 앞을 가로막던 금강의 물결도 잠잠해졌고, 결국 백제는 망했다. 

백마강의 노을이 아름답다. 백마강의 아름다운 노을과 그 노을빛을 받아 낙화암이 붉게 물든 절경을 감상하려면 저물 무렵 고란사에서 배를 타야 한다. 그것도 가장 마지막 배를 타면 노을이 한껏 물드는 시각과 일치하여 최고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승선 시간이 언제인가는 묻지 마시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

백마강의 저물 무렵
 백마강의 저물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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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를 알기 위해 꼭 읽어볼 책으로 선성원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현암사), 박찬호 저, 안동림 역 <한국 가요사 1>(미지북스) 두 권을 소개드립니다. 이 기사의 내용도 두 책을 참조했음을 밝혀둡니다.



태그:#백마강, #고란사, #꿈꾸는백마강, #정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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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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