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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하늘광장. 정현의 조각 <서있는 사람들> ⓒ 오창환


비 오는 날은 웬만하면 스케치를 하러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라면 비 오는 날 방문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지난 8월 30일, 집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 내린 비가 경찰청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좀 더 굵어졌다. 비를 맞으며 길을 건너 조금 걸어가면 서소문 역사공원이 나오고 공원 지하에 박물관이 있다. 

조선시대에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소의문(昭義門)이 있었는데 보통 서소문이라 불렀다.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마포 용산 나루터를 통해 들어오는 물자가 도성으로 들어가는 통로이자 중국으로 향하던 의주로와 접해 있어 유동인구가 많아서 일찍이 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이곳은 어물과 채소의 거래량이 많아 일제강점기에는 수산청과시장이 만들어졌으며 1973년 수산 시장이 노량진으로 옮겨지면서 공원으로 변신했다. 여기까지가 서소문 공원의 밝은 이야기다.

아시아 최초의 국제 순례지, 이런 아픔이 
 
왼쪽 사진이 순교자 현양탑이다. 그 뒤쪽이 실제 처형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사진은 하늘광장에 있는 정현의 조각 <서 있는 사람들> ⓒ 오창환
 
조선시대에는 사직단의 오른쪽 즉 도성의 서쪽에 국가의 공식 처형장을 만들었는데 서소문밖 네거리와 당고개, 새남터, 그리고 절두산이 이곳에 해당했다. 조선의 이념에 반하는 반란군이나 동학교도들이 이곳에서 참수되고 효수되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부터 1873년까지 병인박해를 거치며 가장 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만 98명에 달하며, 이중 44명이 성인품에 올랐고 27명이 복자품에 올랐다. 2018년 교황청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포함한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국제 순례지로 승인했다.

경찰청 쪽에서 들어오면 입구에 보이는 것이 순교자 현양탑이다. 세 개의 큰 돌기둥은 죄수의 목에 채우는 칼을 상징한다. 현양탑 뒤쪽이 실제 처형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현양탑 옆으로는 뚜께우물이 있는데 우물이 크고 깊어서 평소에는 뚜껑을 닫아 놓았다가 처형 시 뚜껑을 열고 망나니가 사용한 칼을 씻었다고 한다.

지상에서 눈에 띄는 조형물은 <노숙자 예수>다. 벤치에 누워 담요를 덮고 누워있는 노숙자 양발에는 깊게 파인 못자국이 선명하다. 캐나다 작가 티모시 슈말츠의 작품인데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눈을 돌려 서소문 역사공원 지상을 보면 잔디밭과 조경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견 평범한 공원으로 보인다. 성지 역사박물관은 지하에 만들어져 있다.

우리에게도 위안의 말을 건네는 공간
 
위쪽 사진이 티모시 슈말츠 작품 <노숙자 예수>이고 아래쪽 사진은 상설 전시실 내부 모습니다. 상설전시실은 아치 형태에 흰 조명을 더해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이다. ⓒ 오창환
 
원래 서소문 공원에는 지하 4개 층 1만1000여 평의 공영주차장 공간이 있었는데 2011년 천주교 측에서 박물관을 만들 것을 제안했고 설계공모와 시공을 거쳐 2019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개관한다. 윤승현, 이규상, 우준승 3인이 공동설계했으며 2019년, 서울시건축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보통 멋진 형태를 가진 건물이 상을 받는다. 서소문 공원은 지하에 있기 때문에 특별한 형태라 할 것이 없다. 오로지 공간의 분할과 배치 그리고 그런 공간을 이어주는 길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 1층 입구로 들어서면 작은 도서관과 강당이 있고 지하 2층에는 성 정하상 바오로 기념 경당 예배실이 있다. 이 박물관은 메인 공간은 지하 3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쪽으로는 상설전시실이 있고 반대쪽으로 다목적 회의를 할 수 있는 콘솔레이션(위안, 위로) 홀과 지상으로 오픈된 하늘광장이 있다.

보통 어떤 장소에 스케치하러 가면 그 장소에서 가장 특징적인 곳을 그리고자 하는데 붉은 벽돌로 된 정방형 하늘광장을 보는 순간 '오늘은 여기서 그려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붉은 벽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과 한쪽에 있는 정현 작가의 조각 <서있는 사람들>이 인상적이다.

하늘 광장 한쪽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는 오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다. 철도 침목으로 만든 정현 작가의 작품을 하나씩 그려면서 나는 내면 깊숙이 빠져드는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위 사진은 곤여전도에 나오는 인어다. 상반신은 남녀구별이 되지만 하반신은 물고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래쪽은 코뿔소 그림인데 사실적이면서도 멋진 드로잉이다. ⓒ 오창환
 
상설 전시실에서는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나타내는 유물과 서소문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를 하고 있다. 그 시대의 다양한 문서와 그림도 인상 깊었지만 가장 흥미로운 전시물은 벽에 걸려있는 대형 세계지도다. 

곤여전도(坤輿全圖)는 벨기에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사제 페르비스트 신부가 1674년에 제작한 목판본 세계지도로 북경판(1674), 광동판(1856), 해동중간본(1860) 등 세 가지 판본이 전해지는데, 전시된 지도는 광동판(1856)이다. 곤여(坤與)는 큰 땅(大地)을 가리키는데,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지구'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도는 동반구와 서반구를 분리하여 원 위에 그려 넣고, 여백에는 구체적인 지리 지식과 관련된 내용을 써넣었으며 사람들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동물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지도에 그려진 동물 중에는 인어 같은 상상의 동물이 있는가 하면 코뿔소나 악어 같은 실제 동물도 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떤 사물의 크기를 나타내고 싶은 경우가 있는데 이때 사람을 그려 넣으면 다른 사물 크기의 척도가 된다. 당시 사람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가서 기린을 보고 크게 놀랬고 기린의 키를 나타내기 위해서 옆에다 사람을 그려놓았던 것 같다(다른 동물 옆에 사람을 그리지는 않았다). 나는 400년 전에 지도를 그린 사람의 생각을 읽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곤여전도에 나오는 기린을 그렸다. 기린과 사람이 같이 그려져 있어서 기린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 오창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박해받은 이들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이지만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위안의 말을 건넨다. 공간이 주는 엄숙함에 더해 곳곳에 있는 조각과 설치물도 좋다. 방문 스탬프를 찍으며 안내 데스크에 물어보니, 관람객들이 점점 많아진다고 하고 교황청에서 승인한 국제 순례지라 외국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태그:#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소문역사공원, #곤여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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