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0 13:15최종 업데이트 23.04.1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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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복순> 메인 포스터 변성현 감독의 전도연 주연 첫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이 지난 3월 31일에 공개됐다. ⓒ 넷플릭스

 
지난 3월 31일 공개된 변성현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이 비영어권 영화 스트리밍 1위를 차지했다. 영어권 영화들을 포함하면 전 세계 스트리밍 3위를 차지하며 크게 흥행 중이다. 하지만 이런 흥행과 달리 <길복순>에 대한 평가들은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 영화를 두고 흥행과 평가가 갈리는 일은 물론 딱히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영화를 통해 대중들이 무엇을 수용하고 있는지 한 번 짐작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길복순>은 킬러들의 어두운 세계와 그 안의 이야기를 다루는 액션영화다. 러닝타임 내내 많은 액션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이정범의 <아저씨>, 류승완의 <베를린>, 정병길의 <악녀> 등을 뛰어넘거나 참신함 등에서 어떤 성취를 보여줬다고 하기는 어렵다. 특히 <길복순>의 노골적인 레퍼런스라고 할 수 있는 채드 스타헬스키의 <존윅> 시리즈를 생각한다면 <길복순>의 스타일과 개성이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주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대사도 지나치게 상투적이면서도 과잉된 태도로 이루어져 때때로 작위적이고 거북한 느낌을 준다. 주요 줄거리로 설정된 킬러라는 비밀스러운 직업과 딸에 대한 모성이 충돌하며 겪는 갈등과 위기들도 딱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길복순>은 많은 영화적 요소들이 직선적으로 진열되기는 하지만 정작 관객들이 무엇에 집중해서 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다소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길복순>을 그나마 구원하고 있는 것은 참여한 배우들의 카리스마와 열연이다. 변성현은 그것을 탐닉하듯 담는다. <길복순>은 변성현 감독의 배우론 또는 페르소나에 대한 찬가라고 할 정도로 전도연과 설경구, 이솜, 구교환 등 주조연 배우들의 시선과 호흡, 그리고 카리스마에 다소 과도하게 기댄다.

<길복순>의 가장 흥미로운 요소 두가지

반면, <길복순>의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소위 '세계관'이라고 하는 영화의 독특한 설정들이다. 변성현 감독이 이 설정들을 깊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두 개의 비중있는 액션 신을 통해서 강조된다.

주인공 길복순의 직업은 청부살인이다. <길복순>의 세계에서 청부살인은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속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비밀스럽지도 않은 일처럼 보인다. 그리고 청부살인은 이미 많은 기업들이 엮인, 나름의 규칙이 있는 새로운 산업으로까지 묘사된다. 길복순은 이 청부살인 업계에서 베테랑 현역이면서 업계 모든 킬러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오른 말그대로 살아있는 전설 취급을 받고있는 최상위 킬러다.

앞서 <길복순>에서 청부살인은 일종의 산업처럼 묘사된다고 설명했는데, 그 이유는 길복순의 설정상 한국에는 이미 다수의 청부살인 기업들이 존재하고 이 기업들을 통해서만 청부살인이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복순이 속한 엠케이 엔터(엠케이는 'MK ENT.'로 표기된다. 즉 '엠케이 엔터테인먼트'다)라는 기업은 사실상 살인청부업계를 거의 마음대로 움직이다시피하는 거대 자본에 가깝다. 이 산업의 유일한 세 가지 규칙(1.미성년자는 죽이지 않는다 2.회사를 통한 살인의뢰만 처리한다 3.회사가 맡긴 의뢰는 반드시 실행한다) 역시 엠케이가 엔터가 만든 규칙이다.
 

길복순과 영지의 대련 장면. ⓒ 넷플릭스

 
처음으로 엠케이 엔터에 대한 흥미로운 설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은 회사에 들른 길복순과 엠케이 엔터 이사인 차민희(이솜)가 우연히 만나 지하의 연습생들을 응원하러가서 영지(이연)와 합을 맞추는 신이다. 엠케이의 지하에서는 기수 별로 연습생을 뽑아 킬러로 훈련시키고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경쟁을 통과하는 연습생들을 선발해 킬러로 데뷔시킨다.

이 연습생들에게 A급 킬러인 길복순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이며 영지는 이 연습생들 중 에이스이다. 길복순이 연습생들이 훈련하는 세트장에 등장하고 연습생 중 에이스인 영지목에 매직으로 빨간 줄을 그으며 가볍게 제압하는 시범을 보이자 연습생들은 길복순의 실력에 열광한다. 변성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엠케이가 사실상 한국의 옌예기획사들이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경쟁의 방법으로 킬러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론 이 시스템은 윤리의 공백으로 작동되며 그 공백은 탁월함과 성취, 환호성으로 메워진다.

이 장면이 지나간 후 비록 영화 외적이기는 하지만 내 머리를 스친 것은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El Pais) 기자가 방탄소년단의 RM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시스템(케이팝)은 비인간적인가요?" "회사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인터뷰가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비평가들과 기자들은 이제 거의 아무도 관심과 의문을 갖지 않는 한국 연예산업의 정치경제학적 질문을 던졌고 서른 살의 RM은 그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은 <엘파이스>기자에게 케이팝과 아이돌은 사실 음악장르가 아니라 한국 연예산업의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길복순>. 아마도 변성현 감독은 길복순의 킬러로서의 입지를 관객에게 환기시키고 차민희와 영지를 등장시키기 위해 산업 가장 하부에 있는 생산방식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런데 왜 킬러들의 생산방식이 케이팝의 생산방식을 따르고 있을까. 길복순은 왜 아이돌로 그려져야만 하는가.

다음은 우연히 아지트에 모인 길복순과 친밀했던 희성(구교환), 그리고 다른 회사 소속의 킬러들이 'B급 이상 킬러로 채용하겠다'는 엠케이 이사 차민희의 의뢰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모두 돌변해 길복순을 죽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물론 길복순은 전설로 불리는 킬러이기 때문에 일대 다수의 싸움이라고 할 지라도 의뢰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독특한 설정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온 모든 영화들에서 킬러들이 사람을 죽이고 받게되는 유일한 대가는 돈이다. 그런데 여기 아지트에 모인 킬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길복순에게 덤벼드는 이유가 돈이 아니다. 이들이 목숨을 거는 이유는 단지 엠케이 엔터에 '채용'되기 위해서다. 엠케이 엔터에 대한 소속감을 원하는 것이다. 이 구도에는 한국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적 계급의 사회구조가 압축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길복순에게 덤벼들고 있는 킬러들은 계급 상승의 욕망을 추구한다. 이 욕망 앞에서 그들이 그간 나누었던 우정은 이제 몰가치하다. 길복순과 종종 술을 마시며 지내던 킬러 현철(최병모)은 길복순에게 덤벼들며 이렇게 읊조린다. "복순씨가 이해해요. 사는 게... 뭐 그렇잖아요." 길복순도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요. 인생 뭐 셀프니까."

<길복순>은 한 편으로는 길을 잃은 영화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오직 한국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을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길복순>에는 경쟁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강박들의 중심에는 엠케이라는 거대 자본과 위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작동한다.

변성현 감독은 이 경쟁들에 대해 더 나가지 않고 다소 가볍게 풍자하는 데 그치지만 <길복순> 속 엠케이 엔터가 지배하는 세계가 한국 사회의 어떤 단면들과 꼭 닮아있다는 걸 발견할 때, 그리고 그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어떤 위화감의 발설도 없이 수용할 때 모골이 송연한 건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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